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 / 0101 ----------------------------------------------
그녀는 낯 선 공식을 보는 것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경험하는 오르가즘을 지켜보았다.
그의 앞에서 그녀는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살인현장을 지켜보고 이해할 수 없는 쾌락에 자신을 맡겨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바탕 열기가 그녀를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바지 위로 확연히 드러난, 발기한 그의 것을 보자 칸트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이 다가올 때 칸트는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의 머리를 자신에게 잡아 당겼다.
거센 빗줄기를 뚫고 옥상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준이 칸트가 걸치고 있던 단 하나뿐인 옷을 벗겨냈을 때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오르가즘에 이르렀던 그녀의 음부는 진득하게 젖어 있었고 그는 그녀의 앞에 선 채 그녀를 안고 그녀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려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게 한 채로 들어갔다.
칸트는 준이 그녀의 안에 들고 나는 동안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 어정쩡하게 팔을 대고 있는 칸트의 팔을 잡아 준이 그의 등을 감싸게 하고 그녀의 가슴을 느꼈다.
칸트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다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면서 눈을 감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고 그의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로 떨어진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 내렸다.
그의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은 그녀의 안을 채우고 흘러나와 동그란 허벅지를 타고 내려갔다.
준이 그녀의 음부를 손으로 쓸더니 정액을 손가락에 담아냈다.
그의 손가락에 맺힌 것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고 싶어 했지만 빗속에서 너무 젖어버려서 옷을 입는 것이 의미가 없을 듯했다.
히나타와 함께 있는 동안 지명은 자신이 세상의 경이로움에 얼마나 무뎌져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만 했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신의 오감으로는 절대로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의 교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히나타는 지명이 겁먹지 않게 하려고 지명의 앞에 만들어내는 것들을 자신과 분리시켰다.
그의 주위에 풀이 자라게 되건 나무가 자라게 되건 싹이 움트건 간에 일단 히나타의 몸과는 분리가 된 채 자라도록 했다.
그래서 지명은 히나타의 손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히나타가 그의 연약함을 신경써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이루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당신이 신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됐어?”
지명이 물었다.
히나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답을 알지 못해서였다.
지명은 히나타를 이해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게 언제부터냐고 물어도 나도 대답을 할 수 없을 거야. 그런 능력이 나한테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닐 거라는 의심이 더 컸거든.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서 내 운명과 마주치기로 결심하게 된 것 같고.”
“나도 아마 그런 것 같아요.”
“당신이 신이 된 건 나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르죠.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사당 밖의 나무는 언젠가 다시 히나타가 될 수도 있을까?”
“모르겠어요. 심장을 가진 채로 누군가를 영원히 기다리는 건 너무 아픈 일이어서. 나는 히나타가 그냥 나무이기를 원해요. 돌아가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지명은 히나타의 두려움을 깨달았다.
“돌아가지 않을 거죠? 다시 떠나지 않을 거죠?”
지명은 눈을 감았다.
자기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현실에 살고 있는 지명이 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명은 히나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붉게 물든 히나타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몸이 뜨거워져서 그는 천천히 다리를 들어 올려 히나타의 몸에 문질렀다.
히나타는 지명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숨을 들이쉬었다.
지명의 손이 히나타의 허벅지 안쪽을 뜨겁게 쓰다듬었다.
히나타는 견딜 수 없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지명은 히나타의 입술을 머금은 채로 히나타의 아래쪽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희미한 이질감에 그가 키스를 멈췄다.
그의 손의 움직임도 같이 멈추었다.
“히나타……!”
히나타 역시 놀란 눈으로 지명을 바라보았다.
히나타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을 놀라게 만든 것은 고작 피 따위가 아니었다.
히나타의 허벅지에 붉은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쇼
스
케
의
젠
지명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히나타가 손을 뻗었지만 지명은 자기가 그 손을 잡을 수 있을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히나타는 혼자 수렁에 빠진 것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히나타.”
나무.
나무신.
수백년의 기다림 끝에 그에게 다가온 그녀가 절망하고 있었다.
히나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지명도 알고 있었다.
제 얼굴을 지우고 남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 얼마나 깊은 고뇌의 산물이었는지 그는 이해했다.
지명이 다시 히나타에게 다가갔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히나타의 온몸이 한 순간에 녹아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를 눈 앞에 두고도 순식간에 절절한 그리움이 쌓여버렸다.
“떠나지 않을게.”
그 말에 히나타는 지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그의 몸을 구석구석 젖게 만들었다.
“떠나지 않을게.”
지명은 히나타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었다.
“떠나지 않을게.”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그 꿈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난폭한 침입자가 그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지명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
희영은 과즙이 흐르는 과일을 탐욕스럽게 쥐듯이 앞에 누운 남자의 심장을 손에 쥔 카즈마를 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영상이 보이는 건지 희영은 알지 못했다.
“뭐지, 이건 또?”
기선과 아미는 희영이 보여주는 환영을 희영과 동시에 보고 있었다.
“검시를 하는 것 같은데요? 앞에 누워 있는 남자, 죽었잖아요.”
아미가 말했다.
“저게 왜 나한테 보이는 거지?”
카즈마를 알 리가 없는 희영이 말했다.
“일본에도 준의 실험체가 많다는 얘기를 내가 했던가요? 쇼스케가 실패했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 일을 마무리짓게 하겠죠.”
아미가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기선이 말했다.
“준 맥브라이언한테 끝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완전히 끝나야 끝나는 거예요. 완전히 끝나는 게 뭔지는 알죠?”
아미가 말했다.
“죽이는 걸 말하는 거야?”
기선이 물었다.
아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실험체에 대해서 아는 건 없어?”
기선이 물었다.
“전혀요.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실험체는 기껏해봐야 나라별로 다섯 안팎 정도에요. 저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럼 본격적인 게임은 시작도 안 됐다는 거네?”
희영이 말했다.
“그런 거죠. 게임을 리셋시키는 사람을 먼저 제거해야겠지만 정작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잖아요. 장 항 형이나 그런.”
“리셋시키는 사람? 그럼 저 사람이 지명이를 노릴 거라는 말인가?”
“준이 바보처럼 보여요? 이겨 놓으면 리셋할 게임을 하고 싶을 리가 있겠어요?”
아미가 말했다.
“그렇군.”
“그래도 지명 형을 제거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형은 나무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잖아요.”
아미는 과학과 몽환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제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뭘 상상하는 건데? 갑자기 나무가 자라나서 거대한 산성이 돼 주기라도 할 것 같아?”
기선이 말했다.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어조였지만 아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말을 내뱉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아미가 말했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꽉 막혀 있는 사람이 왜 준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는지 모르겠어요.”
“허, 지금 나를 두고 한 말이야?”
기선이 말했다.
희영은 웬만하면 두 사람 사이에 나서서 중재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
카즈마는 수화기 저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공간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뭘 어쩌라고?
카즈마는 그렇게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붉은 번개의 틈’에서는 해마다 실험실에서 자행되는 실험 영상을 담은 DVD를 보내왔다.
그것은 자신들의 연구 실적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세상 밖에 있을 뿐 우리들의 실험체다.' 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불손하게 저항했다가는 제단 아래의 실험실로 잡혀가서 개죽음을 당하게 될 거라는 경고였다.
제단의 장학생이 되겠다고 선뜻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카즈마는 자신이 제단을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드러난 사실은 반대였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카즈마가 물었다.
“생각해 내.”
준 맥브라이언은 그걸 답이랍시고 던져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런 개새끼!”
카즈마가 소릴 질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
이상한 기미만 보여도 달아날 것이다.
시간을 건너 달아난다는데 붙잡을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카즈마는 약간 미치기만 했을 뿐 거의 정상인과 비슷했으니 그런 능력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낌새를 알아채게 해서는 안 되고 먼 거리에서 단 번에 끝낼 수 있어야 했다.
“별 수 없지, 뭐.”
***
테오의 깔끔한 중절모자에는 이제 두꺼운 먼지가 내려 앉아서 테오는 먼지를 털어보려고 애쓰다가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지하철 역사의 쓰레기통에 모자를 던져버렸다.
모자에 감춰진 것이 빛나는 대머리일 거라는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테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하지만 머리카락의 윤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갈지 걱정이 됐다.
이 인간들을 쫓아다니는 일은 피곤했다.
이번에 카즈마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또다시 달아날 것이고 그들을 다시 추적하다 보면 아마 길에서 뒤집어쓴 먼지로 머리카락은 또 볼품없이 손상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문득 슬퍼졌다.
테오는 칸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냉정한 목소리가, 게다가 건조하기까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녀석은 확실해?”
“확실한 게 어딨어. 어린 애냐? 그런 소리나 하고 있게.”
칸트가 말했다.
하긴. 원래부터 남에게 희망을 줄 줄 아는 녀석이 아니다.
테오는 칸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한 녀석한테 시키면 안 되는 거야?”
“떠들썩하게 문제라도 일으키게?”
테오는 십 원도 못 건질 걸 뭐하러 전화를 했나 싶었다.
후회만 남긴 통화였다.
카즈마는 테오가 거지꼴이 돼 가면서 부지런히 움직여준 덕에 흑사의 사당이 위치한 곳을 알아냈다.
모래해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
카즈마는 그 흑사의 사당이 나무신을 섬기던 곳이라는 정보를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