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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겠어? 나일 것 같아? 아니면 키티?”
“세상에. 설마 키티가?”
“이런 병신.”
“뭐? 베니카가? 우리가 얼마나 화끈하게! 아, 세상에,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베니카가 나한테 왜?”
연우는 멍청한 소리만 계속 늘어 놓았고 선우 형은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형! 선우 형! 아니, 선우 형 형!! 방금 전에 나랑 잔 여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데 이 말을 내가 믿어야 되는 거예요?”
“지금 상황이라면 그래야겠지.”
선우 형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
“입이나 헹구고 나와.”
시영이 말했다.
연우가 들어간 사이에 시영은 베니카에게 스마트폰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거기에는 시영의 사진이 있었다.
마지막 지령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나를 죽이도록 돼 있는 거였어? 그런데 왜 연우를?”
베니카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거미줄에 팔랑거리고 날아든 연우를 그냥 놔 주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가는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연우는 나오자마자 옷을 입었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제 정액이 담긴 콘돔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씻고 나와.”
시영이 말했다.
베니카는 자기 몸이 왜 그의 말대로 움직이는지 알지 못한 채로 시영이 시키는대로 따랐다.
베니카가 욕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시영이 옷을 입는 동안 연우는 객실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두 사람의 흔적을 수거하고 지웠다.
“가자.”
시영이 말했다.
“그냥……?”
연우의 말에 시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아미가 하는 말을 두 사람 모두 들었다.
‘붉은 번개의 틈’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는 몇 번이나 다시 시도할 터였다.
연우와 시영이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그 피해가 누구한테 미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간 베니카는 언제든지 돌아와서 그들의 목에 비수를 겨눌, 아니, 그들의 팔에 주사바늘을 찌르고 염화칼륨을 흘려 넣을 것이었다.
“시영아!”
연우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시영을 뒤쫓아 갔다.
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 일은 우리가 끝내야 돼. 마음 굳게 먹고. 우리가 놓친 기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어. 그럼 그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죽게 되는 거야.”
그런데도 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 봐, 개 자식아! 누구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연우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시영은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타.”
시영이 말했다.
“시발. 타라고 안 해도 탄다, 개새끼야!!”
“충분히 멀리 떨어져야 돼.”
“뭐?”
“베니카가 떨어져서 자살을 할 때. 베니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된다고.”
“……. 멀리 있어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종하는 게?”
시영은 연우를 건조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네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해 보지는 않았잖아? 이런 일을 하기 전에 시험이라도 해 봤어야지.”
“베니카는 내 말을 들을 거야. 알 수 있어.”
“들리지도 않잖아!!”
“가청거리 밖이지. 하지만 들을 거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실패하기만 해 봐. 가만히 놔두나 보라고!!”
연우는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말하고 싶었지만 곧 화를 다스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메라를 보았던 것이다.
시영도 연우를 따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겠군. 그 방에서 나온 두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싸우고 그 방에 남겨졌던 여자는 자살을 한다면.”
“…….”
하지만 시영이 그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는 시영이 한없이 낯설어 보였다.
죽은 여자의 머리는 짓이겨져 있었다.
희영은 그런 영상을 보게 만든 연우와 시영을 원망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지는군.”
장 항이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겨냥하고 동시에 여러 사람이 지령을 받은 모양이야.”
그의 말에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영씨, 이런 말 하면 욕할지도 모르지만 저걸 끄는 방법은 없을까? 끈다는 말은 그런가? 환영을 사라지게 할 수 없어?”
선우 형이 말했다.
“나야말로 그 방법을 찾고 싶어요.”
희영이 하소연을 했다.
베니카의 시체는 아름답지 못했다.
떨어져서 죽는 방법은 결코 이타적인 자살방법은 아니었다.
시신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똥을 한 삽 퍼서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떨어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삼, 사일분의 악몽은 확보를 한 셈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베니카의 팔은 부러진 채로 뒤로 꺾여 있었다.
붉은 피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적시다가 점점 커지는 아우라처럼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히나타는 윽 윽 거리더니 화장실을 찾아 뛰었다.
기선이 희영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희영은 지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기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기선이 먼저 다가와 주어서 희영은 마음을 놓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는 건 안 돼.”
기선이 마치 희영의 말을 읽은 것처럼 말하자 희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
“너를 위해서 떠나줘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은 늘 같아. 네가 견뎌줘. 나를 살려줘.”
기선이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희영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거야 원!”
아미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다.
선우 형이 그 뒤를 이었다.
장 항은 그저 허허거렸다.
죽이려는 사람, 달아나는 사람, 죽는 사람.
그 해답 없는 순환에도 불구하고 사랑에는 결실이 맺힌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둔감한 칸트조차도 서서히 제 몸의 변화를 인식할 즈음, 칸트는 자주 크리스의 방에 들렀다.
연구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크리스가 거의 쉬지도 않고 에단, 에단 하고 떠들어대서였다.
에단은 크리스에게 볼 일이 끝나고도 칸트가 가려고 하지 않는 걸 보고 자기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에단. 저기, 나 좀 잠깐 볼 수 있을까?”
칸트가 조용히 말했다.
에단은 칸트와 둘이 있게 되자 약으로 인한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고 그 부분의 기억은 완벽하게 사라진 것 같다는 보고를 늘어 놓았다.
“그래. 그렇군. 잘 됐네. 다행이야.”
“네. 그렇죠.”
그러고도 칸트는 쉽게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제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나요?”
에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게…….”
“…….”
“내가 말이야.”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편한 얘기가 아니니까 이러고 있겠지.”
“…….”
“아, 그래. 말할게. 절대 편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임신한 것 같아.”
“아, 네…….”
“준의 아이겠지.”
“네.”
“그런데 알다시피.”
“…….”
“지금은 상황이 별로 안 좋아.”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실험체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있어. 그러기는커녕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어가고 있지.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한국의 실험체들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우리한테 위협이 돼서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누가 ‘붉은 번개의 틈’에 도전을 할 수 있겠어요? 누가 준에게, 준과 칸트에게 도전할 수 있단 말이죠?”
“나도 그냥 혁명가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고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고 선동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게 현실이 될 수도 있어.”
“칸트…….”
“그래서 부탁을 하려고 해.”
“뭐든 부탁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가 뭘 할 수 있죠?”
“아이를 지워줘.”
“네?”
“준의 옆에는 내가 있어야 돼. 쓸모있는 채로 말이야.”
“당연히 칸트는 쓸모가 있죠.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런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야.”
“아뇨. 저는 못 들은 걸로 할 겁니다.”
“네가 아니더라도 부탁할 사람은 많아. 하지만 나는 네가 해 줬으면 한다.”
“왜요. 이유가 뭔데요!”
“쓰레기를 긁어내듯 무심하게 수술을 하고 팔 다리가 전부 맞게 나왔는지 확인하고 버릴 사람 말고 내 아이가 왜 죽게 되는지, 왜 희생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죽여주기를 원하는 거야. 그 애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희생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동정해 줄 사람이 필요해.”
“아뇨. 그 일에 동조도, 동정도 안 할 겁니다.”
“그 사람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어.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차라리 그 약속을 한 순간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면 애써보겠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건방지게 굴지마. 네가 불복종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 일을 맡아줘.”
“싫다고 하면요?”
“크리스를 죽이겠다고 말하면 먹히겠어?”
“칸트는 그렇게 못해요.”
“그래. 나는 그렇게 못해. 제발 나를 위해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줘.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이런 식으로 말해본 적 없어. 하지만 너한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이 아이가 왜 죽는지 한 사람 정도는 이해해주길 원하니까.”
“…….”
“부탁한다.”
“보관하고 싶은 거죠?”
“…….”
“결심이 서면 알려주세요.”
“그래. 곁에 두고 싶어.”
“준은 알아요?”
“그는 모를 거야. 준에게는 알게 하고 싶지 않아.”
“준은 칸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도 모르고 오해할 수 있어요.”
“에단. 나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준을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아. 준을 지키는 건 나를 지키고 싶은 본능과 같아. 다른 설명은 못하겠다.”
“……. 칸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좋아. 그렇다면. 내일로 미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에단은 잠시 칸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
던칸이 칸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계시지 않는군요.”
던칸의 말에 칸트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 듣고 있어요. ‘돈 좀 주세요.’라는 말이 비굴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온갖 치장을 다 하는 중이잖아요. 나름대로 협박도 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고. ‘붉은 번개의 틈’을 수사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면 던칸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던칸. 예비선거에서 던칸을 반대하려는 사람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우리한테 꼭 나쁜 일이기만 한 건지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군요. 내가 말하는 ‘우리’라는 말에 던컨은 빠져 있어요.”
“칸트. 그렇게 나올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굳건한 동맹을 지켜왔잖습니까. 누구도 나처럼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 실수를 하시다니. ‘누구도’라는 말은, ‘절대’라는 말만큼이나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죠.”
“칸트. 부탁할게요. 계속 지원해 줄 거잖아요. 그렇죠?”
“그 말이 잘 안 들리네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 높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군요.”
던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윽고 칸트가 일어섰다.
하지만 던칸은 빈손으로 남겨질 수가 없었다.
그가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