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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과오는 칸트가 지고 갈 겁니다. 칸트는 던칸의 심장을 쥐고 있었고 그건 던칸에게 위협이 됐겠지요. 사람들은 꽤 놀랄 거예요. 대통령도 한동안 충격에 빠지겠죠. 가여운 린다의 진정한 친구인 줄 알았던 상원의원 던칸이 린다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걸 알면 말입니다. 던칸. 당신은 오랫동안 나한테 쓸모가 있었지만 죽음으로 정점을 찍게 되겠군요.”
준은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던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던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검은 유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일 사무실에 나올 거예요. 던칸. 그리고 사흘 후, 문을 다섯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이 책상에 앉아 총구를 입에 물고 총을 쏘는 겁니다. 이 소리를 기억해 둬요."
준은 던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책상을 다섯 번 두드렸다.
그리고는 던칸을 놔둔 채 일어섰다.
던칸은 얼이 빠진 얼굴로 준을 바라보았을 뿐, 준과 그 일행이 나가는데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준에게서 당장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하면 준과 붉은 번개의 틈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의 손은 공포로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내심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음 선거때까지 큰 스캔들만 터지지 않으면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거칠게 쓸어 버리고 두 주먹으로 책상을 쿵쿵쿵 내리쳤다.
“있을 거야.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라고. 어떻게든 찾아야 돼. 살아야만 한다고!!”
그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외쳤다.
***
기선의 방에 모인 사람들은 갑자기 희영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끈기를 가지고 희영을 기다려주었다.
희영은 절규하는 던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준 맥브라이언에게, 상원의원 하나를 묻어버리는 일 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희영은 알고 있었다.
기선은 희영이 감정의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환영을 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야?”
이윽고 희영이 눈을 뜨자 기선이 물었다.
“칸트가 죽었고 이제 그 일로 '붉은 번개의 틈'에 이목이 집중되는 걸 막으려고 준 맥브라이언이 연막을 터뜨리려고 하고 있어요.”
“어떻게?”
“상원의원한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죽일 생각인가 봐요. 던칸에게 최면을 걸었어요. 사흘 후, 다섯 번 문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던칸이 총구를 입에 물고 자살할 거예요. 칸트의 죽음도 상원의원의 짓으로 몰아가려나 봐요. 어떤 그림을 그리려는지 감이 와요. ‘붉은 번개의 틈’에 피해자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거예요. 박해 당하는 종교단체의 이미지를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할 곳으로 달아나면 되잖아?"
시영이 말했다.
"매일 그곳으로 나오도록 명령을 내려뒀어요. 아마 던칸은 준 맥브라이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할 거예요. 누구보다도 달아나고 싶겠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이 예견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겠죠."
"준 다워요."
아미가 말했다.
“……. 일단은 서림이 누나 얘기부터 먼저 끝내자.”
기선이 말하자 희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된 거죠?”
“우리가 준비할 게 뭐가 있어. 희영씨만 준비되면 되는 거지.”
선우 형이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에게 환시가 보였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서림.
원치않는 축복을 내려야 하는 사람.
서림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
벽에 걸린 그림과 서명.
항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서림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결연했다.
환시가 사라진 후로 무거운 침묵이 꽤 오랫동안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시영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시영의 말에 모두가 시영을 바라보았다.
“형한테 그 얘기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시영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론……. 이런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는 건 지붕이 내려앉는,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찾아오라고 등을 떠미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아. 형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 붉은 번개의 틈도, 준 맥브라이언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잖아. 형수가 저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서 무작정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영은 그 말을 하고 아미를 바라보았다.
그 사정은 네가 잘 알지 않냐고 물으려는 것 같았다.
“당연하죠. 함부로 출입이 허락되는 곳이 아니에요. '붉은 번개의 틈' 교도들은 거의 내부에서 상주하기 때문에 특별히 나올 일이 없거든요. 한 번 들어간 사람들은 거의 나오기가 어렵다고 봐야 돼요. 준 맥브라이언의 수행원이나 나 같은 연구원들이 그나마 자유롭게 출입 할 수 있는 정도에요. 경비가 삼엄해요. 더군다나 서림 누나가 있는 곳까지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봐요.”
“거기에는 늘 방문객들이 있잖아. 그 틈에 섞여서 들어가는 방법은 없을까?”
연우가 물었다.
“그 방법으로는 가능성이 좀 커지긴 하겠지만 일단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준이 전부 알잖아요.”
“유우신. 유우신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긴 할 텐데.”
지명이 말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일 때문에 얼굴을 바꾼다고?”
선우 형이 말했다.
쉽게 결론에 이를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잖아요. 우리는 어차피 준 맥브라이언과 맞설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공격이 멈추긴 했지만 그건 칸트라는 측근의 죽음 때문에 준 맥브라이언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러는 것 같고 나는 곧 그 미친 인간이 다시 행동을 개시할 거라고 봐요.”
희영이 말했다.
“그래. 알아. 희영씨가 하는 말에 반박할 생각은 없어. 전부 옳은 말이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그저.”
시영이 모두를 돌아보면서 말을 골랐다.
“형한테는, 최후의 순간까지 말하지 말자는 거야.”
“최후의 순간?”
연우가 물었다.
“형수를 구하는 그 순간. 그렇지 않으면 형은 폭주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이 저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봐.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생각해 보라고. 너라면 견딜 수 있겠어? 잠시라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먹는 건 제대로 먹고 잠은 편히 잘 수 있겠어? 숨을 쉬는 것조차 미안하게 여겨질 걸? 그 일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할 거고 형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으로도 괴로워할 거야.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괴로워하겠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형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거야.”
시영이 연우에게 말하자 한 사람씩 고개를 끄덕였다.
“형한테는 말을 하지 말고 어쨌든 누나를 구해내자는 거군요.”
기선이 말했다.
“응.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희영씨가 말한 대로 맥브라이언은 다시 행동을 개시할 거고 어차피 우리도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 돼.”
“후우우우.”
시영의 말에 연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의 하얀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준 맥브라이언이 어떤 인간인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그로서는 온갖 나쁜 상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잘 안 되면 말이죠.”
아미가 말했다.
“뼈까지 녹여버릴 만한 황산 농축액에 우리를 산 채로 빠뜨려서 용해시켜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시신도 남지 않고 죽을 거예요. 황산에 먼저 닿은 부분이 녹아내리면서 가라앉겠죠. 결국에는 비명을 지를 입도 타서 녹아버릴 거고요.”
아미가 말했다.
굳이 그런 설명은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지명이 말을 했지만 아미는 더 알려주고 싶어했고 연우가 결국 아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들어가는 것 말이야.”
갑자기 선우 형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들어가는 게 홍채인식 시스템이나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 지키고 서 있다가 문을 열어 주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선우 형의 말에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열어주는 건 맞아요.”
“내가 그 사람들의 경계심을 없앨 수 있을 거야.”
“그러긴 하겠지만……. 정말 그럴 생각인 거예요? 모두들요?”
아미가 절규하듯 말했다.
“아미. 겁이 난다면 넌 빠져도 돼. 유우신한테 부탁을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새 얼굴로 고쳐 달라고 해 보자.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서 맥브라이언의 기억에서 잊힌 채로 살아.”
기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지명은 아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미는 갈등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은 하고 있는 거예요?”
아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을 말릴 수만 있다면 막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들은 오래 생각하는 건 더럽게 싫어하는 사람들 같았고 어렵게 결정한 것을 다시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같지도 않았다.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져도 좋아. 절대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니까.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인 건데.”
선우 형이 말했다.
“그 말은, 형은 빠지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연우가 물었다.
“내가 없이 준 맥브라이언의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선우 형이 웃었다.
“하긴. 형은 빠질 수가 없겠네요.”
“소명이 누나도 안 되고 장항 형도 안 돼요. 두 사람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두 사람은 꼭 가야 되는 거예요. 공격형으로 믿을 사람들은 두 사람 뿐인데.”
지명이 말했다.
“히나타는? 히나타가 같이 가 준다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기선이 말했다.
“히나타한테 물어볼게요.”
지명이 말했다.
“히나타는 신사를 떠나서는 위력이 떨어지잖아. 그게 거리와 상관관계가 있다면 히나타한테 굳이 위험부담을 시킬 필요가 없는 걸지도 몰라.”
희영이 말했다.
“그럼 그걸 알아 봐야겠군.”
연우가 말했다.
“그동안 기선이가 히나타의 강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해 봐야겠지. 히나타는 쉽게 포기할만한 병기가 아니잖아.”
선우 형도 거들었다.
“그래요. 일단 히나타한테 부탁은 해 보자고요.”
지명은 대답하면서 기선을 바라보았다.
“왜?”
기선이 물었다.
“형의 강화가 히나타한테도 통하는 거예요?”
“몰라. 나는 그냥 신비로운 인물일 뿐이잖아. 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몰라. 내가 무슨 능력을 가진 건지도 모르고. 그냥 사람들이 내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각성시키고 강화하는 것 같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고 생각만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막 그, 그, 시간을 멈추는 능력 같은 거?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그러니까 총알 같은 게 날아올 때 형이 멈춰주면 좋겠다.”
지명이 말했다.
“총알? 그러네. 정말. 이제 그런 게 막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하는 거잖아?”
연우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이크랑 저쪽 지명이한테도 얘길 해야 되겠지? 그리고 누구보다 소명이 누나한테.”
기선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