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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가 태어난 이후로 처음 겪어보는 치욕이었다.
이윽고 두 무릎이 전부 바닥에 닿았을 때 칸트는 거만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이미 준비해두었던 수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삼백만달러에요. 아껴 쓰도록 노력해 봐요. 우리가 자주 보면 그때마다 무릎을 꿇어야 할텐데 번거롭지 않겠어요? 나야 기대가 되지만.”
저절로 던칸의 두 손이 내밀어졌고 칸트는 그의 손이 제대로 올려지기 전에 손을 놓아버렸다.
팔랑팔랑.
수표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잡으려고 던칸은 허공에 손을 내밀며 버둥거렸다.
칸트는 갑자기 숨을 훅, 들이마셨다.
갑자기 배가 단단해졌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웃음을 쏟아냈다.
던칸으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웃음이었다.
아이는 사라져버렸는데도 아이를 가졌을 때의 신체반응이 아직도 종종 나타났다.
에단이 팔과 다리수를 세어가면서 진한 용액이 담긴 병에 특별히 담아 주었는데도.
상상통처럼 여전히 아이의 존재감이 칸트의 내부에서 느껴지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준이 귀 기울이기만 하면 들려오던, 그의, 아이의. 고동소리가.
칸트의 배에 귀를 바짝 가져가도 마찬가지였다.
준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성녀로 추앙받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심장을 뛰게 하는 것과 몇 가지의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한 기능을 제외하고는 두뇌의 대부분이 기능을 잃었다는 판정을 받은 여자에게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그녀에게 신성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였다.
그저 그녀와 한 공간에 머물다가 돌아가는 것만으로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속출했다.
그들은 그녀가 자기들의 병을 가져갔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머무는 동안 여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뜨는 일도 없었다.
여자가 누워있는 동안 그녀의 행동보조사가 여자의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몸의 방향을 돌려주곤 했다.
칸트가 크리스의 일로 준에게 반기를 든 날 이후 –반기를 들었다는 건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준에게는 자꾸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준은 자주 이곳으로 향했다.
곧 행동보조사가 돌아갈 시간이었다.
행동보조사는 자기가 돌아간 후에 다른 행동보조사가 와서 교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교대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교대할 사람이 올 때까지 있겠다고 했다가 준으로부터 거친 언사를 들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사실 서림에게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서림의 행동보조사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알아서도 안 되었다.
행동 보조사가 떠나고 네 시가 되면 서림의 몸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네 시가 되기 전이라고 해서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에 갇혀있는 것 뿐이었다.
서림의 뇌가 기능을 하는지 보겠다고 몸의 여기저기를 찔러대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는 의사들을 서림은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
피가 끓을 듯한 절규가 가슴에서 밀려 올라왔지만 그 소리를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아프고 뜨거워서 피하고 싶은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준 맥브라이언의 암시는 서림의 영혼을 가둘 정도로 강력했다.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의사들도 서림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의심 많은 기자나 작가들이 찾아와서 다시 서림의 몸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고 싶어하는 때가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그런 사람들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교단의 성녀를 취재한다는 명목으로 잠입을 해서 준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서림은 알지 못했다.
네 시가 되면 제단 앞에 있는 커다란 시계가 그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것은 서림이 마법에서 풀리는 시간이었다.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서림은 몸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
자신의 몸 속에 구속되어 있던 영혼을 해방시키는 순간, 서림은 누구보다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
방 안에는 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서림은 준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서림을 보았을 때, 서림은 전시회장에 있었다.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의 합동 전시회였다.
준은 그때 자기가 누구 때문에 한국에 갔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치료한다는 명목이었을 것이다.
기선이었을까.
생각해 보려고 할 때마다 벽에 부딪쳤다.
아무튼 준은 한국에 있었고 무료함을 달래려고 길을 걷다가 조그만 전시회장에 흥미가 돋아서 그리로 들어갔다.
아마츄어 티를 벗지 못한 작품들 투성이었다.
욕심은 많고 열정은 넘치는데 절제가 부족한 작품들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 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준의 눈길을 잡은 것들은 모두 서림의 작품들이었다.
임서림.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준은 청록색으로 표현된 하늘을 바탕으로 쭉쭉 뻗어있는 나무와 꽃들의 그림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권투 글러브를 낀 성인 남자와 작은 남자 아이가 장난을 치며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프로다웠고 멋지게 한 번에 팔을 쭉 뻗고서 아들을 보고 있었다.
아들이 잘 따라하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의 팔은 제멋대로 위로 뻗쳐 올라가 있었다.
그러고도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하는 눈으로 자랑스럽게 아버지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저절로 웃음이 나는 그림이었다.
준이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그녀가 다가와 있었다.
“그림이 마음에 드세요?”
준은 그것이 그녀의 그림일 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림들이 전부 마음에 들어요.”
준이 말했다.
“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서림이 말했다.
“혹시 가족인가요? 이분이 부군인가요?”
준의 말에 서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군이 권투를 하세요?”
서림은 이번에도 웃었다.
“이 그림이 가장 좋은 이유가 뭔가요?”
준이 물었다.
“남편이랑 아이가 이 그림을 좋아하거든요. 이 그림은 전시만 하고 팔지는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다른 사람이 좋아해서,라는 게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나요?”
“네. 안 그럴 것 같죠? 저도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되더군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들하고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됐어요.”
“다른 그림들은 별로라고 하던가요? 팔아버리래요?”
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는 데는 돈이 필요하죠. 팔 수 있다면 팔아야겠죠.”
서림은 여유롭게 웃었다.
곤궁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풍요로운 삶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런데도 서림에게서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준은 자기가 그녀의 행복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그림을 사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모든 그림을 전부 사고 싶어요. 아. 다른 사람들이 서툴게 해 놓은 낙서까지 같이 사겠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서림은 단호했다.
“이건 절대 절대 팔지 말라고 아이가 오늘 다리에 매달려서까지 신신당부를 해서 안 되겠네요. 저한테 좋은 기회기는 하겠지만 내 그림이 유명해지거나 우리가 단기간 동안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는 이 그림 앞에서 세 가족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좋거든요.”
서림은 흔들리지 않았다.
감히 서림의 수준에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을 제시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죠.”
전시회가 끝날 즈음.
다른 시덥지않은 그림들조차 다 팔려서 주인을 찾아가는데 서림만 성과없이 그 날을 보냈다.
그런데도 서림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서림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팔지 말라는 조건으로 준이 주관자에게 돈을 건넨 결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서림이 위축될 만도 했지만 서림은 함께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진심이 담긴 축하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나타났다.
그림 속에 나란히 등장했던 두 남자가.
서림은 ‘행복’이라는 감정이 응축되어 현현하면 저런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될만한 웃음을 가득 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준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날 선 칼로 빈틈없이 그어댄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가 링에 올랐던 날.
서림은 의식을 잃었고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서림은 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작업 구상을 하다가 갑자기 커피와 빵을 먹고 싶어서 빵집을 찾아나섰다.
이미 몇 주 전에 암시에 걸려 있었음을 서림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빵을 먹고 싶어지고, 당장 빵집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서림의 의지와 욕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림은 홀린 듯이 걸음을 재촉했고 빵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준을 다시 만났다.
준은 반가워했고 서림은 놀랐다.
“신기하네요.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준은 커피를 사겠다고 했고 카페의 야외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자신이 최면을 걸 수 있다고 가볍게 말했다.
“신기하네요.”
서림이 말했다.
“보여줘요. 어떻게 하는 건지.”
서림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림은 재미있어 하면서 웃었다.
그 후로는 손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는 웃음이 사라졌다.
“이제 됐어요. 충분히 웃은 것 같네요. 이제 움직일 수 있게 해 봐요.”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요? 아이가 기다리잖아요. 불편해 보이는데 제가 바래다 드리죠.”
서림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준은 봉지를 들어 주었다.
서림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따랐다.
서림이 집에 도착했을 때, 서림은 준에게 애원했다.
“움직일 수 있게 해 줘 봐요. 이게 왜 안 움직이는 거냐고요.”
“그러게요. 왜 안 되는 걸까요? 하지만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안다면 지금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서림은 자신의 육체에 갇히고 말았다.
아이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준은 비열하게 웃으며 떠났고 서림은 울려고 했다.
그러나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서림은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을 꺼내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물을 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나중에는.
이 비극을 혼자서만 지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심장을 도려내는 표정으로 절규하던 그를.
육체에 갇힌 동안에도 그녀는 그를 생각했다.
오히려 갇힌 동안에는 그에게 더 몰두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남편은 그녀가 허공으로 팔을 내두를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당신처럼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처음 본다니까!”
육체에 갇혀있을지라도 꿈을 꿀 수는 있었다.
서림은 자신이 그렸던 그림의 일부가 되어갔다.
그곳에서는 영원히 꿈을 꿀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