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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은 문을 열었다.
지명은 기선을 보자마자 울컥하며 그를 와락 끌어 안았다.
“형!!”
그러더니 기선을 몇 번이나 뜯어보았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야, 너! 너, 왜 이래?”
“누나! 누나도 괜찮은 거죠?”
지명이 묻자 희영은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지명씨. 여기에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르겠고 정말 반갑기도 하지만 너 지금 굉장히 이상하게 보여.”
“상관 없어요.”
기선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이었다.
“지명씨!”
갑자기 희영이 소릴 질렀다.
“발이 왜 그래? 다쳤어? 지금 어디에서 오는 거야? 슬리퍼를 신고 왔어?”
지명은 그제야 제 차림을 돌아볼 생각을 했다.
실험실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정인이 소릴 지르면서 쓰러졌고 그 바람에 지명은 실험 도구를 떨어뜨렸다.
발등에 떨어지며 깨진 것이 살갗을 찢었고 정인에게 급히 가려다가 발로 날카로운 조각을 밟은 것도 기억이 났다.
“정인이! 정인이가 괜찮은지 물어봐야겠어요.”
지명은 주머니를 더듬다가 스마트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긴 했지만 지명이 뭘 찾는지는 알 수 있었고 자기 스마트폰을 건네 주었다.
곧바로 정인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정인아. 너, 괜찮은 거야?”
“…….”
“정인아.”
“희영 언니…에요?”
“나야, 지명이.”
“…….”
“정인아. 지명이라고.”
“무슨 말인지……. 누구세요? 희영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왜 희영 언니 전화로 장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명씨 목소리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지명씨, 이리 와서 전화 좀 받아봐. 누가 장난을 하고 있어.”
정인은 아예 건너편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했다.
‘맙소사!’
지명은 자신이 지금 엄청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켜봐, 지명아. 정인씨. 나한테 줘 봐.”
사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신중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크, 나야. 지명이.”
“그래.”
“내가 지명이라는 걸 믿는 거야?”
“일단 얘기해 봐. 꼭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테니까. 도대체 왜 네가 거기에 있는 거야?”
“기선이 형이랑 희영이 누나랑 모두들 여기에서 죽어. 쇼스케라는 야쿠자한테 당해. 내가 능력을 각성했어. 나는 시공간을 초월하나 봐.”
“역시 그거였어. 그거일 거라고 생각했어.”
“너. 놀라지 않았어?”
“여기에 있는 너하고 그 얘기를 하는 중이었거든. 아마도 네가 가진 능력은 그런 거일 것 같다고. 그러면 언젠가는 미래에서 날아온 너랑 조우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다행이네. 적어도 한 사람은 나를 정상인으로 대우해 주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을 구할 수는 있는 거야?”
“그렇지. 너랑 이렇게 오래 얘기할 시간이 없어. 언제 그 야쿠자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안전한 곳으로 피한 후에 다시 연락할게.”
“그래. 조심해, 지명.”
기선과 희영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지명과 사이크가 나누는 얘기를 듣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형들한테 말할게.”
기선이 말했다.
“많이 챙겨갈 여유도 없어요. 지갑이랑 스마트폰 정도만 가지고 곧바로 떠나야 한다고 하세요.”
지명은 그렇게 말하고 희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려가서 택시를 잡아 놓고 있을게요. 서둘러야 돼요.”
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론트에서 히로시는 쇼스케와 젠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절로 허리가 긴장이 되었고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연스럽게 공손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젠이 히로시를 바라보았고 히로시는 감시 카메라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가 먼저 와서 열렸고 쇼스케와 젠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또다른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거기에서 심하게 피곤해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내렸다.
두 사람의 표정은 굉장히 불안해보였다.
히로시는 호기심을 가지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히로시의 시선이 남자의 슬리퍼와 붉은 얼룩에 쏠렸다.
두 사람이 로비를 채 떠나기 전에 이번에는 남자들이 비상계단 쪽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회전문이 바쁘게 돌아갔고 사람들은 택시를 잡아서 떠나버렸다.
체크 아웃도 하지 않은 채였기에 히로시는 막연하게 그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는 바쁘게 움직였다.
문이 열렸을 때 붉어진 얼굴을 한 쇼스케와 젠이 내렸다.
쇼스케가 곧장 히로시를 향해 다가왔다.
히로시는 두 다리가 저절로 떨려와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이 쥐새끼들, 어디로 갔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찾으시는 거라면.”
“그래. 그 놈들!”
“좀 전에 내려와서 택시를 타고 가버렸습니다만!”
“이런 쓸모없는 새끼!”
히로시에게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젠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지 않았고 곧장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래봐야 한참전에 떠난 택시의 뒤꽁무니도 볼 수가 없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명씨.”
연우가 물었다.
“아, 반갑다는 말은 했나? 보고 싶었어.”
연우가 뒤늦게 말을 붙였다.
“저도요, 형. 얼마나 반가운지 모를 거예요. 형들이 죽은 걸 보고 났는데 얼마나 반갑겠어요.”
“우리가 죽었다고? 어떻게? 누구한테?”
선우 형이 물었다.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다가 야쿠자한테 걸린 건지 짐작가는 사람 없어요?”
지명이 물었다.
“야쿠자?”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는 바에서 얌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죽는다는 거지?”
연우는 그게 그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지명은 연우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 주려다가 말았다.
고개를 돌리는 지명의 눈에 기선이 보였다.
“아휴.”
지명은 기선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뭘 봤기에 그러는 거야?”
“아휴, 정말.”
“그나저나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희영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제가 알아요.”
지명이 당당하게 말했다.
정인은 사이크를 바라보았다.
지명 역시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사이크를 바라보았다.
사이크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명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야. 네가 왔어.”
“내가?”
지명이 되물었다.
정인은 사이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인씨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건 의외더라.”
사이크는 이제 정인과 지명을 한꺼번에 놀리기까지 했다.
“그거야! 그건…….”
정인은 그렇게 말할 뿐 제대로 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명씨가…….”
“지명이는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것 같거든. 아주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어. 아마도 그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지. 준 맥브라이언이 서둘러서 지명이에게 있던 금속체를 회수하고 지명이의 기억을 지운 걸 보면 지명이한테는 상상이 불가능한 능력이 나타났던 게 분명했을 거야. 맥브라이언에게 발견된 지명이의 능력이라는 건 미미한 수준의 각성에 불과했을 거고. 하지만 한 번 발현됐다가 봉인된 능력이라서 단 한 번의 각성으로 시공간을 이동하는 게 바로 가능해 진 것 같아.”
지명은 조용히 사이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나 뿐인 거지?”
지명이 물었다.
“그렇지. 왜?”
“그 녀석은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 거야?”
“그건 모르겠는데?”
“이 시간을 나랑 같이 살려고 들진 않겠지? 이건, 그러니까 이렇게 된다면 월권 같은 거 아니야? 이 시간을 지배하는 선지명은 나였던 거잖아. 그런데 왜 미래의 선지명이 나랑 동시대를 산다는 말이야?”
“너, 혹시 너한테 질투같은 걸 하는 거냐?”
사이크가 물었다.
사이크가 힐끗 정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정인씨 때문이야? 그 지명이 정인씨를 보는 게 싫어?”
“모르겠어. 퇴행을 겪고 있는 건지. 그동안 선지명의 세계를 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잖아.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놈이 미래를 안다고 설치는 게 싫어.”
“그게 너야. 알긴 아는 거지?”
“알아.”
“퇴행 맞는 것 같다. 선지명.”
지명도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는 동시대를 쭉 같이 진행해가는 지명씨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요.”
정인의 말에 지명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이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지명이 네가 사람들을 구했어. 기선이 형이랑 희영이 누나랑 모두를.”
“그래. 그건 다행이네.”
“야. 네가 하지도 않은 일인데 네가 치하를 받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래도 여기에서 그런 인사를 받을 사람은 나일 것 같지 않아? 나 말고 다른 사람 중에 누가 그 인사를 받겠어?”
“모르겠어. 일단은 우리가 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돼.”
“그 지명이한테 물어봐. 우리가 그 사이에 뭘 알아내게 되는지. 그럼 우리는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잖아.”
“하긴. 그렇겠네.”
사이크는 희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곳의 지명과 통화를 했다.
지명은, 신통치 않은 나날의 연속일 뿐이었다는 불행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거참 유감이네.”
“아참, 사이크.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니켈을 사시라고 해. 엔화는 팔아버리라고 하고. 알려줄 게 좀 더 되는데 메모할 준비는 돼 있어?”
“아니. 문자로 보내줘.”
“알았어.”
“이제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거야?”
“사이크.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는 건 몰랐는데 이 사람들 정말!! 이 사람들이 늘 자기들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했던 거 생각나지? 지금 내가 이 사람들한테 그런 대우를 받고 있어. 자기들이 어떤 운명을 피했는지 전혀 모르고 나를 놀리고 있어.”
“그래? 정말 화 나겠는데?”
“특히 기선이 형은 자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치욕스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기만 하는데. 나는 쇼스케라는 인간을 찾아가서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무도 내 말에 동조를 안 해.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겠냐고 하고 있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데. 답답해 죽겠다. 사이크.”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뭐라고? 사이크. 쇼스케는 준 맥브라이언의 실험체야. 준 맥브라이언의 명령을 받고 언제든지 우리를 죽일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고. 이미 이 사람들을 전부 죽인 사람이라고. 그런데 쇼스케를 그냥 놔둬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랑 상의해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그건 좋은 생각 같지가 않단 말이야. 연우 형이랑 시영이 형이 이렇게 논리로 중무장된 사람들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정당방위가 인정되려면 침해의 현재성이라는 요건이 갖춰져야 한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거랑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거야.”
“그래? 그래서 논리가 떨어지는 나한테 얘기하고 싶었다 이거지?”
“일단 아버지한테 전화 드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아참. 지명.”
“응?”
“넌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