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55화 (5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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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은 뒷자리의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붉은 번개의 틈을 떠나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들떴던 크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크리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웃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아서 그렇지 크리스도 밖에 나간 적이 있었을 거야.”

갈아입을 옷을 골라주면서 에단이 크리스에게 말했다.

“어차피 재미 없었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일이 기억에서 사라졌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네. 그리고 아빠가 나를 여기로 데려 왔잖아요. 바깥보다는 여기가 더 좋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빠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겠죠.”

“그래.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제가 틀렸어요, 에단?”

“아니. 하지만 바깥 세상에도 즐거운 일이 꽤 있을 거야.”

“정말요? 어떤 거요?”

“우선. 음. 바깥 세상에서 칸트와 만날 거야.”

“정말요, 에단? 우리 셋이서 같이 노는 거예요?”

“응, 아주 기대되지?”

“네, 에단. 칸트도 같이 나가는 거예요? 아니면 칸트는 미리 나가서 기다리는 거예요?”

“아마 칸트는. 먼저 나가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와, 완전 신나요, 에단.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이랑 함께 밖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좋아?”

“네. 저는 에단이랑 칸트가 정말 좋거든요. 다음에 붉은 번개가 치고 하늘의 틈이 열리면 그때 세 사람이 같이 올라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는데요?”

“그래?”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에단은 어떻게 생각해요?”

“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크리스는 내내 들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칸트가 타고 있는 차의 곁을 지나쳐 에단이 차를 세웠다.

칸트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에단은 칸트를 발견했지만 크리스는 그러지 못했다.

“칸트는 왜 안 오죠?”

크리스는 거의 1분에 한 번 꼴로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크리스. 너한테 산소마스크를 씌워줄 거야.”

에단이 말했다.

별 일 아닌 척 말을 하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렸다.

“왜요? 저는 건강한데요.”

“그래. 건강하지. 하지만 이걸 쓰면 조금 더 안정이 될 거야. 졸음이 몰려오다가 결국에는 아주 좋은 기분이 들 거야.”

“제가 왜 이걸 써야 하는데요?”

크리스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칸트가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거든. 기다리는 건 지루하잖아.”

“그래서 한숨 자라는 거군요?”

크리스는 자기도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는 듯이 씨익 웃어보였다.

크리스에게 주입된 아산화질소가 신경계에 작용하며 졸음을 일으켰고 혈액속의 산소량을 감소시켰다.

몽롱한 상태에서 크리스는 눈을 꿈벅이며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크리스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미안해.”

에단은 눈물 맺힌 얼굴로 크리스에게 말했다.

크리스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죽은 크리스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단은 크리스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차에서 내려 멀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칸트가 달려왔다.

“크…리스…는……?”

에단은 고개를 돌렸다.

칸트가 에단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둔 크리스가 있었다.

“고통은……, 없는 거였지?”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칸트는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붉은 번개가 치고 하늘의 틈이 벌어지면 칸트와 나랑 함께 그 틈으로 올라가고 싶다고 했어요.”

“잘 됐네. 결국 그렇게 될 테니까.”

칸트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에단이 칸트를 안았다.

처음에는 에단을 밀어내던 칸트도 결국에는 체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겁이 나니?”

“아뇨.”

“그래? 나는 겁이 나는데.”

“정말요?”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모르겠어요. 생각을 정말 많이 해 봤는데. 칸트를 위해서는 단 번에 끝내고 싶었지만, 붙잡힐 때까지 칸트와 숨쉬고 싶다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어요.”

“배기관에 진공호스를 연결할까? 그 끝을 집어넣고 천천히 죽어가고 싶어?”

“모르겠어요. 정말로요. 죽는 게 두려운데도 칸트랑 함께 하는 시간에 자꾸 미련이 남아요.”

에단은 슬슬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였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생명을 박탈당하는 당사자로서는 그 일에 관여해 본 바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

칸트가 물었다.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만약 그러기를 원했다면 크리스를 죽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불가능하겠지. 붉은 번개는 어디에나 치니까.”

“칸트. 번개는 붉지 않아요.”

“이제와서 그걸 깨닫는다면 인생이 너무 비참해지잖아. 나는 번개가 붉다고 믿을 수밖에 없어.”

에단이 칸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칸트를 끌어안았다.

“너도 믿어봐. 하늘의 틈이 열릴 거라고.”

에단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를 겨눈 총구가 관자놀이에 닿았다.

에단은 칸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당신한테 이 일을 맡겨서.”

“에단. 나는 믿을 거야. 하늘에 틈이 열릴 거라고.”

“그렇다면 나도 믿어볼 수밖에 없잖아요.”

“준비됐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요?”

“아니. 그러지마. 나는 네가 죽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 그러지마.”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흐르기도 전에 피냄새가 났다.

뜨거운.

무거운 피냄새.

거대한 주먹에 맞고 비틀거리는, 기력이 다한 선수처럼 에단이 쓰러졌다.

칸트가 그의 몸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발.

번개가 치길 바랐다.

“에단. 어떻게 하니. 하늘의 틈은 열리지 않으려나 본데. 우린 어떻게 해야 하니…….”

회한의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피묻은 손이 끈적거렸다.

권총 손잡이가 미끄러져서 칸트는 웃었다.

“어디가 됐든. 셋이 같이 가 보자구. 즐거운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거야. 크리스. 신나는 곳으로 가 보자. 준비된 거니?”

총알은 칸트의 연약한 피부를 찢고 들어가 두개골을 뚫었다.

순간 번개가 친 것 같기도 했고 그 번개가 붉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잠시.

하늘에 틈이 열린 것 같기도 했다.

***

던칸은 자꾸 웃음이 나서 웃음을 감추느라고 혼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오늘은 그 잘난 칸트가 절대로 나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즐거웠다.

준 맥브라이언이 직접 그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어지간히 애가 닳았던 모양이지. 하긴. 엉덩이에 불이 붙었는데 언제까지 느긋하게 굴 수 있겠어?’

던칸은 어떤 표정을 짓는 게 좋을지 거울을 보고 오랫동안 연습을 했다.

칸트에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모른 척 해줄까?

준이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맙소사. 칸트는 준 맥브라이언의 여자였는데. 한낱 연구원하고 차 안에서 죽었다니. 게다가 뒤에서 죽어있던 애는 또 뭐냐고. 칸트가 마지막에 공격을 제대로 성공시켰어. 이번에야말로 붉은 번개의 틈이 세상에 드러나서 몇 주동안 물어 뜯기게 될 걸? 그러면 준 맥브라이언은 나한테 사정을 하겠지. 뭘 요구할까? 뭘 받을 수 있을까?’

준은 던칸의 비밀스런 사무실로 곧바로 들어왔다.

칸트와 함께 다닐 때는 볼 수 없었던 경호원 세 명이 그와 대동했다.

‘준은 벌써 겁을 먹은 거야.’

던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거야말로 겁을 먹은 증거라고.

하지만 준의 표정을 봐서는 그리 급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이런. 준. 프로라 이건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해 봐야 당신한테 이로울 건 없을 텐데.’

던칸은 연신 미소를 지었다.

도무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소리내서 웃지 않은 게 어딘지.

“기분 좋은 일이 있나보군요. 던칸.”

준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경호원들인가요?”

던칸이 물었다.

“왜요? 관심이 생깁니까?”

“아뇨. 좋아보이는군요. 쓸만해 보여요.”

“그래요?”

“별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어차피 신경쓰지 않아요.”

던칸은 준이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롭게 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번에는 붉은 번개의 틈이라고 해도 빠져나가는 게 만만치가 않을 겁니다.”

던칸이 말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보죠?”

준이 말했다.

“붉은 번개의 틈과 관련된 수많은 죽음과 수많은 시신이 있었지요. 거기에 직접 빗물이 닿지 않게 하려고 한껏 장막을 쳐서 가려보려고 하긴 하지만 이렇게 일이 커지면 내 역량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요. 준. 조금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군요. 늙은 정치인이 겸손을 떨 리는 없고. 칸트에게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던데 자신이 없나봐요. 던칸.”

던칸은 인자하게 웃었다.

“준. 우리 여러 말로 낭비할 것 없이 솔직해지죠. 준은 지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언론이 붉은 번개의 틈에 집중할 거예요. 그리고 그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고 뇌며 장기며 심장까지 전부 다 파먹으려고 하겠죠.”

“그럴 때 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앞장 선 던칸의 사진을 같이 싣겠죠.”

준의 도발에 던칸은 큰소리로 웃었다.

“준. 나한테는 내 편이 많아요. 나는 지금까지 꽤 기민하게 살아왔죠. 잠수함으로 납치돼도 나한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줄 사람이 있을 정도예요.”

“그래요? 재미있네요.”

던칸은 점점 이 대화가 지루해진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솔직하게 구걸하면 도와줄 수도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해 볼까?

던칸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던칸.”

준이 손을 내밀자 준을 따라 들어왔던 수행원 중 하나가 신문을 준에게 건넸다.

“이건 내 오래된 취미 생활인데요.”

던칸은 힐끗 신문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눈에 띌 것 없는 워싱턴포스트였다.

“이게 뭐죠?”

“이런 기사가 실리면 사람들한테는 붉은 번개의 틈에 쓸 관심이 남지 않을 것 같아서요.”

던칸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짝 당겨 앉으며 신문을 제대로 펼쳐들었다.

[던칸 상원의원. 린다 살해의 교사 사실을 밝히고 자살]

던칸은.

처음에는 웃었다.

악의적인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준. 장난이 지나치군요.”

“그런가요? 이걸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준이 뒤의 수행원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보이스 레코더의 녹음파일을 재생시켰다.

그러자 곧 칸트와 던컨의 통화 내용이 흘러나왔다.

“칸트. 너구리가 제 발로 기어 들어왔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던칸의 목소리였다.

던칸은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자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좋아요. 던칸을 위해서 잘 된 일이네요.”

“린다하고는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죠. 대통령도 알지 못하는 린다의 성적 기호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거든요.”

그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눈에 잡힐 듯 선명했다.

던칸은 칸트와의 통화내용을 기억해보려 애썼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시간낭비가 아니길 바라요, 던칸.”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칸트. 우리의 퍼스트 레이디가 레즈비언이란 말입니다.”

“뭐라고요?”

“내 계획은 이래요. 사흘 후에 의회 아래에 있는 내 비밀 사무실로 린다를 초청할 겁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필요 없어요. 던칸. 그걸 던칸한테 준 게 ‘붉은 번개의 틈’인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네, 그렇죠. 일단 사무실로 데려 가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린다한테 붙은 꼬리는 전부 다 따돌릴 수가 있어요.”

“그렇겠죠. 아무도 그곳의 존재를 모르니까.”

“그때부터는 칸트가 도와줬으면 해요.”

“내가요?”

“너구리를 유인하려면 미끼가 필요하죠. 칸트야말로 너구리를 홀릴만한 미끼가 될 거예요.”

“그 다음엔요?”

“어느 정도는 사실을 말할 겁니다. 어차피 며칠 안에 죽을 사람이잖아요. 칸트가 내 최대 후원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칸트를 린다에게 소개해 줄게요.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은 후에 칸트가 린다에게 함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하는 거죠. 어떨 것 같습니까?”

“나쁘지 않군요.”

“제가 맡을 부분은 이미 그렇게 이루어진 거나 다름 없습니다.”

“장난해요, 던칸? 내가 맡을 부분이야말로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곧 너구리 요리를 맛보길 기대하면 되겠군요.”

“좋아요. 물먹은 너구리라 맛은 없을 것 같지만.”

“이제 전화를 끊어야 돼요, 칸트. 너구리가 오고 있어요.”

통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던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주… 준……! 나한테 이럴 필요 없어요. 준. 칸트와 붉은 번개의 틈이 이 일에 연관돼 있다는 걸 밝히겠다는 건 아니죠. 준!”

던칸은 애원하는 심정으로 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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