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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가 허리를 굽히자 젠은 다시 한 번 놀라는 듯하더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항상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아침이 다 돼 가는 새벽까지 일을 하다보니 젠의 집중력도 많이 떨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젠의 옆에 있는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젠은 쇼스케의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쇼스케가 아닌 다른 남자를 대동하고 이 시간에 다시 호텔을 찾아 오다니.
히로시는 젠과 유우신이 사라진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의 생각에 그 기록은 남겨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젠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젠이 죽어나가는 것으로 일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히로시는 진실의 일부를 잘라냈다.
진실이 편집된 파일은 걸레조각처럼 피폐해졌지만 피폐해진 진실의 조각이야말로 히로시에게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더 큰 균형, 또 다른 세상.”
정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말을 마친 정인은 의식을 잃은 듯 쓰러졌고 오랫동안 잠을 잤다.
소명과 사이크는 지명이 돌아올 때까지 정인이 잠에서 깨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소명이 사이크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 사람들. 죽은 거야? 장 항 오빠랑 선우 형이랑 기선이도 전부? 그 사람들이 어쩌다가? 손쓸 틈이 없이 당해버렸다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그건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겠군. 그렇지?”
“아직 모르죠.”
“생각하고 있는 거라도 말해줘. 나 혼자 버려진 것 같단 말이야. 발을 어디로 내밀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소명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말을 하면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하죠. '그래서 뭐!!'라고요. '알아듣게 말해!' 라고 하기도 해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사이크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소명은 맹세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정인이 보여준 건 정인이 가진 능력이라기보단 희영이 누나가 가진 능력이랑 비슷했어요. 그렇죠?”
“두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는 게 단순히 시간차이 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지. 정인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보잖아. 현재랑 근접한 미래는 희영이한테 허락된 영역이고.”
“네.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정인이는 지명이한테 유우신을 찾아가라고 했잖아요. 정인은 지명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어요.”
“……그렇군.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
“우리는 지명에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뭔지 우리는 모르지만 준 맥브라이언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지명의 능력이 그 남자에 의해서 봉인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왜겠어요?”
“그 남자한테 위협이 되는 능력인 거야?”
“일단 우리 생각은 그랬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이 홀로그램이 된 거야?”
“누나. 상상력을 발휘해 봐요. 과학의 시작은 상상력이에요.”
“어떤 상상력?”
“준 맥브라이언을 묶어버릴 수 있는 힘. 그게 뭘 것 같냐고요.”
“그 남자를 통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는 말이야?”
“네.”
“그 남자가 무력한 상태일 때를 찾아서 무방비일 때 공격하면 되겠지.”
“지명이 그걸 할 수 있다면요?”
“내가 말하는 건 좀 엉뚱한 얘기야. 준 맥브라이언이 코 찔찔이일 때나 그런 걸 말하는……. 너는 지금, 지명이가 타임슬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사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지금 진지하구나?”
“당연하죠.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나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하긴. 내 눈 앞에서 지명이가 사라졌는데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우기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해. 하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소명이 물었지만 사이크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소명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칼 융의 동시성 이론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가 사이크는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져 이어진 핏방울들을 보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한창 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던 책상 앞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소명도 사이크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뭐가. 깨진 거야?"
소명이 물었다.
"그러게요."
"지명이가 흘린 피지?"
"그런 것 같아요. 밟았나봐요. 그냥 벤 것치곤 좀 많이 흘린 것 같은데."
"발등이 찢어졌나?"
"슬리퍼만 신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는데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어?”
“모르겠는데요.”
“돌아올 수는 있는 거겠지?”
“이 안에 들어있던 게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사이크는 바닥에 깨져있는 용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올 수는 있는 거겠지, 사이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네.’라는 말만 해 줘.”
“네.”
“좋아.”
정인이 희영에게 보이던 것을 보는 거라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사이크는 이해하고 싶었다.
소명은 사이크가 빨리 해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이크를 더이상 귀찮게 괴롭히지 않고 가끔 정인을 돌보기만 하면서 입을 꽉 다물고 기다려 주었다.
“칼 융은.”
사이크는 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인지 소명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 애매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칼 융은 동시성 현상이 무의식의 기능과 관련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융은 무의식이 의식의 조건을 상대화하는 기능을 내포한다고 생각했죠. 의식에 제약된 시간, 공간의 조건을 초월해서. 융은 우리 무의식의 심연에 초월적인 지혜가 존재한다고 했어요. 양의 발에 황소의 쁠을 가진 날개달린 존재인 필레몬이 자기에게 영적인 길을 가르쳐 주려고 보내졌다고 믿었죠. 융은 무의식이 어떤 선험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고 봤어요. 동시성 현상은 불규칙한 사건이 아니라 비인과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현상이라고 보는 거죠.”
기다리다보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이 한 마디 정도는 나오겠지, 하고 소명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동시성 현상을, 내적인 심리적 사건과 외부의 물리적 사건 사이에 의미상의 일치가 있지만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외적으로 전혀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는 사건들 상호간에 존재하는 어떤 규칙이라고 이해한다면요. 어떤 정신적인 체험이 물리적 사건과 공간과 경험을 달리하면서 비슷한 시각에 이루어지면 그 사이에 의미상의 일치가 통할 수 있다는 거죠.”
소명은 실소를 터뜨렸다.
“너는 지금 네가 지껄이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냐?”
“당연히 알고 하는 거죠.”
“나는 모르겠어.”
“어차피 내가 누나를 이해시켜야 하는 문제는 아니에요. 희영이 누나랑 정인이 두 사람이 같은 환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라고 이해해 버리든가요.”
소명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탈리아 신경생리학자가 원숭이 두뇌에서 발견한 거울신경에 관한 실험이…….”
사이크는 소명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말을 거두었다.
“됐어요. 나중에 지명이가 돌아오면 지명이랑 얘기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너야말로 내 생명의 은인이다.”
소명은 머리를 쥐고 흔들면서 말했다.
“이제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그것만 알려주면 좋겠어. 왜 그래야 하는지는 가능하면 생략해. 사이크. 나는 네가 정의 그 자체라는 걸 믿도록 하겠어.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나는 정말 네가 좋은 녀석이라는 걸 알고 기꺼이 네 수족 노릇을 해 주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지금 누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사람들은 죽었고 지명의 능력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상태에요. 지명의 능력이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하고 지명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야 돼요. 망할 비행기가 일단 떠야 되겠지만 그건 누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 대단한 오른 손으로 비행기를 들어서 일본까지 날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젠장.”
“기다리자고요. 나도 기다리는 건 젬병이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살 수 있겠지? 살아날 수 있겠지, 사이크?”
“지명은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것을 뛰어 넘어섰어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그래. 좋아. 아주 좋은 대답이야.”
소명은 정인에게 다시 이불을 잘 덮어주고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누웠다.
“자려는 건 아니고.”
“자요. 자도 돼요. 사실 잘 시간이 훨씬 지났잖아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깨워.”
“그럴게요.”
사이크는 두 사람이 누워있는 쪽의 불을 꺼주며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생존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 버리는 순간 그들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슬픔이 치밀어 오르려고 하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사이크, 나 자는 거 아니다!"
소명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사이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명의 심정을 사이크도 이해했다.
그 역시 똑같은 마음으로 소명에게 대답을 했다.
"저도요, 누나. 저도 아직 자는 거 아니에요."
히나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유우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쇼스케가 한 짓일까요?”
유우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젠이 한 짓이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잔인성을 따지자면 젠도 결코 쇼스케에 뒤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유우신은 알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쇼스케 짓이겠네요.”
히나타는 팔로 코를 막은 채 기선의 시신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능욕을 당한 채 죽어있는 남자의 시신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우신.”
히나타가 유우신을 불렀다.
멍하니 히나타를 바라본 유우신은 히나타의 눈빛이 변한 것 같다고 느꼈다.
“왜?”
“지금 정신을 잃는다거나 쓰러진다거나 하면 죽을 줄 알아요.”
“아! 응, 알았어.”
두 사람은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나는 바람에 놀라서 죽을 뻔 했다.
지명이었다.
지명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인이 무엇을 봤던 건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순간이동 능력 같은 건 없어요? 우리 전부를 데리고 돌아갈 방법은 없냐고요.”
유우신이 물었다.
이제 그 앞의 상황은 유우신에게 두려움보다는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바에도 몇 구의 시신이 있을 터였다.
“그런 건 없어.”
지명은 분노를 겨우 가라앉히고 말했다.
히로신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젠이 내려왔다.
히로신은 벌떡 일어섰다.
젠은 가까이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고 히로신을 불렀다.
“저, 저…요?”
히로신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그래, 너. 이 바보 같은 새끼야.”
젠은 짜증이 치민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짐 내려올 게 있어.”
상대가 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히로신은 당장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백 가지의 이유를 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젠이었다.
히나타였지만 히로시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빨리 해치워야 나를 보낼 수 있을 거야.”
그 말이야말로 히로시의 의욕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