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39화 (3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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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건이 퓨쳐 컨트롤의 포트폴리오에 있는 주식과 채권, 외화에 어떤 타격을 입히게 될지를 정리해놨어요. 국제중세도 불안하잖아요. 불안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 갑자기 전쟁이 발발할 경우나 독재자가 사망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상정해 놨어요. 우선은 시장중립형으로 있다가 탕! 소리가 나면 재빨리 방향을 틀도록 해요, 아버지. 뭘 사야 될지, 뭘 팔아야 될지도 정리했어요.”

과연 지명다운 일이었다.

“도쿄 대지진이라고?”

선 사장은 지명의 목록에 있는 것 중 가장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끼리 충돌을 해도 우리는 돈을 벌어야 되는 거구나.”

선 사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을 벌어야 아버지가 추구하는 일도 할 수 있어요. 돈을 버세요, 아버지. 벌 수 있을 만큼 많이 버세요. 우리를 도우셔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돈을 갖고 계시는 게 우리를 구해내는데 도움이 될 때가 올 수도 있거든요.”

"우리라니? 구해내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응? 민혁이를 죽게 한 남자가 혹시 너희도 노리는 거야?"

선 사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에 투자를 하는 거잖아요."

선 사장은 지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는 지명은 겁에 질린 것 같았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선 사장의 마음에 걸렸다.

소명은 선 사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좋은 게 생각난 것 같은 얼굴이네요?”

사실 선 사장의 표정은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었지만 소명은 엉뚱한 말을 했다.

선 사장은 소명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고 바라보다가 실소를 머금었다.

풀리지 않을 복잡한 생각은 벗어두고 좋은 생각이나 하라는 뜻인 듯했다.

“새 집을 구경하러 가고 싶진 않아요?”

선 사장은 마침 생각이 나서 소명에게 말했다.

“사실 별로 관심은 없는데요.”

소명이 말했다.

선 사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딱 그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좋아해요? 커피 마시러 갈래요? 프랑스 요리를 잘 하는 데를 아는데 배고프지 않아요? 클래식 좋아해요? 어떤 질문을 하든 소명의 답은 한결같았다.

선 사장은 소명이 관심가지는 게 도대체 뭘지 궁금했다.

선 사장이 실망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소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고 관심 가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죠. 가시죠. 제가 에스코트 해 드릴게요.”

소명의 말에 선 사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명씨한테 에스코트를 받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겠네요.”

그렇게 억지로 가기는 했지만 일단 새로 지어진 건물에 들어갔을 때 소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로 짓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것 같아서 리모델링을 했어요. 특히 전파차단에 신경을 써서 그 부분은 특수재질로 마감을 했고.”

천장은 높았고 원래 어떤 용도로 쓰이던 곳이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렇다고 휑하기만 한 것도 아니어서 쾌적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이렇게 넓은데 이렇게 아늑하게 보이네요.”

선 사장은 기회를 기다리다가 초콜릿을 내민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소명은 두리번거리고 구경을 하고 다니다가 그런 선 사장을 발견했다.

이럴 때 남자들은 고백을 한다라는 것이 소명에게는 학습이 되어 있었다.

“선 사장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거 알아요. 그래서 제가 선 사장님한테 상처주는 역할을 맡지 않게 되길 바라고 있어요.”

이런!

고백도 해 보지 못하고 거절을 당하다니.

선 사장은 씁쓸해졌지만 한편으로 시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된 것처럼 개운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상처주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거, 알죠?”

선 사장이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선 사장은 오랜만에 고백을 하고 오랜만에 차였지만 그래도 소명이 새 집을 마음에 들어해서 기분이 한결 낫다고 생각했다.

정인이 지명을 바라보았다.

“왜?”

지명이 정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물었다.

“지명씨도 그럼 다른 시대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거예요?”

지명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명도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인은 자신이 혼자서 남겨지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일본에 있는 그 지명씨는 왜 미래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현재를 바꿔놨으니까 미래도 바뀌지 않았을까요? 기선 오빠랑 희영 언니는 살았고 오히려 쇼스케란 남자가 죽었잖아요. 그럼 미래도 바뀌지 않을까요? 현재가 미래의 전제가 되는 거잖아요.”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모르지.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 그리고 미래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녀석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시간들과 마주해야 되는 거잖아. 그건 겁나고 불안한 일 아닐까?”

정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명은 지금 정인이, 미래에 남겨져서 지명을 기다리는 미래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좋아한 사람이 기선 오빠였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해요.”

정인이 말했다.

“남겨질까봐 걱정 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돌아올게. 돌아와서 너하고 같이 천천히 늙어갈 거라고 약속할게.”

약속하고 장담하는 것은 지명의 특성인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질투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었다.

지명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이해를 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스물 네 시간 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과연 같은 사람인 건지 지명은 의문을 품었다.

그 무수한 지명이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작점을 가진 동일인인 건지, 아니면 찰나의 순간, 독자적인 사건 속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캐릭터들인 건지.

“미치겠다. 내가 왜 이런 의문을 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괜히 못된 애처럼 느껴지잖아.”

지명이 혼잣말처럼 하소연을 했다.

“그 녀석은 나하고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나한테 오지도 못하고 있어. 아버지는 그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 아버지가 그 녀석을 나보다 더 마음에 들어하시면 어쩔지 그것도 신경 쓰이더라니까?”

정인은 놀란 눈으로 지명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앞에 나설 거래요?"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

"사장님은 받아들이지 못하실텐데요?"

"우리는 지금까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넘어서서 여기까지 왔어. 나도 아버지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상에서 안주하게 해 드리고 싶지만 지명이를 숨길 수는 없어. 그 녀석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할 거라는 건 당연하잖아."

"그건 그렇죠."

"그리고 아마, 너도 그리워할 거야."

"거기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을게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생겨났다.

두 사람 모두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그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희영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면서 깨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기선은 눈이 떠지지도 않은 얼굴로 희영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희영아?”

잘 잤냐는 말보다 그 말이 이제는 더 빨리 튀어나오게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희영은 절대로 괜찮지 않았다.

기선도 정신을 차렸다.

“희영아!”

희영을 깨우고 싶어서 기선은 희영의 몸을 흔들었다.

희영도 필사적으로 악몽 같은 환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에 두 손으로 눈을 가려봤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선은 희영이 저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희영을 그저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희영이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이 기선에게 보였다.

일부러 혼자만 끌어안으려고 했던 고통들이 마치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버리는 댐처럼 툭 터지는 바람에 기선에게 흘러갔다.

곧이어 기선의 입에서도 끔찍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단 아래의 실험실.

그곳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믿음을 배신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달튼은 준의 분노가 자신의 어린 아들인 크리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한탄했다.

크리스만큼은 돌려 보내 달라고 그는 준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준 맥브라이언의 눈은 잔인하게 빛날 뿐이었다.

날카롭게 갈아진 칼이 달튼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달튼은 결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 칼을 받아드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서, 달튼."

준 맥브라이언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아들을 죽이고 그 후에 죽음을 맞으라는 말에 달튼은 짐승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죽음에 이르는 방법은 많고 많아. 죽음에 이르게 할 사람만큼이나 많지.”

달튼은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 맥브라이언을 제외하고는 이 일을 기꺼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준이 명령한다면 그들 중 누구도 머뭇거리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달튼은 알고 있었다.

“아들을 괴롭게 하지 마. 달튼. 결정을 한 건 너였겠지. 아들한테 진실을 가리우다니. 그런 짓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도 않고 믿기지도 않지만 너는 그 짓을 했지.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는 채로 사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크리스가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하고 싶지 않다, 달튼. 나는 너한테 자비를 베풀려는 거다,”

달튼은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세게 꿇었는지 뼈가 부서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달튼에게는 살려야 할 아이가 있었다.

“준. 준!! 제발 제 목숨을 받는 걸로 화를 풀어주세요. 제발요. 부탁입니다. 준!”

“네가 뿌린 아인데 네가 거두는 게 옳지 않겠어?”

달튼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미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칼을 들고 서 있던 사람에게서 칼을 낚아챘을 때 사람들은 그가 준에게 의미없는 공격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렇게나 완강히 거절했던 칼이었다.

하지만 달튼은 외부에 공격을 표출하는 대신에 실성한 사람처럼 바지를 내렸다.

“내 잘못이에요.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에요. 제발 이걸로 거둬줘요. 크리스는 살려줘요!!”

그가 마술을 부린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지 않던 빨간 페인트통을 갑자기 나타나게 해서 쏟아붓는 마술.

사람들은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솟구치듯 쏟아지는 피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준은 고개를 돌렸다.

달튼은 미친 듯한 표정으로 한 손에 제 페니스를 쥐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몸의 일부가 아니게 된 그것을.

칸트마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준. 아이는 용서해줘요.”

칸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강경했다.

준은 칸트를 노려보았다.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의외였다.

준은 크리스를 찾았다.

아이는 다른 사람이 안고 있었다.

달튼이 거의 미쳐가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버지의 광기를 보지 않도록 실험실의 연구원 하나가 제 품에 크리스를 안은 채 그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어찌나 꽉 막았는지 손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

“크리스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칸트는 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준은 실성한 달튼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붓으로 성난 한 획을 그어 버리듯 달튼의 몸을 갈라버렸다.

돌아보려던 크리스의 눈을 이번에는 칸트가 가렸다.

“가자.”

그 모습을 환영으로 고스란히 본 희영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구토를 일으켰다.

쓴 위액밖에 나오지 않을 때까지 구토를 하고는 실신을 하듯 쓰러져 버린 희영을 기선은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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