0061 / 0101 ----------------------------------------------
소명이 말했다.
“……. 아…….”
“아냐? 그럼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누나 기준으로 100점짜리 답안은 그런 거예요?”
“아니면 뭐. 음. ‘붉은 번개의 틈’을 완전히 와해시킬 방법을 찾았다거나.”
더 기다렸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서 기선은 소명의 말을 막고 제 할 말을 해 버렸다.
“제가 준 맥브라이언의 최면을 풀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소명은 묻다가 방금 전에 정인이 장 항과도 인사를 나눴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인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소명에게 눈짓을 했다.
소명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구나. 서림 언니한테 걸린 최면을 기선이가 푼 거야.’
소명의 눈짓에 정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영이가 주도적으로 환영을 불러들이기도 해요. 희영이가 보고 싶어하는 게 전부 다 보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던칸을 볼 수 있을지 시험해 볼 거예요. 희영이가 던칸을 볼 수 있어도 아마 던칸은 희영이를 보지 못할 거예요.”
아무래도 옆에 장 항이 있으니 말을 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서림이 누나 같은 경우에는 그 누나한테 있는 능력 때문에 희영이랑 서림이 누나가 서로 볼 수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명과 정인은 기선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짐작했다.
“알았어. 안 나온 문장에 대해서도 이해했어.”
“네?”
소명의 말에 오히려 기선이 놀랄 정도였다.
“그럼 던칸을 불러내 봐. 그리고 최면을 풀어. 그렇게 해 놓기만 하면 살 궁리는 자기가 찾을 거야.”
“네. 그렇겠죠.”
“그러면 사이크가 던칸을 만날 필요도 없게 되겠네. 여러 가지로 할 일이 줄어드는데?”
“그렇죠?”
기선은 의기양야하게 말했다.
“그래. 잘 했다. 남의 일감 줄이지 말고 내 일감을 줄여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네?”
“아니야. 뭐. 그 정도도 잘 한 거지.”
선우 형이 옆에서 키득거렸다.
“누나 일감은 뭔데요?”
“데려갈 사람 몇 명을 챙기려고. 나랑 손 발 맞는 애들 몇 명을 솎으러 가는 중이야.”
“믿을만한 사람들이에요?”
기선이 물었다.
“그래서 정인이랑 가는 거잖아. 정인이가 연우보다 더 유용한 것 같아. 참. 거기에 지금 연우는 없는 거지?”
“네. 연우 형은 시영이 형이랑 나갔어요.”
기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연우는 일단 누군가 진술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잖아. 그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알아내는 거고. 그런데 정인이는 한 사람의 역사를 통째로 스캔해내니까 굳이 진술을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소명이 말했다.
“누나. 연우 들어왔어요.”
선우 형이 말했다.
“으앗. 그래? 연우는 뭘 그렇게 쏘다니니? 바깥 바람 쐬니까 좋든?”
소명이 지나치게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면서 이미 다 들었어요. 저도 저한테 있는 능력이 정말 미미하다는 거 아니까 제 뒤에서 그렇게 짚어주실 필요 없다고요.”
연우는 정말로 기분이 상했는지 조목조목 말했다.
“에잇. 미안해. 설마 도중에 네가 들어올 줄은 몰랐지. 앞으로는 네가 돌아오기 전에 뒷담화를 끝낼 수 있도록 주의할게.”
“뭐라고요? 앞으로도 계속 하긴 할 거라는 거예요?”
연우가 버럭 소릴 질렀다.
“연우야. 여기에서 끝내면 너만 손해잖아. 다른 사람 뒷담화도 돌아가면서 해야지.”
“아, 그런 거예요? 시영이는 사실 아직 안 들어왔어요. 시영이에 대해서는 할 말 없어요?”
“그 샌님 얘기는 말하기도 귀찮다.”
“아하하하.”
연우는 유난히 좋아했다.
시영도 때맞춰 들어오기는 했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연우가 스스로를 별로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자괴감에 빠져 있는 걸 모르지 않아서였다.
“아, 연우는 있다가 누나랑 다시 통화 좀 하자.”
소명이 말했다.
“왜요?”
“누나가 준 맥브라이언한테 소개하고 싶은 녀석이 지금 복역중인데 교도소에서 귀휴를 허가받을 수 있을까 해서.”
“귀휴요? 무슨 죄로 수감됐는데요?”
“네가 생각하는 그거.”
"저는 흉악범죄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거."
"귀휴 요건은 갖췄어요?"
"네가 알아봐야지."
"내가 쉽게 알만한 사건이에요?"
"그 녀석 이름이 지강은이야."
“지강은요?"
소명이 예상한대로 연우는 지강은이라는 이름에 즉각 반응을 했다.
사건의 잔혹성과 사건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일들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많았지만 연우와 시영은 그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논점들을 조목조목 알도 있었다.
"그럼 그 일을 누나가 시킨 거예요?"
연우가 물었다.
“아니. 말을 하자면 좀 복잡한데. 너, 나중에 다시 전화해.”
“알았어요. 그런데 만약 안 되면 어쩔 건데요?”
“그러면 다른 녀석들 중에 추려봐야 되겠지만 웬만하면 차선책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으음……. 어느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지는 알아요?”
“응.”
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죄수가 출소하기 전에 일정한 사유에 따라 잠시 휴가를 얻어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귀휴라고 한다.
귀휴를 신청한다고 해도 모두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영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그렇겠네.”
연우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운전중이니까 기선이가 사이크한테 전화해서 알려줘. 사이크는 그럼 먼저 미국으로 출발해도 될 것 같아. 남은 일들은 기선이가 알아서 해결해줘. 지강은에 관한 건 정인이를 시켜서 문자를 보내줄게."
소명은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연우야”
항이 조용히 연우를 불렀다.
"네?"
“네가 우리 중에 가장 뛰어나. 왠줄 알아?”
연우는 항이 재미없는 드립을 칠 거라고 생각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항은 조용히 미소를 지은 후에 말했다.
“우리는 수용하거나 반응을 유발하지. 수용하는 사람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반응을 유발하는 사람들은 전제조건을 제대로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해석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오히려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나쁜 처지에 빠지게 돼."
"......."
“누군가 장난으로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걸 희영이가 봤다고 해 봐. 희영이는 그 사람을 살인자라고 판단할 수 있어. 그러면 일을 그르치겠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너는 해석할 수 있잖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막강한 힘은 진실을 가려내는 힘 아닐까?”
“…….”
연우는 정말 항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정인이보다도 더 나은 걸까요?”
연우는 욕심을 내서 물었다.
“정인이도 마찬가지지. 정인이도 수용하는 능력이잖아. 과거의 정보를 수용하지. 사람은 변할 수 있잖아. 과거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해서 지금 예단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다들 알았죠? 항이 형이 지금까지 틀린 말을 한 걸 본 적 있는 사람? 아무도 없죠? 이로써 내가 제일 중요한 사람인 걸로 결정이 난 거예요.”
시영은 연우의 마음이 풀어진 것 같아 다행으로 여기며 항을 보고 웃었다.
하지만 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영이 자기를 보고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그 시간에 소명은 항의 이야기 중에 나왔던 끔찍한 살인범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누굴 만나러 가는 건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정인이 물었다.
“응.”
“왜요?”
엉뚱한 대답에 웃으며 정인이 다시 물었다.
“네가 괜히 겁 먹을까봐. 그런데 너야말로 걔를 만나는데 적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가기는 가는데 만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면회가 되려는지.”
“왜요?”
“면회를 간 날마다 면회금지였거든.”
“왜요?”
정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교도소 내에서 소란을 부렸다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을 거야.”
“어떻게 알게된 사람인데요?”
“그게. 꽤 복잡해.”
“어떻게요?”
“지강은이라고 들어본 적 있지?”
“……. 그런 것 같긴 한데 가물가물해요.”
“그런가? 하긴. 그 세대가 아니구나. 정인이는.”
“오래 전 일인가보죠?”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 이상한 살인 사건이 있었어. 정말 이상한. 지강은이 처음에는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을 했는데 그 후로 자꾸 번복을 했어. 그래봤자 CCTV화면도 있고 목격자들도 많아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강은이는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버텼어. 모든 증거가, 그리고 자기의 기억까지도 자기를 범인으로 지목하는데 강은이는 그게 자기가 아니라고 했어. 경찰은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를 한 걸로 봐서 절대로 초범은 아닐 거라는 전제 하에 강은이한테 여죄를 추궁했어.”
“왠지 곧 언니 이름이 나올 것 같네요.”
정인의 말에 소명이 피식 웃었다.
“그래. 강압 수사에 못 이겨서 강은이가 결국 거짓 자백을 했어. 다른 사람을 죽인 일이 있다고. 그렇게 하면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거짓자백을 했는데 이제는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대라고 한 거지. 강은이는 말을 하지 못했고 그게 형사들 눈에는 비협조적으로 버티는 것처럼 보인 거야.”
“그래서요?”
“강은이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시체가 있는 장소를 말했어. 야산 어디쯤이라고 꽤 구체적으로 말했지. 지번까지 댔을 정도니까. 형사들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댈 정도면 정확히 알고 있는 거라고 했는데 자기가 사람을 파묻은 곳의 지번을 아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겠어?”
“지번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를 생각해 보기 이전에, 사람을 죽이고 파묻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을 걸요?”
“어머. 정말이니? 누구에게나 몇 명쯤은 땅 속에 파묻어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아냐?”
“파묻어 버리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지는 않죠.”
“좋은 지적인데?”
소명이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아. 중장비를 동원해서 유해를 발굴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지. 나는 왜 강은이 머릿속에 하필 그 지번이 떠올랐던 건지 알 수가 없어.”
“설마 정말로 거기에서 시체가 나왔어요?”
“응.”
“혹시. 언니랑 연관된 시체였어요?”
“노 코멘트다.”
“허억.”
“어쨌든 그것 때문에 강은이는 유죄판결을 받았어. 정신감정에서 강은이가 심신미약에 해당된다는 견해가 있었는데 법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어. 그러다가 강압수사가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졌고 강은이가 지목한 곳에서 나온 시신이 전혀 다른 과정으로 죽었다는 게 밝혀졌지.”
“어떻게요?”
“진범이 투서를 했거든.”
“자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투서만요?”
“투서도 대단한 것 아냐?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애를 썼잖아.”
“왜 두둔하세요, 언니?”
정인이 웃었다.
“그것도 노 코멘트.”
“정의를 바로잡으려면,”
정인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소명이 정인의 말을 끊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하지."
소명의 눈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오직 자기 존재의 소멸로만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쓰레기들이 종종 있는 법이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