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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을 먼저 끝내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준은 카즈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알던 사람을 잃게 됐다는 충격과는 그 종류가 달랐다.
이렇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칸트와도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자 준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 칸트가 준에게 맞선 이후로 칸트를 보는 것이 점점 쉽지가 않게 되었다.
준을 비난하듯이 노려보던 그 눈빛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한 번 일어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될 수가 없었다.
망각의 알약을 먹어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결국 그러지는 않았다.
준은 칸트를 거치지 않고 몇 몇 사람들을 직접 움직였다.
일본의 실험체들은 준의 목소리를 알지 못했고 작전 수행 중에 죽어버린 녀석의 번호를 뜨게 해서 연락을 취하자 단순히 그 녀석인 줄 알고 묵묵히 반응을 나타내기만 했다.
준은 이제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다가는 실패에 익숙해지고 말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패에 익숙해지다보면 결국 패배감에 젖어들게 마련이고 패배감에 젖어든 후에는 다시 의지를 가지고 일어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준은 실험체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추렸다.
그는 일본에 있는 붉은 털 원숭이들을 떠올렸다.
지명을 먼저 해치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실망하지 말자고 그는 다짐했다.
우선은 연패를 끊는 것이 중요했다.
1점차이의 승부를 낸다고 하더라도, 심판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승기를 잡아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한 번 성공을 거둔 후에 지명에 의해서 게임이 리셋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위안은 삼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카즈마처럼 속수무책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카즈마의 죽음은 그때까지도 ‘붉은 번개의 틈’에게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모든 흔적을 다 지우고 그렇게 철저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루토.
하루토.
준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그가 잘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죽게 하는 데는 대단한 기술보다 한 순간의 방심을 노리는 것이 유효할 수도 있었다.
준은 이 순간 하루토를 열렬히 응원하는 것밖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희영은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언제 갑자기 견디기 힘든 잔인한 영상이 눈 앞에 펼쳐질지 알지 못해서 극도로 불안에 떨었다.
기선은 자상한 남자였다.
인내심도 있는 편이었다.
그런 사람을 다시 찾기가 힘들 정도로.
하지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한으로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참을 수 있다는 정도?
긴 병수발에 효자 없다고.
그 말은 기선과 희영에게도 통했다.
게다가 기선은 남이 가진 능력을 강화하는 재주를 가졌고 그것은 희영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기선과 희영은,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루는 것이 최후의 결별 통첩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선에게는 아미와 지명이라는 충실한 벗이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전해들은 말을 가감없이 전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기선은 두 사람을 통해서 희영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명이 빼 먹은 말이 있으면 아미가 덧붙였고 아미가 잊어버리고 미처 설명하지 못한 표정 묘사가 있다면 그건 지명이 채워 넣었다.
그 결과 기선은, 희영의 면전에서 통첩을 받은 것 이상의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형은 누나의 능력을 강화시키잖아요. 누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누나한테 서운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돼요.”
지명은 그렇게 말하면서 기선의 감정까지 통제하려 들었다.
기선은 희영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희영이가 원하는 건 어떤 거야?”
기선이 지명에게 물었다.
“당분간은 떨어져 있자는 거예요.”
“…….”
“누나는 걱정하지 마세요. 히나타가 같이 있어주기로 했어요. 히나타와 같이 지내면 누나도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요?”
지명이 말했다.
아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신중하게 들었다.
지명이 기선에게 하는 말들이 그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지명이 기선의 감정을 같이 느끼고 상한 감정을 치료하고 싶어하면서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미는 부지런히 학습하려는 학생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랬다가…….”
기선은 지명을 바라보았을 뿐 스스로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멀리 가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형이 원하기만 하면 장 항 형이 같이 가 주겠다고 했어요.”
“이미 그런 말까지 다 했다는 거야?”
기선이 말했다.
질책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명은 알고 있었다.
아미에게는 그런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매개체로 삼아야했고 부지런히 지명의 표정을 살피면서 너무 늦지 않게 같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애썼다.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요?”
지명이 묻자 기선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어딘데요?”
아미가 재촉했다.
“왜? 너희들도 가려는 건 아니지?”
“왜요?”
“너희들은 여기에 있어줘. 히나타만으로 안 될 때 희영일 지켜줘.”
기선은 어쩔 수 없이 희영을 걱정했다.
지명이 웃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절대로 헤어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 희영도 기선이 없는 채로 두어 시간을 지내고 나면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서성거리게 될 거라고 지명은 생각했다.
장 항은 기선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은근하게 그를 챙겼다.
그동안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던, 사별한 아내에 대한 얘기까지 꺼낼 정도였다.
그림을 그렸다는 장 항의 아내는 작품으로만 세상을 살고 행복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다소 난해한 말을 했는데 기선은 장 항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케이블카를 타면서 기선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장 항과 둘이서만 여유있게 케이블 카 하나를 독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라서 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에 한 남자가 뛰어왔다.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인상을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선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 장 항은 그렇지 않았다.
장 항은 그를 힐끗 바라보고 내내, 계속해서, 아주 꾸준하고 일관되게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선이 장 항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하루토는 맞은 편에 앉아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본에는 처음이신가요?”
하루토가 말했다.
장 항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고 기선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토는 그가 사진 속의 그 남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테오가, 그 불쌍한 테오가, 그 부드럽고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을 제물로 바쳐서 뛰어다닌 끝에 얻어낸 정보였다.
기선이 여기에 오리라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테오의 귀에 들어갔다.
하마터면 하루토는 그 기회를 잡지 못할 뻔 했다.
장 항은 눈 앞의 남자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데 모든 것을 걸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하다 말았던 얘기를 스스럼없이 기선에게 하기 시작했다.
기선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형, 벌써 꽃이 펴요.’ 라는 말로 장 항의 말을 끊기도 했다.
장 항은, ‘정말? 벌써? 벌써 봄인가?’ 라고 했다가 다시 끊어진 말을 이었고 몇 번 기선에게 또 꼬리를 잘렸다.
결국에는 장 항도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경관을 즐겼다.
하루토도 일어섰다.
그는 그저, 같이 구경을 하려고 일어서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사방이 다 뚫려 있는데 기선 쪽으로 오는 것은 이상했다.
기선은 심상치않은 기운을 느끼기는 했지만 자기가 과민한 거라고 생각했다.
장 항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하루토에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기선은 하루토에게 쏠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은 경이롭지 않습니까?”
하루토가 말했다.
“조용히 구경하고 싶군요. 저희 두 사람 모두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라서요.”
기선이 말했다.
“그래요? 두루두루 사귀어 두면 좋을 텐데요. 혹시 압니까? 뜻밖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
하루토는 빙긋 웃으면서 기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쭉 손 안에 쥐고 있던 자신의 분신 같은 테이저 건을 꺼내려고 했다.
기선은 급히 물러서면서 장 항을 불렀다.
하지만 장 항은 의뭉스런 표정을 지은채 꽃구경만 했다.
“형!”
기선은 화가 났다.
그리고 장 항을 붙잡으려 했다.
화가 장 항에게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토는 제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순탄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는데.
자신의 자랑스런 걸작품에는 손을 가져다 대지도 못하고 손을 뺐다.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급히 바닥을 짚느라고 그랬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하루토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으로 가슴을 쥐고 잡아 뜯는 것 뿐이었다.
기선이 장 항을 바라보았다.
“형……!”
“꽃이 붉다. 저런 색깔을 가진 물감은 없는데 그 사람은 잘도 저런 색을 만들어 냈어. 그렇게 그린 꽃은 살아있는 꽃보다 더 예뻤지.”
“형.”
그 꽃이 하루토의 얼굴보다 붉을까.
하루토는 점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헐떡였다.
평생 그런 고통은 처음 겪어 보았다.
케이블 카가 곧 멈출 터였다.
하루토는 그 덕에 잠시라도 연명을 할 수가 있었다.
하루토는 분에 못 이기겠다는 듯이 핏줄이 터진 눈으로 기선을 노려 보았다.
“아니, 왜 날!”
기선은 제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조용히 하고 내려.”
장 항이 기선을 잡아 끌었다.
하루토도 밖에 있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케이블 카에서 내렸다.
“어쩔 거예요? 그냥 보내도 될까요?”
기선이 장 항에게 물었다.
“누가 누구를 그냥 보내는데?”
장 항의 말을 기선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사람이, 죽었어요!!”
기선은 놀란 눈으로 장항을 바라보았지만 장 항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형!"
기선이 큰 소리로 장 항을 불렀다.
장 항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냐는 듯이 기선을 바라보았다.
기선은 하루토가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사람들이 첩첩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하루토를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기선에게는 분명한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