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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은 희영이 하는 말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환시야. 희영이의 능력이 한 단계 발전했어. 희영이가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한테 보여주고 싶은 걸 직접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됐어.”
기선이 말했다.
“누나가 보여주는 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에요?”
지명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봤던 걸 다시 보여줄 수도 있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걸 조작해서 보여줄 수도 있어. 내 머릿속에 있는 영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
희영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쪽이에요? 누나가 만들어 낸…… 거죠?”
지명이 간곡하게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지만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아니야.”
기선과 지명은 서로 손을 꽉 잡았다.
쇼스케의 입안에 들어간 손가락에서 나뭇잎이 쏟아져 나왔다.
“어, 어떻게, 된……?”
지명은 말까지 더듬었다.
“나무 신이라고 했잖아.”
희영이 말했다.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죠, 누나.”
“나는 있잖아. 이제 그런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우리 인식 체계로 아무리 전력질주하고 달려봐야 다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없어. 나는 포기했어. 보이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아. 이해가 안 된다면 안 믿을 거야? 이게 현실인데?”
희영의 단호한 말투에 기선과 지명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히나타는 사당 앞의 나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무등걸을 손으로 만지면서 히나타는 나무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어떻게 되는 거니.’
히나타는 지명과 함께 시신들을 닦아내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까.
그게 한 시간이었을까.
하루였을까.
아니면 일주일?
‘히나타.’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나무 앞에 서 있는 히나타가 경험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작아지는 나무가 되어버린 히나타가 양도한 기억이었다.
미래의 히나타는 지명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지명이 다가갈수록 미래의 히나타 역시 계속해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러지 않으려고 나무로 변한 걸까?
히나타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히나타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러다가 돌아섰을 때 그곳에 지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지명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명은 히나타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희영에게 히나타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복도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밖에 있는 히나타를 발견하고는 히나타에게 걸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무에 나비가 날아 앉았다.
지명이 나비를 바라보는 것을 히나타도 바라보았다.
“이 히나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지명이 물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같이 나무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히나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히나타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무 앞에 서 있다가 지명이 천천히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없이 또 한참을 서 있었다.
한참만에 히나타가 지명을 바라보았고 그를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방에 들어가서도 두 사람은 한없이 길기만 한 침묵을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긴 침묵을 깬 사람은 지명이었다.
“사랑하고 싶어요. 히나타.”
“…….”
히나타는 지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선이 고와서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꽉 짜여져 박힌 근육 때문이 아니었다.
가끔, 말도 안되게 그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히나타는 숨이 막힐 듯 흥분을 느꼈다.
히나타가 지명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히브리어로 누군가를 안다는 말은, 정사를 나눈 사람들의 사이에서 나눌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야다’라는 히브리어는 ‘안다’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서로를 안다는 것을 넘어서서 성적으로 관계를 하였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성행위를 통한 관계와 경험의 앎이다.
지명에게 안긴 히나타는 왜 앎에 성관계가 전제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야다.’
그가 자신을 아는 것이 좋았다.
그의 깊은 애무를 받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히나타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지명은 긴장하곤 했다.
특히나 움푹 파인 곳을 더듬어 들어갈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배꼽이나 귓가나 입술 주변을 히나타의 손가락이 지나가기만 해도 걱정이 되었다.
그 안이 나뭇잎으로 가득 채워질까봐.
심지어 한 번은 애널 근처를 지나가기까지 했다.
지명은 놀라서 힘을 주어 구멍을 닫았다.
히나타가 그를 바라보았다.
지명은 민망해서 얼굴을 한없이 붉혔다.
지명은 히나타의 손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마다 긴장을 하고 싶지가 않아 히나타의 손을 제 손에 쥐었다.
히나타는 지명이 자신의 비밀을 알면서도 용기내서 다가와 주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히나타를 안고 눈을 감았을 때 벚꽃 냄새가 나서 지명은 한 번 더 놀랐다.
히나타는 놀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지명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동그란 히나타의 배에 지명이 쏟아낸 더운 정액이 번져 흘렀다.
지명은 히나타의 옆에 누우면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히나타의 몸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히나타의 몸에서는 꽃 향기가 났다.
지명은 히나타의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히나타는 사랑스럽게 지명을 바라보고 지명을 어루만졌다.
쇼스케의 생명을 단호하게 거둔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히나타는 전혀 머뭇거림없이 또다른 생명을 거두게 될 거라는 것을 지명은 의심하지 않았다.
***
한기가 가시지 않는 방.
철제 침대 위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참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의 앞에 선 남자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것참.”
카즈마는 위험하게도 메스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싶었지만 메스를 손에서 내려놓기가 귀찮아서 그러고 있는 것이다.
“시작합니다.”
카즈마는 보이스레코더에 제 목소리를 담아 넣기 시작했다.
야쿠자 조장 쇼스케의 검시를 맡게 되다니.
그러면서도 카즈마는 그가 무슨 일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쇼스케가 실패한 그 임무가 이제 곧 자신에게 부여될 거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카즈마의 손에 피부처럼 달라붙은 메스가 쇼스케의 턱 밑부터 복부까지 단 번에 가르고 지나갔다.
망설임이란 카즈마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갈라진 틈으로 노란 지방과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근육으로 덮인 흉벽이 드러나자 카즈마는 늑골을 부수기 시작했다.
충실하게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쇼스케를 지켜내 주었던 늑골이지만 카즈마에게는 고생스런 방해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입안에 가득한 나뭇잎의 종류를 알아보는 것은 급하지 않았다.
카즈마는 생에 가장 근접한 시간에 있는 심장을 빨리 보고 싶었다.
늑골을 부수고 여전히 그의 시야를 가리려는 것들을 들어 내자 붉게 빛나는 폐와, 하얀 막으로 싸인 심장이 나타났다.
“하아.”
경이로운 탄성이 쏟아져나왔다.
심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카즈마의 손은 점점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장막을 열어서 손 안에 들어오는 심장을 움켜쥐고 메스를 가져다 댔다.
심장이 사라진 공간은 어두운 피로 메워졌다.
호출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카즈마의 조수가 카즈마를 바라보았다.
무시해도 좋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석션하고 기다려.”
카즈마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메시지를 확인했다.
침대 위에 누운 쇼스케에게서는 어쨌거나 임무에서 해방된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겠지만 카즈마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여유를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쇼스케가 실패한 임무가 이제 막 그에게 옮겨지는 참이었다.
준 맥브라이언.
카즈마의 머릿속에는 이제 그 이름만 가득 채워졌다.
그 뒤의 과정은 카즈마가 조수에게 사무적인 목소리로 지시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뭇잎들은 어떻게 할까요?”
답답한 질문에 카즈마는 화를 냈다.
“어쩔 건데? 빼야 되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아, 네.”
카즈마는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선지명.
준 맥브라이언도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카즈마는 힘의 불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350그램짜리 심장에서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내 봐야 준 맥브라이언을 거스를 마음은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한편으로 카즈마는 이런 일을 강요받는 것을 자기가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는 위로를 받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살인을 할 수가 있었다.
측은한 표정으로 메스를 들지만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선지명.’
카즈마는 스마트폰을 열어 다시 그 얼굴을 확인했다.
테오가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지명이 나무신의 그늘 아래서 쉬고 있다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카즈마에게 허락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준은 손에 묻은 피를 닦으려고 하지도 않고 실험실을 떠났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칸트가 제 뒤를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준은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서 칸트를 기다렸다.
칸트가 몇 걸음을 뛰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준이 꼭대기층을 눌렀다.
칸트는 준을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밖에 비가 와요.”
옥상으로 가려는 건가 해서 칸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더 좋지.”
준이 칸트의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준의 손가락이 칸트의 목을 지나 가슴으로 떨어졌다.
칸트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멈춰달라고 말하면 이 남자가 멈춰줄 수 있을까.
의미없어 보이는 살육의 릴레이를.
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준이 먼저 내렸다.
칸트의 말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꽤 굵은 빗방울이었다.
하늘에서 새로이 떨어진 빗방울들은 옥상 위에 고여있던 빗물 위에 떨어지며 격렬히 제 영역을 만들어 내려 했다.
칸트는 갑작스럽게 한기를 느껴 몸을 떨고 있었고 준은 빗방울이 그녀의 몸을 드러내는 것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투둑. 투두둑.
준의 손등이 칸트의 가슴에 닿았다.
손등으로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낀 후로 그는 즉흥적으로 칸트의 가슴을 애무한 후에는 칸트를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준이 가만히 서 있어도 빗방울들은 멈추지 않았다.
속옷을 입지 않은 칸트의 몸이 젖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녀를 정신없이 떨게 만들던 한기가 사그라들었다.
칸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칸트였다.
토독, 토도독.
빗방울이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두드려댔다.
어깨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그녀의 몸을 쓰다듬다가 툭 떨어졌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칸트는 자신의 음부에서 시작한 강렬한 통증 같은 기운이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흐으으윽!!!”
낯선 경험에 칸트는 다리를 모아 조였다.
쓰러질 것처럼 강렬한 현기증이 그녀를 덮쳤고 음부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고 희미하고 더운 신음이 나다가 그 소리가 점차 커졌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