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41화 (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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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을 거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는 크리스의 옆에 앉아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한참만에 크리스가 물었다.

“오늘 여기에서 잘 거예요?”

“그럴까?”

“어디에서요?”

“소파가 있잖아.”

“정말 그래도 돼요?”

“응, 그래도 돼.”

“가야 되는 것 아니에요? 준한테.”

크리스가 말했다.

모두가 준을, 교주인 준을 그냥 허물없이 준이라고 불렀다.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크리스도 준을 그냥 준이라고 불렀다.

칸트는 준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그냥 준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은 교주나 대단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함부로 부르던 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순간 혹독한 고통을 느끼게 하려고 하는 거라는 얘기를.

“내가 왜?”

칸트가 웃음을 지으면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준의 아내잖아요.”

크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알고 있니?”

“네. 아니에요?”

“그건 잘 모르겠다. 나도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칸트가 웃었다.

크리스는 칸트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크리스는 아버지가 어떻게 됐느냐고 끝내 묻지 않았다.

대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럴 거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크리스.”

“네?”

“기억을 잊고 싶니?”

“어떻게요?”

“나는 마법을 조금 부릴 줄 아는데.”

크리스가 의심스런 눈으로 칸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이번에는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이라니까?”

칸트가 끝까지 우겼다.

“어떤 마법요?”

“어떤 마법을 좋아하니?”

“마법사의 모자도 갖고 있어요?”

“어떤 거? 토끼를 사라지게 하고 다시 토끼를 나오게 하는 거? 아니면 비둘기 똥이 가득한 거?”

“정말 비둘기가 그 안에 똥을 싸요?”

“다른 마법이 잘 안 되는 날은 그렇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자기 순서를 놓치게 될까봐 비둘기들도 긴장을 하거든. 참지 못하고 후다닥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갔는데 화장실에 줄이 길어봐. 어떻게 되겠어?”

“마법사가 화가 나겠죠.”

“그리고 그 비둘기는 짤리게 되는 거야.”

“그럼 차가운 거리로 나앉게 되는 거죠.”

“차가운 거리?”

칸트가 웃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희한하게 들렸다.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니?”

“네.”

“어쩌다가?”

“아빠는 선택해야 했거든요.”

“뭘?”

“정말 많은 것들요. 처음에는 엄마와 ‘붉은 번개의 틈’중에 선택해야 했고 그 다음엔 회사와 ‘붉은 번개의 틈’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건강과 ‘붉은 번개의 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아빠는 간암선고를 받았는데 ‘붉은 번개의 틈’은 수술을 할 수 없게 했잖아요. 아빠가 선택 받은 거라고. 다음에 붉은 번개가 치고 하늘의 틈이 열리면 그땐 아빠와 내가 올라가게 될 거라고. 아빠는 그때도 ‘붉은 번개의 틈’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크리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칸트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빠의 선택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칸트의 말에 크리스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괜한 얘길 물었다. 네가 하던 얘기를 마저 해 줄래?”

“하지만 아빠는 나와 ‘붉은 번개의 틈’ 중에 선택을 해야 하게 됐을 때는 나를 버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게 좋았어?”

“좋았어요.”

“아빠한테 고마웠어?”

“네.”

“아빠를 사랑했구나.”

“네.”

“아빠도 널 사랑했어. 알지?”

“네.”

“그건 절대로 의심하지 마.”

“네.”

“아빠는 너를 사랑하는 방식을 그런 식으로 보여 준 거야. 너는 아빠를 사랑하는 방식을 다른 식으로 보여줘야 돼. 열심히 살고 행복해지는 거. 그게 아빠를 사랑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긴? ‘붉은 번개의 틈’에서 칸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건 너도 알지?”

크리스가 칸트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칸트의 친구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지.”

크리스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다.

“제가 칸트의 친구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제대로 본 게 맞군. 처음에 봤을 때 영리한 애일 거라는 걸 알았지.”

크리스가 웃으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칸트도 주먹을 쥔 채 크리스의 주먹에 댔다.

앞니가 와장창 빠져 있었다.

“빵은 어떻게 씹니? 고기는?”

칸트가 웃으면서 물었다.

“아직 다른 이들이 남아있으니까요. 그쪽으로 몰아주면 돼요.”

칸트는 그 방에 늦게까지 남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오랫동안 같이 나누었다.

나중에는 크리스가 칸트를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준에게 가 봐야 되는 것 아니에요? 준이 화를 내지 않을까요?”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아무도 칸트를 못 건든다고요.”

“그 다음엔?”

“아무도 칸트의 친구를 못 건든다고요.”

“그래, 맞아. 그것만 기억하면 돼.”

“네.”

“우리는 친구라는 것도 기억해야 되겠네. 그렇게 세 가지만 기억하면 돼. 알았지?”

“네.”

“혼자 못 잘 것 같으면 나랑 같이 잘까?”

“아뇨. 혼자 잘 수 있어요.”

“그래? 용감하네.”

“대신 소파에서 자 줄 거죠?”

“그래. 그럴게. 방에 혼자 남겨두지 않을게.”

칸트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휴, 힘들어 죽겠다.”

크리스가 칸트를 바라보았다.

칸트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소파로 올라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서야 크리스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몇 분이 되지 않아 비명을 질렀고 칸트는 크리스의 옆으로 소파를 끌고 왔다.

“크리스. 강해지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잊지 말라고는 해야겠다. 내가 누구라고 했지?”

“칸트요.”

“칸트는?”

“칸트는 누구도 못 건드려요.”

“칸트의 친구는?”

“칸트의 친구도 아무도 못 건드려요.”

“그리고 칸트와 크리스는?”

“칸트와 크리스는 친구.”

“그래. 친구. 알았지?”

“네.”

“눈을 감아봐. 크리스. 내가 마법사라고 말했지?”

“네.”

“이제 토끼를 꺼내줄게. 대신 내가 다시 눈 뜨라고 할 때까지는 눈을 떠선 안 돼. 알았지?”

“네.”

“이건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야. 꼭 약속을 지켜야 된다. 알았지?”

“네.”

크리스가 눈을 감았다.

의심스런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컵에 물을 한 가득 따라왔다.

그리고 크리스를 한 번 바라보더니 거기에 하늘색 알약 하나를 떨어뜨렸다.

약은 곧 수많은 기포를 내면서 녹아들었다.

“눈 떠봐. 크리스.”

크리스는 잔뜩 기대를 하고 눈을 떴다.

“토끼는요?”

크리스는 두리번거렸다.

“이 아저씨가 마침 화장실에 간 모양이야. 모른 척 하고 조금만 기다려주자. 알았지?”

“네.”

크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리는 동안 이것 좀 마시고 있어.”

“전 괜찮은데요.”

“편히 잘 수 있게 도와줄 거야.”

크리스는 칸트가 내민 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파란 색을 물을 마시고 크리스는 토끼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칸트는 크리스가 잠든 사이에 알약을 녹인 물이 그에게 망각의 축복을 가져다 주기를 바랐다.

크리스의 두뇌가 잔인한 기억을 저장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해방을 얻기를 원했다.

아버지를 잃은 기억은 다른 기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억이기에 그 기억은 크리스의 뇌에 서명같은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해. 크리스. 붉은 번개가 친 날, 벌어진 하늘의 틈으로 아빠가 올라간 거라고 생각해. 아빠가 좋은 곳으로 먼저 올라갔다고 그렇게 생각해. 크리스.”

칸트는 하염없이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칸트는 제 몸을 흔드는 손길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눈 앞에는 순진한 표정의 크리스가 서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 일어났구나. 왜 벌써 일어났어?”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문이 잘 안 열려요.”

“아참, 그렇지. 문이 빡빡하더라. 내가 열어줄게. 가자. 문을 닫아놓지 말아야겠어.”

크리스가 웃었다.

“그럼 크리스가 쉬를 할 때 쫄쫄쫄 소리가 들리겠지?”

칸트의 말에 크리스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 어제 마술을 부려 주기로 했는데 기억나니?”

칸트가 슬쩍 물었다.

“네.”

“그래?”

약효가 없는 것인가 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칸트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아무도 칸트를 못 건든다.”

“그리고 우린?”

“크리스와 칸트는 친구.”

칸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크리스는 걱정 없는 표정으로 소변을 보러 들어갔다.

그 안에서 큰 소리로 크리스가 말했다.

“그런데 칸트. 아빠는 왜 혼자만 올라간 거죠? 먼저 올라가도 나중에 내가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거죠?”

칸트는 벌떡 일어났다.

“칸트, 제 말 들려요?”

쪼로로 떨어지는 오줌 방울 소리 사이로 크리스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당연하지. 당연히 만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한 번 더 확인해 본 것 뿐이에요.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에요.”

이 빠진 사이로 앞이 텅 빈 크리스의 웃음이 눈 앞에 선했다.

칸트는 용감하게 나오는 크리스를 끌어 안아 주었다.

아미는 희영의 옆에서 희영이 보여주는 환시를 보고 있었다.

아미도 보는 게 좋겠다는 기선의 말에 희영은 머뭇거렸지만 결국에는 기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미는 크리스를 안은 채 위로해주고 크리스와 놀아주는 칸트를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바라보았다.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거예요.”

아미가 말했다.

아미는 손을 뻗어서 칸트의 손을 만져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연락하는 건 안 되겠죠?”

아미가 물었다.

하지만 그도 허락을 구하려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하는 소리여서 더 기운이 빠졌다.

“칸트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희영이 말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미는 고개를 저었다.

“칸트는 원래 아이들한테는 약해요. 그렇지만 칸트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내 편에 선 악한이죠. 칸트와 같은 편이 되려면 나도 악한이 돼야 해요.”

“…….”

“칸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게 되고 칸트를 거스르기는 어려워요. 칸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면 칸트가 정의롭다고 믿고 싶어지죠. 어느 순간 보면 저절로 믿게 돼요. 하지만 준은. 준은 모든 면에서 칸트를 뛰어넘어요. 준에 대한 두려움이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 같아요. 의심을 품고 감히 준에게 도전할 용기가 없으니까 믿기로, 포기하고 믿기로 하는 거예요.”

아미가 말했다.

“칸트를 보고 싶은 거지?”

“당연하죠. 칸트는 나한테 세상이에요.”

“…….”

“그런데 나한테, 더 좋은 세상이 생긴 것 같아서 요즘 칸트에게 죄책감을 느끼곤 해요.”

아미의 말에 희영과 기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칸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이곳에 있는 게 좋아요.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아요.”

아미의 표정을 보면 그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연우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말이 언제까지 나오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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