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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형은 먼저 신사로 돌아갔고 연우와 시영은 해변가를 조금 걷기로 했다.
“이러다가 곰팡이 필 것 같아요, 형.”
연우가 말했다.
선우 형은 그 말에 깔깔거리면서 조심해서 돌아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 먼저 돌아갔다.
“우와, 씨발. 고시생일 때보다 더한 금욕생활이잖아.”
연우가 말했다.
“하, 이 새끼. 면도라도 좀 하고 나오지. 간만에 밖에 나오는데. 너랑 같이 다니는 사람 생각도 좀 해 줘야지.”
시영이 연우의 수염을 가지고 타박을 했다.
간만의 외출에 두 사람 모두 들뜬 모습이 역력했다.
“지랄을 하시네. 야, 이 새끼야. 이 정도 까칠까칠한 걸로 문질러 주면 여자들 눈 다 뒤집어져.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다고.”
"아프니까 그러는 거지!"
"좋아서 그러는 거야. 뭘 알지도 못하는 자식이!!"
연우가 지지 않고 말하자 시영이 헛웃음을 쳤다.
“어, 이 새끼 봐라? 안 믿는 눈치네? 너, 여자들 눈 뒤집히는 거 본 일 자체가 없지?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랑 해 보긴 해 본 거야? 너 아직 동정이지?”
연우가 말했다.
“미친 새끼가 지랄을 해요.”
시영이 발끈했다.
그래놓고 시영은 연우가 키득거리는 것을 봐버렸다.
젠장.
이 새끼 앞에서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냥 차라리 침묵을 지킬 걸.
연우는 아예 배꼽을 줍겠다고 오버를 해가면서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이 새끼 악질이네. 이런 데서 웃겨버리면 어떻게 해? 이 정도로 웃기려면 실내에서 웃겨. 그래야 배꼽이 빠져도 쉽게 찾지. 아놔. 어떻게 해. 배꼽이 모래 속에 파묻혔나 봐.”
“웃기는 새끼네. 야, 너! 그 말이 꼭 거짓말이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 네 시스템에서 탈동정의 기준이 뭔데?”
“사정은 해야지, 이 새끼 봐라.”
“삽입은 해 봤어, 시발넘아.”
“에에에이, 사정까진 가 줬어야 탈동정이지.”
한참 그렇게 건전한 내용의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주고받고 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쌩하니 지나갔다.
가히 표범 같은 속도로.
'조그만한 것이.'
'빠르기도 하네.'
두 사람은 각각 그렇게 생각했다.
연우는 전력으로 뛰지 않아도 곧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의욕이 붙었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애간장을 태웠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시영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시영도 알았다.
연우가 얼마나 단순한 녀석인지.
그 녀석은 신림동 고시촌에 있을 때 고시촌에서 나가는 5515A 버스를 타려고 하다가 서울대 입구역까지 뛰어서 간 적이 있었다.
놓쳤으면 포기를 할 일이지.
다음 정류장에서는 꼭 타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한 구간, 한 구간을 전력으로 달렸다.
버스기사도 은근히 재미가 붙었는지 연우가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도록 살살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고보니 시영이 연우를 처음 본 것이 그때였던 것 같았다.
시영은 버스 뒷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5515A?’
시영은 이상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신문을 가져다 주던 5515K라는 버스 번호는 우연히 만들어진 걸까?
그 숫자에 의미가 있는 걸까?
5515에?
아니면 K에?
준 맥브라이언이라는 이름과 [붉은 번개의 틈]이라는 이름의 스펠링을 모두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연관성은 없었다.
‘개새끼, 멍청하게 생긴 게 근성 하나는 쩌네!’
연우를 보고 처음 느꼈던 생각이었다.
절대로 멍청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영은 서울대 입구역에서 내리면서 거기까지 헥헥거리며 달려온 연우를 보며 그 생각을 했었다.
연우는, 이 멍청한 연우는, 마침내 버스를 잡았다는 생각에 벅찬 감격을 느끼며 버스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연우를 붙잡은 게 시영이었다.
“여기가 서울대 입구역인데요?”
“에에에?”
종착역은 아니었지만 버스에 탄 사람의 80~90퍼센트는 거기에서 내렸기에 해 본 말이었는데 연우는 그야말로 분기탱천해서 기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연우가 소리지를 이유는 없었다.
정류장에서 안 선 것도 아니었고 매번 연우가 아주 조금씩 늦었던 것 뿐이었는데.
시영은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라서 한껏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또 서울대 입구역까지 가겠다.”
시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연우에게는 이미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시영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때,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서려 있고 얼굴을 이루는 모든 선이 날렵하고 갸름했다.
시영은 여자의 동그란 코 끝에 매료되었다.
‘귀여워!’
시영은 소리치고 싶었다.
“고양이를 잃어버렸어요?”
시영이 어설프게 일본어로 말하자 여자가 웃었다.
“일본어가 편하지 않으시면 영어로 하셔도 돼요.”
시영은 고맙다는 말부터 곧바로 영어로 했다.
“친구분이 굉장히 의욕적이시네요. 저렇게까지 안 하셔도 키티는 돌아올 텐데.”
“키티인가요?”
시영이 웃었다.
“이름을 짓기가 귀찮아서.”
“아, 그래요?”
시영은 다시 웃었다.
그 말 때문에 여자에게 더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영은 훗날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이기가 귀찮았다는 말이 시영에게는 뭔가 거리끼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충 스킵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었다가 나중에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페이지처럼 여겨졌다고 해야 할까.
“키티는 자주 돌아오나 보죠?”
“네.”
여자가 웃었다.
“그 전에는 자주 떠난다는 게 전제가 되겠네요.”
“네. 그렇죠.”
여자가 웃었다.
그 말이 여자의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는 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베니카에요.”
"베로니카요?"
"베니카. 붉은 여름이라는 뜻이죠."
“붉은 여름?”
시영이 묻자 베니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본명이었을까 하는 것도 훗날에 시영이 가끔 떠올리는 궁금증 중 하나가 되었다.
시영은 자신의 이름과, 키티를 쫓아가고 있는 바보의 이름까지 함께 알려주었다.
“강아지는 수백 킬로를 떨어져도 언젠가 주인을 찾아내겠다는 마음이 있지만 고양이는 다르데요. 고양이는 언젠가는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데요.”
베니카가 말했다.
“하지만 키티는 다르다는 거군요.”
시영은, 키티가 방향을 틀어서 이쪽으로 다시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연우는 기진맥진했지만 특유의 근성으로 속도를 더 내고 있었다.
시영은 그 녀석의 목표가 지금쯤은 키티에서 베니카로 바뀐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관광객인가봐요? 여기에서 관광객을 보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인데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어요? 이 곳에 아는 분이 계세요?”
“아, 저희는.”
시영은 히나타의 신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멋대로 말을 했다가 일행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난데없이 들어서였다.
“계획없이 즉흥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편이라서요. 오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아.”
“베니카는요? 베니카도 여행중인가요?”
“네. 하던 일을 잠깐 쉬고 있어요.”
“그렇군요.”
“저는 십 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서 머물고 있어요.”
“네.”
“혹시 원하신다면.”
“네?”
“여행은 일탈을 감행할 용기를 내게 해주곤 하죠.”
“……네?”
자꾸 반문만 하는 자기가 우습게 보이기는 했지만 베니카가 하려는 말이 뭔지 시영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같이 가고 싶다면 같이 가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침대에요?”
어쩌다가 그렇게 말이 나와 버렸을까.
시영은 제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성냥개비 머리만큼이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제 말은, 호텔을 말한 거였어요. 베니카.”
“네, 알아요. 그렇겠죠. 호텔이랑 베드라는 말은 꽤 비슷하잖아요. 발음이나……, 철자나…….”
발음도, 철자도, 하나도 안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지금 있는 숙소가 불편해서 주변에 괜찮은 곳이 있으면 바꿔볼까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시영은 재빨리 말했다.
이제야 제대로 격식을 갖춘 대화로 궤도를 탄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되었다.
키티는 베니카의 품에 뛰어들었고 베니카는 키티를 안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연우는 키티를 따라서 예정에 없던 운동만 하다가 에로틱한 거친 숨을 뱉어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우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베니카가 연우에게 말했다.
“친구분은 허락하셨는데 같이 가시죠?”
“네?”
“에에?”
시영과 연우는 동시에 물었다.
연우는 당연히, ‘뭘요?’ 라는 표정이었고 시영은, ‘미쳤어요? 같이요?’라는 표정이었다.
연우는 이번에는 시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무슨 말인데?”
그러면서도 숨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다.
“여행객인데 가까운 호텔에 묵고 있데. 나 지금 거기에 초대 받았어.”
“어? 정말? 그럼 거기에 방금 나도 초대받은 거야?”
“그런 것 같아.”
연우가 베니카를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하는 말 맞아요?”
베니카는 웃었다.
“저, 그렇다면. 신분증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나이만 확인할게요. 나이만. 미성년자랑 엮이면 인생이 좆되는 건 시간 문제라.”
시영은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영어로 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사실 연우는 그 문장에 관해서라면 적어도 8개국어로는 말할 수가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어려보이는 쌔끈한 외국 여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일반 상식이라고 연우는 생각했다.
베니카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요.”
“아, 뭐! 꼭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성숙해 보이거든요. 아하하하.”
연우는 과도하게 웃으면서 베니카의 키티를 쓰다듬어 주었다.
키티를 쓰다듬으려고 한 건지, 손가락 끝에 살짝살짝 닿는 베니카의 가슴을 느끼려고 한 건지는 모르지만 연우는 이제 베니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키티는 베니카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침대로 달려 올라갔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곳을 자기 영역으로 주장할 수 있다.
짐승에게는 특히 그런 본능이 더 발달한 것 같았다.
“선점했어? 키티? 그래도 여긴 네 자리가 아닌데?”
연우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말하면서 키티를 팔로 밀어냈다.
키티는 캬옹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튀어 내려갔다.
아주 소중한 부위에 곰팡이가 슬 뻔한 남자에게는 아무 때나 애교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키티도 깨달았을 것이다.
일단 뒤로 문이 닫힌 후에, 시영은 전에 없이 과감해졌다.
베니카에게 다가가서 베니카의 어깨를 얹는 것으로 시영은 키티가 침대를 선점하려 시도하듯 베니카를 선점하려고 시도했다.
베니카는 웃으면서 슬쩍 물러나더니 냉장고에서 술을 꺼냈다.
“한 잔씩 하는 거. 괜찮죠?”
“과하게만 아니라면 괜찮죠.”
연우가 말했다.
침대에 누운 채 팔꿈치에 의지해 상체만 일으킨 요염한 포즈를 하고.
시영은 벽에 기댄 채 베니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몸의 곡선은.
그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