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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사랑을 나누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비루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서림은 여전히 웃을 수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가 그녀와 함께 죽은 것과는 반대였다.
가끔 끔찍한 그리움이 그녀를 극한의 슬픔으로 몰아넣을 때가 있었다.
서림은 슬프게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의 그림을 그렸다.
‘HANG’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 매번 떠오르는 메시지였다.
“서림.”
준이 서림을 불렀다.
하지만 서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의 존재를 무시했다.
서림은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준에게 주고 있었다.
준은 서림을 납치할 수도 있었고 서림의 영혼을 가두는 것까지도 가능했지만 서림의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가장 간단한 것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벽마다 가득 걸린 서림의 그림에는 힘이 있었다.
온화한 힘이건, 행복을 다시 꿈꾸게 하는 힘이건,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건.
그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고 그들의 기운과 의지를 북돋아주었다.
서림을 성녀라고 믿는 사람들, 서림이 자신들의 병을 대신 가져가 주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쩌면 스스로를 치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서림이 그림으로 보낸 희망의 메시지를 보면서 다시 도전해 보기로 힘을 낸 것이 그들을 강하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색은 행복의 본질에 다가가도록 한다는 것을 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림이 육체에 갇혀 있는 동안, 육체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떠돌아 다녀야 하는 동안 서림이 절망과 불안과 죽음 같은 공포로 자신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대신 사색을 함으로써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을 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지치지 않는 기억의 원천이 있었다.
서림의 남편과 아이.
서림은 생각하고 꿈꾸고 기억을 낚아 올리며 자아를 용해시키며 우주와 만났고 그것은 신성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준은 서림이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돌아앉아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차가운 물감들이 서림의 붓끝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림의 붓에 닿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물감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들은 그때부터 하나의 사물, 그 형체를 스스로 입었다.
스스로 그것이 되는 것 같았다.
준은 자주 서림의 방을 찾아와서 서림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곤 했다.
물감은 미끼이면서 동시에 치어들일 수도 있었다.
화폭에 서림이 붓을 놀리면 거기에서는 생명력으로 펄떡이는, 살아 숨쉬는 것들이 넘쳐났다.
서림이 놀리는 붓은 낚싯대 같았다.
낚싯대를 던진 후에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난다는 점에서 순서의 역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서림.”
준은 서림을 다시 불렀다.
자기가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서림이 준을 무시하는 것이, 준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헨리 입센의 말대로,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거기에 진정한 반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더군다나 영혼을 납치해 구속하는 인간에게라면 더더욱 그 말이 정확히 맞아들어갈 것이었다.
준은 서림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이제는 새롭게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서림은 거친 나무 등걸에 피어나는 꽃들을 그렸다.
기어이, 기어이 꽃들이 맺혔다.
준은 서림이 그려내는 그 꽃송이들을 하나씩 다 떼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한테도 아이가 생길 뻔 했어요.”
준이 말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고해성사와도 같았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 전혀 그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뺀다면 그것은 꽤 적절한 비유가 됐을 터였다.
“칸트. 알죠? 칸트. 칸트는 나한테 오랫동안 신실한 벗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친구 이상의 존재가 돼 줬어요. 나는 칸트를 사랑했고 칸트도 나를 사랑했다고 믿어요. 어쩌면 지금도 그럴 것 같고. 그런데 이제 칸트에게서 아이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칸트가 나한테 다가올 때마다 나는 매일 매일 견고해지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멈춰 버렸어요. 성장이 멈춘 게 아니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서림은 준이 하는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그녀만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봐야 꽃 피우는 나무에 불과했지만.
“칸트와 함께 있으면 우리가 같이 서 있는 땅이 갈라져서 우리를 삼킨다고 해도 별로 두려울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불안해요. 나라는 사람이, 내 곁에서 한 사람이 돌아선 것 때문에 이런 느낌을 갖는다는 게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준은 끈질겼다.
하지만 끈질긴 것으로 말하자면 서림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칸트가 견디기 힘들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제때 멈추질 못했어요.”
유독 한 곳에 꽃들이 참 소담하게도 피어났다.
서림은 만족스런 눈으로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하늘.
바람이 구름을 밀고 갔고 그 아래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서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그 꽃송이들 위에 HANG이라고 새겨 넣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미친 살인마를 충동하는 짓이 될까봐서 서림은 우선은 그의 이름을 밀어 두었다.
마침내 항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으로 인해서 소망하는 걸 멈춰본 일이 없었어.
그러면 아마.
그러면 아마.
항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서림은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충만해졌고 그것이 슬픔으로 변모되게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새벽이 끝나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다시 또, 움직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에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그와 가졌던 행복한 기억들은 절대로 기만적인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서림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의 밑바닥보다도 더 밑에 깔려 있는 것들을 건들어서 자기가 함부로 잊었던 추억을 건져 올려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강제수용소에 드는 따뜻한 햇살에 감격하는 법을 배웠고 햇살 한 조각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법을 배웠다.
진심으로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 1초도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서림에게는 사형선고가 될 것이다.
항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기선은 희영이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을 보았다.
희영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희영아.”
기선이 희영의 손을 잡았다.
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희영이 기선의 손을 붙잡았다.
희영이 자고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기선은 생각했다.
“왜 그래, 희영아. 왜 울어.”
연인의 눈물을 보는 것이 이렇게 아픈 일이라는 것은 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희영아.”
기선은 희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희영에게서 한도 없이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 남자의 곁에 머무는 동안, 이 능력은 끝도 없이 정교해지고 깊어질 모양이었다.
이제는 영상이 보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각의 일부와 감정까지도 보였다.
그날 희영은 서림을 보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희영은 서림이 어떤 상황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림이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푯대로 의지하는 그 사람이 자신이 아는 그 항이라는 사실 말고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제대로 이해했다.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꽃들이 그렇게 슬프게 보일 수가 없었다.
눈물 흘리는 희영을 그녀가 바라보았다.
서림은 정확히 희영을 바라보았다.
희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준은 절대로 찾을 수 없는 희영을, 그녀는 곧바로 찾아냈다.
그리고 웃었다.
‘다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같은 그 웃음 때문에 더 눈물이 쏟아져 버린 것 같았다.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은 서림의 위로는 그야말로 처절했다.
희영은 한없이 흐느꼈다.
기선이 걱정할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무지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서림은 희영을 보고 웃어주다가 드디어 웃음을 거두고 침대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서림은 손가락 끝조차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서림이 잠에 빠져들거나 고통에 잠식되는 시간이 아니라, 서림이 추억을 낚으러 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서림에 의해서 새롭게 정의되고 새롭게 명명되었다.
그 모든 것이 알아져서 희영은 참을 수 없이 눈물을 터뜨렸다.
“희영인 어때? 잠은 좀 잤어?”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오지 못한 희영을 걱정하며 항이 물었다.
“오늘은. 울더라고요. 비명을 지르거나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어찌나 우는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어요.”
“무슨 일이래? 희영이가 말은 안 해?”
“모르겠어요. 뭔가 또 한 단계가 발전한 것 같아요.”
“영상을 보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갖게 된 거군.”
“그런 것 같아요. 좀 더 세밀하게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몰라요. 뭘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았거든요. 희영이가 울음을 그치면 좋겠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이라는 게 이렇게 강력하게 저를 후벼팔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가만히 있다가 무방비로 당한 느낌이에요.”
기선의 말에 항이 빙그시 웃음을 지었다.
기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아프지. 치명적이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말이 맞아요, 형. 차라리 제가 죽고 싶더라고요.”
“희영인 강한 사람이야. 결국에는 더 강해질 거고.”
“그렇겠죠.”
“히나타.”
항이 느닷없이 히나타를 불렀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히나타가 항을 바라보았다.
지명도 그를 바라보았다.
“꽃이 피었어. 봤어? 나무에.”
“네?”
히나타가 항의 눈길을 따라가며 물었다.
“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창가로 달려갔다.
첫눈을 구경하는 아이들처럼.
유독 나뭇가지 하나에 많은 꽃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항은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와 가슴에 꽂힌 것처럼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은 그의 가슴에서 피를 뿜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울게 만들었다.
“이런. 세상에!”
항은 자기 몸에서 철철 흘러나는 피를 보고 놀라는 것 이상으로,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에 당황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진 채 오열을 했다.
그의 견고한 댐이 갑자기 무너졌다.
기선은 그의 울음이 희영의 울음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형, 괜찮아요. 괜찮아요, 형.”
기선이 항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울음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흐느낌은 격렬해졌고 그의 오열은 통곡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