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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신을 할 때까지 울고 그대로 잠에 빠져드는 항을 기선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조용히 나무를 바라보았다.
꽃들이 경건하게도 피어났다.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제각기 해석을 하려고 했다.
연우는 조용히 시영에게 속삭였다.
“너무 오랫동안 금욕 생활을 해서 형도 모르는 사이에 불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 아닐까?”
“아닌 것 같은데?”
시영은 의미 없이 책장을 넘겨 가면서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니까? 우리처럼 건강한 남자들이 이 신사에 틀어 박혀서 죽은 것처럼 살고 있잖아. 이건 정말 잘못된 거라고. 선우 형 형도 마찬가지고. 아미는. 음, 아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고. 저 나이때는 원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니까 딱히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아니냐고.”
“나는 형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진 않은데? 특히 장 항 형은 말이야.”
“네가 몰라서 그래. 아휴, 이런 밥통.”
연우는 열을 올렸다.
“그럼 네가 물어보지 그래? 너는 형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잖아.”
“아, 그럼 그래볼까?”
“정말 물어보려고?”
시영이 물었다.
“물어봐야지. 동생이 돼 가지고 형의 고충을 헤아려 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못된 놈인 거지.”
“그 말, 지금 나한테 하는 것 같다?”
“그래. 이 못된 놈아.”
“뭐라고 물을 건데? 너무 직접적으로 묻진 말고.”
“형. 여자 안 필요하세요? 이러면 되지 않을까?”
“너무 격 떨어지잖아.”
“그래도 너무 우회해서 물어보면 형도 우회해서 대답하실 텐데 그럼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기가 힘들잖아.”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
“어째 너는 발을 빼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 그렇게 들렸어? 센스가 좋아졌는데? 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더럽게 못 알아먹더니.”
“이 새끼가 죽을라구!”
시영이 킬킬 거렸다.
“근데 여자는 어디에 있는데?”
시영이 물었다.
“히나타한테 힘 좀 쓰라고 해야지. 소개팅 좀 시켜 달라고.”
“소개팅? 나무신이 소개팅 주선을?”
“편견을 버려. 나무신이 소개팅 주선을 한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잘 하겠냐. 사랑의 작대기가 그냥 바로바로 나오잖아.”
“나는 가끔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좀 창피해.”
“견뎌. 어쩌겠어. 이제와서 나를 버릴 거야?”
연우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더니 일어섰다.
“어디에 가려고?”
“형들한테. 물어봐야지.”
“지금? 정말로 물어보게?”
“이 새끼 진짜 못 됐네. 저는 욕구 풀었다고 아주 남의 사정에는 통 관심을 안 보이네.”
“욕구를 풀어? 그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럼 아니냐?”
연우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더 상대를 하기가 귀찮아서 시영은 그래, 그래 라고 말해버렸다.
연우는 마침 지명의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찾아냈다.
히나타는 편하게 얘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지만 연우는 히나타의 역할이 누구보다 중요하다면서 히나타를 자리에 주저 앉게 했다.
“제 역할요?”
히나타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상황이 굉장히 불안정하잖아요.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고 섣불리 어딜 가는 것도 안전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으로 가 버리는 것도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고.”
“네. 그건 그렇죠.”
히나타가 말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붕뜬 상태로만 사는 것도 그렇고.”
“네. 그렇죠.”
“히나타. 소개해 줄만한 여자 혹시 없어요?”
“여자요?”
연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히나타는 우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사에만도 귀여운 아가씨들이 자주 돌아다니던데.”
“네에?”
히나타가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형, 누굴 봤던 거예요?”
지명이 물었다.
“이런 저런 많은 사람들.”
연우는 기도 죽지 않고 말했다.
“그 중에 몇 명은 우리한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요?”
연우가 물었다.
“꼭 아니라고 할 수만은 없지만.”
“그것 봐요. 히나타도 정말 나쁘네. 자기한테 지명이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네에?”
히나타가 지명을 바라보았다.
“대체 하고 싶은 소리가 뭐야?”
보다못해 선우 형이 나섰다.
“한창 땐데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형은 안 그래요?”
형은 시선을 회피했다.
“형은 안 그래요?”
연우는 이번에는 항에게 물었다.
“나는 안 그런다.”
“네? 정말요?”
“그래. 정말.”
항이 말했다.
“에에에이. 조금도 그런 생각이 안 든다는 거예요? 아주. 요만큼도요?”
연우가 끈질기게 들러붙었지만 항은 요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전혀.”
“왜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요?”
연우가 말했지만 항은 웃기만 할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 외로움 탈만도 하겠는데 히나타가 소개해 줄 수 있는 여자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지 그래요?”
항이 히나타에게 말하자 히나타는 즉시 머리를 굴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누가 좋을까?’
“저도요? 저한테도 소개해 줄 거예요?”
아미가 물었다.
“아니. 너는 안 돼. 너는 아직 너무 어려.”
연우가 말하자 아미는 실망한 얼굴로 연우를 따라다니며 졸랐다.
“야. 나를 따라다녀 봤자야. 패를 쥐고 있는 사람은 히나타잖아. 잘 보이려면 히나타한테 잘 보여야지.”
“아, 그런가?”
아미는 그때부터는 히나타를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굴었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은 거야?”
보다못해 지명이 아미에게 물었다.
“아뇨. 왜요?”
“그럼 왜 그래?”
“뭔가 좋은 걸 하는 것 같으니까 저도 끼고 싶어서요.”
“아휴. 하나도 좋은 거 아냐.”
연우가 아미를 달랬다.
아미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고 아미의 그런 표정 때문에 사람들이 웃었다.
항도 기분 좋게 웃음을 지은 채로 창 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 핀 꽃들도 그를 보고 웃는 듯했다.
준은 서림의 방에서 나오면서 곧장 돌아가려다가 칸트가 들어왔는지를 보러 갔다.
던칸을 만났던 일은 잘 되었는지 물을 겸 겸사겸사.
마침 용건도 있고 하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준은 칸트의 방 문 앞에서 호흡을 조절했다.
‘젠장,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칸트와의 관계를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기관의 절반이 기능을 멈추어버린 느낌이었다.
노크를 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귀 기울여서 들어보면 안에서 기척이 들리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칸트.”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불렀다.
안에서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직인 건가?
던칸과 만난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의 귀에 낯익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칸트였다.
준은 고개를 들었다.
코너를 돌아 복도에 칸트가 오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칸트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맑고 높은 소리로 웃었던 게 언제였나 싶었다.
준은 칸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누군지 바라보았다.
에단은 환하게 웃으면서 칸트에게 농담을 하고 있었다.
준은 에단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가 누군지도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바로 크리스의 귀를 막아주었던 연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가 분명히 그랬어. 내가 더 좋다고 했어. 에단은 너무 시끄럽데.”
“내가 시끄럽다고요? 세상에. 거짓말이죠? 크리스가 그렇게 말했을 리 없어요.”
준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코를 엄청나게 곤다고 하던데?”
“네? 그럴 리가 없어요. 코 곤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동안 다른 사람이랑 잔 적 있어?”
“아뇨. 연구원실은 일인 일실이잖아요. 혼자 자요.”
“그러니까 얘기해 줄 사람이 없었겠지.”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정말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아니, 그런데 크리스는 왜 그 얘길 칸트한테. 이 녀석을 가만히 두면 안 되겠는데요?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박히도록 매운 맛을 보여줘야 겠어요.”
“크리스한테 그러지마.”
칸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크리스라는 공통 분모 아래 두 사람의 연대는 굳건해 보였다.
“다 왔네요.”
“그러게.”
칸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방 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어색하게 머뭇거렸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풋내기들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데려다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데려다 줘서 고마워. 이제 가봐.”
“네.”
“응.”
“칸트.”
“응?”
“몸조리 잘 하세요. 지금은 다른 사람보다 칸트를 먼저 돌봐야 할 때에요.”
“알아. 좀 더 신경쓸게.”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은데도 에단은 돌아서려 하질 않았다.
칸트가 먼저 돌아서서 열쇠를 밀어넣었다.
에단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했는지 이리 저리 돌려보는데도 잘 열리질 않았다.
손잡이를 몸 쪽으로 당기면서 돌려보는데도 잘 되지 않았고 어느새 에단이 다가왔다.
“제가 해 볼게요.”
잠깐동안 손이 스쳤다.
칸트는 놀란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붉어지는 얼굴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에단의 얼굴이 칸트의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에단에게 안긴 꼴이 되었지만 벗어나겠다고 움직이다가는 그와의 접촉이 불가피할 것 같았다.
에단은 열쇠를 잡기만 했을 뿐 문을 열려고 하지는 않았다.
“칸트…….”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귀를 통해 들어가 칸트의 심장을 흔들어댔다.
“에단. 고마워. 나머지는 내가 해 볼게.”
에단의 입술이 내려왔다.
칸트는 고개를 돌리며 그 입술을 피했다.
에단은 칸트의 입술을 잃었고 슬픈 눈으로 칸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욕심이 나요. 처음엔 어떻게든 억눌러야 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는데 더 이상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걸 왜 가질 수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왜 포기해야 하는 건지. 칸트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죠. 그렇죠?”
그가 애원하는 표정으로 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에단.”
칸트가 에단을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틀렸어. 에단.”
“칸트한테는 언제나 준 뿐이라는 건가요?”
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단은 다시 고개를 내려 키스를 시도했고 칸트는 고개를 돌리고서 에단을 밀어내며 뿌리쳤다.
“에단. 어떤 순간에 나는 너를 내 유일한 동료라고 믿었어. 계속 그렇게 믿고 너한테 기댈 수 있게 해 줘.”
“싫어요.”
에단이 말했다.
“뭐?”
“당신의 동료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한테 남자가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개인적인 만남은 이걸로 끝내야 되겠군. 크리스를 잘 돌봐줘. 앞으로 그곳에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칸트!”
“나한테는 준 맥브라이언이 나의 정의야. 미안하다.”
칸트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다시 열쇠를 밀어넣었다.
열쇠는 단번에 들어갔고 그동안 속을 썩였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문이 열렸다.
인사도 없이 에단의 앞에서 문이 닫혔다.
준은 기둥 뒤에서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에단은 상처입은 짐승의 눈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복도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