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 / 0101 ----------------------------------------------
“모르겠는데? 그 시대로 돌아가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 시대에는 기선이 형이 없는데? 희영이 누나도 없고. 나한테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로 내가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왜, 사이크? 무슨 문제라도 있어?”
사이크는 눈 앞의 지명을 바라보았다.
“이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정인이한테는 남자가 있어. 알지?”
“무슨 소리야?”
“여기에 정인이의 선지명이 있다고.”
“……!”
“미안하다. 이런 말을 해서.”
“넌 정말 최악이다. 이 나쁜 새끼야!!”
“그래? 내가 이 말을 왜 했다고 생각해?”
“선지명 그 개자식이 시킨 거야?”
“그래. 풉!”
사이크는 선지명이 선지명에게 욕을 하는 것을 듣고 웃어버렸다.
사이크 앞의 지명은 괜히 미안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일단 돌아가서 얘기하겠다고 해.”
“그럴 여지도 없어. 정인이는 너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거든.”
“뭐?”
지명은 자기가 살던 시대를 포기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던 건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미래에 살고 있는 정인이 자기를 찾으면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그럼 정인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미안하다. 지명. 아니. 아니지. 이건 내가 사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선지명. 네가 말해.”
사이크가 말했지만 지명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미안하지 않아.”
“들었냐, 선지명? 네가 너한테 안 미안하다는데.”
“그 새끼한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일단 한 번 보자고 해.”
사이크는 키득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지명은 배신감에 휩싸여서 볼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정인이 자신을 거절했다니.
기껏 사람들을 살려준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지명은 화가 나서 소릴 질렀다.
기선은 그런 지명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여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 내가 죽었었어?”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슬펐어?”
“아니요. 내가 다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슬퍼하면, 영영 형을 잃을 것 같았어요.”
갑자기 지명의 목소리가 울컥 떨리더니 끝내 울음이 터져나왔다.
미루어 두었던 슬픔이 전혀 뜻밖의 순간에 터져버린 것이다.
“으어어어엉!! 혀어엉!!”
기선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희영을 바라보았지만 희영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갔다.
“그래. 죽어서 미안하다. 이제 안 죽을게. 안 죽을 테니까 울지마. 알았지?”
기선이 지명의 등을 토닥였다.
희영도 지명을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지명을 달래주었다.
유우신은 별장 앞에 택시가 와서 차례로 멈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한참 전부터 밖에 나가 있었다.
히나타는 누군가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춥지 않냐고, 들어오지 그러냐고 몇 번을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히나타는 유우신을 향해서 짧게 웃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유우신은 히나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변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알던 히나타 같지 않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지명은 사람들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유우신의 반응은 지명이 예상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히나타는 달랐다.
히나타는 미래에서 만났던 지명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명은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히나타가 지명을 바라보며 웃었다.
“히나타.”
지명이 그 이름을 불렀다.
유우신은 이 남자가 히나타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했다.
히나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거친 혼돈에 휩싸였다.
“히나타. 아는 분들이야?”
유우신이 히나타에게 다가와 물었다.
히나타는 유우신을 향해 이번에도 짧게 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고 있는 거죠?”
히나타가 지명에게 물었다.
지명은 히나타의 승합차를 발견했다.
이제는 그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나를 기억……, 기억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만났었던 걸 혹시 알고 있는 거예요?”
지명이 물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지명이 유우신에게 물었다.
지명은 히나타의 반응에 너무나 큰 것까지 기대해 버렸다.
유우신도 자신을 아는 걸까 해서 물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예절이 너무나 몸에 배있어서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딱 그런 표정을 유우신이 짓고 있었다.
“히나타는 어떻게?”
히나타는 설명을 하는 대신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쇼스케와 젠이 찾아다니고 있어요. 이 분을 죽일 때까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겠군요.”
히나타가 기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희영은 화가 났다.
왜 하필이면 기선이란 말인가.
도대체 쇼스케란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쇼스케와 젠이? 그 사람들이 이 분들을 왜?”
유우신이 물었다.
“유우신.”
히나타가 그를 바라보았다.
“유우신도 이제는 여길 떠나는 게 좋아요.”
“떠나라고? 어디로?”
“쇼스케는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자비로운 사람도 아니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도 아니죠. 그가 잘 하는 게 있다면 후회에요. 유우신을 죽이고 후회를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후회할 거라는 생각으로 절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쇼스케가 나를? 왜?”
“쇼스케가 의도한 일들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거거든요. 여기에 머뭇거리고 있다간 유우신한테 화가 미칠 거예요.”
유우신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거지?”
“우선은 함께 가요. 그 후에는 우리도 헤어져야 돼요.”
“……. 짐을 쌀 시간은 있을까?”
유우신이 묻자 히나타는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아요.”
희영은 눈 앞의 여자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히나타의 커다란 승합차는 해안도로를 달렸다.
유우신은 운전을 하면서 가끔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흑사라고 몰린 신앙을 간직한 일무리의 사람들이 섬긴 것은 나무였다.
300년도 더 된 나무라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가 말라죽어 버렸을 때 사람들은 신이 나무를 떠났다고 말했다.
이제 나무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어서, 사람으로 현현하기 위해 신이 나무를 떠난 거라고 했다.
나무를 떠난 신이 누구의 몸을 입고 태어날지 모두가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히나타가 태어났다.
신관이었던 히나타의 아버지는 히나타를 신이라 불렀다.
어린 히나타의 주위로는 나비떼가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나비들이 신을 따르는 거라고 했다.
유우신이 히나타를 만났을 때도 나비 한 마리가 히나타의 주위를 어른거렸다.
하지만 젠의 얼굴을 덧쓴 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히나타는 자기가 다른 운명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명은 기선에게 작은 소리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지명이 기선들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말에 모두가 유우신과 히나타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우리 때문에 이 분들이 쇼스케한테 쫓기게 되는 거라면 우리가 도와야 되는 것 아닌가?”
장 항이 말했다.
선우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릴까? 숨어 있어야 하는 기간.”
유우신이 히나타에게 물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래 걸리지 않아요.”
지명은 히나타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명의 눈에 익숙한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 지명에게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달라진 거라곤 사당 앞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지명이 히나타를 바라보자 히나타가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자라는 나무입니다. 지명이 사라진 순간의 히나타. 그 시간의 히나타가 자라고 있는 거예요. 미래를 향해서는, 소멸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희영은 히나타가 하는 말을 전부 믿다가는 돌아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아미는 이 모든 일들을 신기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의 머리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무한히 열린 사고 방식 덕에 아미는 홀로 만족해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가득한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여기로 올 걸 그랬어요.”
아미가 말했다.
“그래. 퍽도 재미있겠다.”
그렇게 말한 연우는 아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쇼스케의 주먹에 또 한 사람이 나가 떨어졌고 발길질에 격한 신음을 토해내고 다른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쇼스케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준 맥브라이언이 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쇼스케는 알 수 있었다.
실망.
실망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준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거두었다고 했다.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한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쇼스케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달랠 수 있을까 했다.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이 전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유우신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잠깐 산책이라도 나간 것처럼 가져간 것도 없이 사라졌기에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젠과 같이 기다렸지만 유우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화를 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쇼스케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거기에는 곱게 앉아있는 젠이 있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젠이 와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제 기분을 풀어주려고 와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무력함을 느끼고 분노를 품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 기분은 은근하게 그의 아랫도리를 흥분시켰다.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기분이었지만 쇼스케는 당장이라도 젠에게 들어가고 싶었다.
쇼스케는 요란하게 소파에 앉으며 젠을 불렀다.
젠은 그에게 다가왔고 쇼스케는 젠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라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틀림없는 젠이지만 젠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유우신이 보낸 거냐.”
쇼스케가 말했다.
히나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말을 아끼라는 듯, 쇼스케의 입가에 손을 얹었다.
쇼스케는 히나타의 그런 행동을 전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았기에 히나타가 하려는대로 내버려두었다.
히나타의 손가락 하나가 쇼스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쇼스케는 긴장을 풀고 뒤로 누우면서 더운 숨을 내쉬었다.
히나타가 페니스를 만져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 입 안에 들어간 히나타의 손끝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움트다가 나뭇잎이 생겨났다.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
쇼스케는 놀란 눈을 부릅 떴다.
숨이 막혔다.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목구멍 가득 밀고 들어간 손가락에서는 계속해서 나뭇잎의 수가 늘어갔다.
쇼스케는 마지막 호흡을 해 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히나타는 그의 방을 빠져 나가면서 쇼스케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하지만 누구도 히나타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복도를 성실하게 전부 다 밟아주고 히나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