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 / 0101 ----------------------------------------------
“하지만 어떻게요? 최면으로 사람을 전신마비 상태로 만든 사람인데요? 최면으로 제민혁을 자살하게 만든 사람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죠?”
사이크의 말에 소명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꽤 좋은 생각이긴 하지? 그 문제가 해결되기만 한다면 말이야. 그 문제는 내가 생각해 볼 테니까 너희는 기둥을 무너뜨릴 방법을 연구해. 알았지?”
지명과 사이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누나를 믿어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사이크. 던칸을 만나볼 방법은 없겠어?”
소명의 말에 사이크는 곧장 얼굴을 찡그렸다.
“그 문제는 누나가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쪽은 네가 더 쉽게 접근할 수가 있잖아.”
“몇 명을 거치면……. 아. 스크루업 CFO가 스크루업으로 오기 전에 대통령 선거캠프에 있었던 적이 있다고 했는데. 던칸을 직접 알지는 못해도 알음알음으로 자리를 마련해줄 정도는 될 걸요?”
사이크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기둥 떼내기는 지명이 혼자서 하고 사이크가 던칸을 만나.”
“그럼 누나는요?”
곧바로 지명이 물었다.
누나 혼자 노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눈빛으로 보내면서.
“나? 오합지졸을 데리고 출격할 수는 없잖아? 쓸만한 사람들을 모을게.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해야 했어.”
“전 뭘 할까요, 언니?”
정인이 말했다.
“그건 네가 정해. 너는 누구한테든 도움이 될 테니까. 네가 과거를 스캔해주면 우리가 그 사람 손을 잡아야 할지 버려야 할지 정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언니랑 같이 가도 돼요?”
“물론이지. 그렇게 해준다면 나도 좋지.”
“그럼 그렇게 할게요.”
“좋아. 우리 꽤 팀웍이 좋은 것 같지 않냐?”
소명이 혼자 들떠서 말했다.
“글쎄요. 썩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지명이 말하자 정인이 피식 웃었다.
“우선 지명이 넌 기선이한테 전화해 봐.”
“또요? 왜요?”
“던칸을 살릴 방법을 찾아내라고 해보자고. 오히려 그쪽에서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모두가 베리쳐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베리쳐의 자산을 운용하기 전에 동의를 구해야 하잖아.”
“그건 그렇죠.”
지명이 말했다.
“던칸 상원의원이 죽을 걸 알고 있다면 준 맥브라이언이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지명이 말했다.
“그렇지. 화살 몇 개가 날아오는 걸 막자는 게 아니니까 우리도 제대로 준비해야 돼. 베리쳐의 자본만으로는 어렵다고.”
“아버지한테도 말해 볼게요.”
지명이 말했다.
“퓨쳐 컨트롤만으로도 안 돼.”
“그럼요?”
“돈을 빌릴 방법이 없을까?”
“퓨쳐 컨트롤의 미국법인을 통해 투자은행에서 빌릴 방법이 있긴 하겠죠.”
사이크가 말했다.
“참. 타이라가 뱅커가 됐다는 거 알아?”
사이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지명에게 말했다.
지명이 깜짝 놀라면서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지명의 표정만으로 타이라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누나. 타이라요. 아. 누나는 타이라를 모르시는구나.”
사이크의 말, 지명의 표정, 그리고 정인의 얼굴까지 쭈욱 둘러보면서 소명이 물었다.
“그게 누군데?”
“지명이가 하버드에 남겨두고 온 지명이의 첫사랑요.”
사이크는 혼자서 키득거렸다.
정인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고 지명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아휴, 이런 푼수.’
소명은 사이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참았다.
뱅커라고 불리는 투자은행가들은 극심한 경쟁에 시달렸고 그곳은 거의 백인 남자들에 의해서 움직였다.
그런데 타이라가 거기에 당당히 입성해서 제 역할을 꿋꿋하게 해 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이크가 자꾸만 히죽거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타이라가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었는지 지명을 만나고 돌아가서 한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갑자기 워튼에서 MBA에 도전을 하더니 돌연 뱅커가 되었던 것이다.
남들은 실연을 맛보거나 방황을 한다고 하면 술이나 약물에 쪄들어 살면서 허송세월을 할 텐데 타이라는 자기가 가장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공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일에 썩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퓨쳐 컨트롤이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소명이 물었다.
“가능할 것 같은데요?”
사이크가 말했다.
“나는 그냥 1,2조를 말하는 게 아니야. 사이크.”
소명이 말했다.
“저도 그 정도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미국 국방부 한 해 예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십분의 일 정도라고 하면 어떻겠어요?”
“그 정도를 빌릴 수 있을 거라고?”
“퓨쳐 컨트롤은 꽤 견실한 회사에요. 미국 법인도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고요. 그냥 단순히 성장중이라고 말하는 걸로는 부족할 정도로 미친 성장을 해 왔죠. 그 정도를 빌릴 수 있겠냐고 했죠? 지금부터 타이라랑 딜을 해 봐야죠.”
“타이라가 그런 걸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타이라는 어소시에이트에 불과해요. 하지만 제가 아는 엠디들이 몇 명 있어요. 제가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타이라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좋아. 이제 말이 좀 통하는 것 같네.”
“대신 일이 잘 안 됐을 때는 정말 많은 걸 감수해야 된다는 걸 이해하셔야 될 거예요. 누나.”
사이크가 말했다.
“많은 것 뿐만 아니라 전부를 내걸 각오를 하고 있어. 어차피 이 일이 잘 안되면 우리는 전부 죽는 거야.”
“그렇겠죠.”
“그런데 시간이 촉박한데 괜찮겠어? 가능할까?”
“시간을 충분히 갖고 하는 일이라면 못할 사람이 없겠죠.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니까 타이라가 자기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거예요. 타이라는 그런 일에 흥분하는 성격이죠. 타이라가 어떤 걸로 흥분하는지는 지명이가 가장 잘 알겠지만.”
사이크가 끝내 망언을 터뜨리자 정인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노려보는 대상이 지명이 아니라 사이크였다.
“왜, 왜 나를 봐, 정인?”
“지금 내 기분을 긁어대고 있는 사람이 사이크니까요.”
“어어? 아니, 그건…….”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정인은 눈을 부릅뜨고 경고의 눈빛을 날렸다.
사이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일단 타이라와 통화를 좀 해 봐야겠다면서 성급히 나갔다.
지명은 정인에게 사과했고 정인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정인이 말했다.
“오오. 쿨하네.”
소명이 말하면서 지명의 등을 툭 쳤다.
“전략을 세워봐. 준 맥브라이언처럼 생각해 보자고. 던칸 상원의원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남자는 어떻게 할까? 어떤 것들을 쇼핑 카트에 담고 어떤 것들을 창고에서 치우려고 할까?”
“미국 채권을 팔겠죠. 미국이 혼란에 빠질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달러도 팔고 유로화나 엔화를 사들일 수도 있어요. 니켈이나 금 같은 걸 사댈 수도 있고 던칸과 공생관계에 있던 기업들의 주식은 전부 팔아치울 거예요. 던칸이 어떤 법안을 지지했는지, 어떤 법안의 통과를 저지했는지도 알아봐야돼요. 그 사람은 한 사람의 상원의원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으니까 던칸이 사라지면 세력이 흩어질 가능성이 높거든요. 꽤 파급력이 클 거예요.”
“우리는 준 맥브라이언을 뒤따라 가면서 그 남자가 파는 걸 사고 그 남자가 사는 걸 팔아 치우면 돼.”
“잘 안 되면 엄청난 일이 생길 거예요.”
“'잘 안 되면'이라는 가정에 대해서 나는 자주 생각하지 않아.”
소명이 말했다.
“되게 만들면 되거든. 그러니까 네가 던칸을 살려.”
“왜 또 난데요, 누나!!”
“넌 천재잖아. 던칸을 살릴 방법을 찾아보라고.”
“우와, 시간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래도 너는 스프레드시트가 도와주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무식하게 발로 뛰어야 돼. 누가 더 편할 것 같아?”
“일단은 알았어요.”
“좋아. 파이팅이다. 정인이는 나랑 가자.”
서로에게 손을 흔들면서 나가려는데 사이크가 지명을 불렀다.
소명과 정인이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보자 사이크가 황급히 그들을 보내려는 것처럼 훠이 훠이 쫓는 손짓을 했다.
"기선이한테는 내가 전화할 테니까 지명이는 다른 일들 확실하게 해 놔."
소명이 말하자 지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타이라한테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인데 너는 할 얘기 없어?”
마침내 지명만 남게 되자 사이크가 물었다.
“없어. 없어. 없어!!!”
지명이 말했다.
“칫, 괜히 성질 부려. 흥!!”
**
타이라는 낯선 번호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회사와 가까운 곳에 맨해튼의 끝내주는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아파트를 얻었지만 한가하게 야경을 구경할 날은 아직 맞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 타이라. 나 사이크야.”
“사이크?”
사이크는 몇 년만에 전화를 하면서 지난 주에 통화를 한 사람처럼 편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이크. 내 머리가 이렇게 좋지만 않았으면 절대로 너를 곧바로 기억해내지 못했을 거야.”
타이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겠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내 친구들은 다 머리가 좋아. 그래서 몇 년 만에 전화를 해도 나를 기억해주지.”
“어쩐 일이야?”
“굉장히 피곤한 모양이다. 목소리가 원래 그렇게 갈라지고 탁했나?”
“마음껏 지껄여라. 이 개자식. 3주동안 로드쇼를 했어. 투자자들을 찾아서 미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거든. 나는 전세기와 리무진을 타고 회장이랑 CEO들이랑 같이 돌아다니는 게 환상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개뿔. 내 아파트에 돌아온 게 얼마만인줄 몰라. 너 만약에 어제 전화를 했다면 내 목소리 듣지 못했을 거야.”
“정말?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거네?”
“그래.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럼 내가 운이 좋은지 어떤지 말해줘.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야? 나쁜 소식이라면 하필 너랑 연락이 닿은 내 운이야말로 정말 나쁜 거잖아.”
“나는 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흥분할 거라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사이크의 예상은 맞았다.
열정으로 들끓어서 흥분하는 대신 어이없는 제안을 듣고 흥분했다는 사실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미쳤어. 사흘이라고?”
“굉장하지?”
“굉장하냐고? 굉장히 미친 거지, 너?”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네 머릿속에 지금 몇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고 있지? 네가 써먹을 수 있는 이름들은 다 써먹어봐. 스크루업도 투자하기로 했어.”
“스크루업은 너만큼이나 미쳤잖아.”
“타이라. 지금 슬금슬금 네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게 돼서 너는 지금 흥분하고 있는 거야. 내 말이 맞지?”
“전화 끊어. 이 괴짜야. 사흘밖에 주지 않으면서 더 이상 내 귀한 시간을 뺏으려고 하지 말라고.”
“좋아. 타이라. 바로 그거야.”
**
선 사장은 지명의 질문에 지명이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거의 같은 답을 내놓았다.
미국의 핵심적인 정계인물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재구성해야할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지명은 확신을 가졌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알려주면 안 되겠냐?”
선 사장이 물었다.
지명은 머뭇거리다가 사실을 털어 놓았다.
어차피 이번 일은 퓨쳐 컨트롤의 전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