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 / 0101 ----------------------------------------------
“희영아, 왜 그래?”
기선이 희영에게 다가와 희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희영은 그제야 기선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항에게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희영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기선씨. 잠깐 나 좀 봐요.”
희영의 말에 모두가 멀뚱히 희영을 바라보았다.
항조차도 희영을 바라보았다.
항과 눈이 마주치자 희영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고 항은 무슨 일이냐는 듯 희영을 바라보았다.
“왜? 혹시 나에 관한 일이야? 혹시 내가 죽는 걸 미리 보기라도 한 거야?”
항은 기껏 그런 말이나 하고 있었다.
“뭐에요, 형.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한 거예요?”
선우 형이 타박을 했지만 희영은 웃지 않았다.
“뭐야. 진짜야?”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아,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기선씨. 잠깐 나 좀.”
희영은 급히 기선의 팔을 잡고 그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항이 입을 열었다.
“내가 죽는 게 맞는 모양인데?”
그가 말하자 아미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지명이 형이 다시 구해줄 텐데 뭘 걱정하세요.”
그러자 그 말에 히나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참 복잡미묘한 연쇄사슬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무슨 일인데?”
문을 닫으면서 기선이 곧장 물었다.
“기선씨.”
“그래. 듣고 있잖아. 얘기해 봐.”
“내가 그림을 봤다고 얘기했죠?”
“응, 그림을 그리는 여자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움직이지 못한다면서. 네 시가 될 때까진.”
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그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건데. 아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나는 다른 의미로 생각했어요.”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기선이 초조해하며 희영을 재촉했다.
“그림에는 한결같이 사인이 돼 있었어요. 나는 화가가 왜 거기에 ‘HANG’이라고 적었는지 몰랐어요. 걸어두라는 의미였는지 목을 매단다는 의미였는지.”
“그런데?”
“지난 번부터 내가 달라지고 있어요. 내 능력이 달라진다고 해야 맞겠죠.”
“이런. 희영아. 좋지 않은 얘기잖아. 그러면 더 견디기 힘들어 지는 거 아니야?”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더 자세히 보인다거나 그러는 게 아니에요.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뭔데?”
“목소리가 들려요. 발성을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생각하는 말이 나한테 들려요. 생각이 전부 읽어지는 건 아닌데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떠올리면 그쪽에서도 아는 것 같아요.”
“지금까진 그런 일이 없었잖아?”
“그런 일이 없었죠. 무엇보다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거든요. 그래서 시도해 보게 된 건지도 몰라요. 생각이 읽히는 게 나 때문인 건지 그 쪽의 영향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처음에 하려고 했던 말을 해 봐.”
“그 그림이 밖에 피어난 꽃이랑 똑같다는 얘길 했죠?”
“응.”
희영은 입을 다물고 기선을 바라보았다.
기선은 어서 얘길 이어보라며 재촉을 하려다가 점점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세상에.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되잖아. 형수는 죽었어. 형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장 항 오빠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에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나도 못 믿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그 분이 항 오빠의 아내라는 걸 모른 채로 내가 말했어요. 남편을 찾아가서 내가 말을 해 주겠다고. 그런데 한사코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실을 알고 살아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무 큰 고통이 될 거라고.”
“하지만……. 형은 알아야 될 거야.”
“그렇죠. 그런 거죠…….”
“희영이 네 생각은 어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뭔가, 계속 연결이 되고 있어요. 오빠는 자주 꽃을 보잖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꽃들을 봐요. 나는 두 사람이 여전히 연결된 거라고 생각해요.”
“아…….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 형수가 그런 상황이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말할 수가 있지?”
“나도 슬프고 괴로워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형한테, 그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있는 거지?”
“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기선씨는 그런 나를 보고 있을 수 있겠어요? 나라면 못 볼 것 같아요. 기선씨가 사라진다면 처음에는 제발 생사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겠지만 기선씨가 고통을 당하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나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
“알아요. 말해야 돼요. 말해야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 해보자. 우리끼리 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기선의 말에 희영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슬슬 장을 보러 가야 한다는 말에 항은 젊은 녀석들이 알아서 나서겠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놈씩 어지럽다는 둥, 배가 아프다는 둥 핑계를 대더니 급기야 할 말이 궁해진 아미는 자기는 지금 걸을 기분이 아니라는 핑계까지 댔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나타가 항에게 같이 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왜 나야?”
항이 물었다.
“으음.”
히나타는 자기까지 이유를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냥. 좀 그래주면 안 돼요?”
히나타가 당돌하게 말하는 바람에 항은 어쩔 수 없이 히나타를 따라나섰다.
남은 사람들은 작당이라도 한 것처럼 기선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만약을 위해서 문을 걸어잠그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준비됐다고 생각하자 희영이 그들에게 환시를 보였다.
환시가 보이자 아미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서림인데?”
“서림 누나라고 해. 이 자식아!”
기선이 말했다.
본의아니게 반말을 한 걸로 간주되어서 혼이 난 아미는 재빨리 정정했다.
“서림 누난데.”
“누나를 알아?”
“당연하죠. 붉은 번개의 틈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준 맥브라이언과 서림일 걸요?”
“서림 누나라고 하라니까!”
기선이 또 소리를 지르자 희영이 기선을 나무랐다.
“조용히 해 봐요. 아미. 계속 말해 봐. 저 언니가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대체 왜?”
“서림은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나도 서림을 검사해 봤는데 서림의 뇌 기능은 거의 전부 죽었다고 봐야돼요. 심장박동과 호흡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서림과 함께 있던 사람들의 병이 사라졌다는 증언이 쏟아져나왔죠. 메스컴에서도 떠들썩했고 서림은 거의 성녀로 추앙받아요.”
“저 그림을 언니가 직접 그린다는 걸 알고 있어?”
희영이 물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데요? 서림은, 아, 서림 누나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해요. 스스로 몸을 뒤집지도 못해서 항상 행동보조사가 곁에 같이 있어요.”
아미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그렇게 알려져 있지.”
“그렇게 알려져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탈탈 털어서 조사를 했어요. 서림 누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라니까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하지만 아미. 네가 틀렸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희영이 차분하게 말하자 아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미는 뭔가 더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희영은 다시 환시를 보여줄 뿐이었다.
네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저건 제단 앞에 있는 시계에요. 소리가 정말 멀리까지 퍼지죠.”
아미가 말했다.
“저 소리가 서림 누나 방까지 들리는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저 소리는 정말 커서……!”
아미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열심히 쫑알거리다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서림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아미도 본 것이다.
놀란 사람은 아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고 잠옷차림으로 내려와서 팔레트에 물감을 짜는 서림을 보고 아미는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저건…, 불가능한, 정말, 저건……!!”
아미가 놀라움으로 말을 더듬었다.
“지금부터 잘 봐야 돼요, 모두들.”
희영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림 속의 서명을 보세요.”
“행?”
시영이 말했다.
“행? 왜 저런 단어를 쓴 거지?”
이번에는 연우가 말했다.
“아뇨. 영어 단어가 아니에요. 한국 사람 이름이죠.”
희영의 말에 서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누군데요?”
지명이 물었다.
“항 오빠야. 장 항 오빠. 서림 언니는, 오빠가 죽음으로 잃었다고 생각한 오빠의 아내야.”
“……!”
누구의 놀라움이 가장 큰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희영이는 서림 누나와 얘기할 수가 있어. 주로 서림 누나가 누워있는 시간 동안에 가능한 것 같아. 누나는 준 맥브라이언의 최면에 걸려있어. 네 시를 가리키는 종소리가 들려야 누나는 움직일 수 있게 돼. 아미, 누나를 검사한다고 너희들이 누나에게 자극을 가했을 때도 누나는 그걸 전부 다 느끼고 있었어. 아프지만 소리지를 수도 없었고 몸을 피할 수도 없었어. 누나 몸의 신경들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어. 그것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통증을 전달했지.”
“맙소사…….”
아미가 절망스럽게 외쳤다.
“문제는. 우리가 알아낸 걸 항 형한테 말을 해야 하느냐 하는 건데. 서림 누나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야. 누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 나라고 해도 어쩔지 잘 모르겠거든. 이 일은 우리 두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서 모두를 부른 거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말 좀 해 줘.”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
칸트는 준이 오기를 기다렸다.
준은 한참만에야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몇 시간만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준!”
칸트가 그를 향해 달려갔지만 준은 냉정하게 칸트를 외면했다.
“너한테 더 바라는 건 없어. 단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어주기만 한다면.”
“준……!”
칸트는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준의 팔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준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칸트를 쏘아보며 뒤로 물러섰다.
“에단은 어떻게 된 거지, 칸트?”
“준!”
“버티면 내가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나? 꽤 귀여운 구석이 있군. 칸트도.”
칸트의 어깨를 슬쩍 치고 지나치면서 준이 칸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에 내 앞에 나타날 때는 에단이 끝났다는 사실을 보고하러 오는 거라고 기대하겠어.”
“……!”
어디선가 불길한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