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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놀이를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한테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졌을 때 손놓고 당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에요. 장 항 오빠나 선우 형 오빠, 사무장님, 변호사님, 그리고 우리들요. 우리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알았어. 무슨 말인지.”
“우린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요. 그냥 단순히 그 사람들이 생을 박탈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애도하지만 아미의 말처럼 우리가 그들을 애도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몰라요. 나는 그 사람들을 봤어요. 기선씨를 조롱하고 기선씨를 흉내내던 사람들요. 매번 우리가 그런, 조롱당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나요.”
“시영이 형이 했더라면 달랐을 거야.”
“할 수 있다는 거랑 할 거라는 건 얘기가 다르죠. 이 변호사님한테 그런 의지를 가지라고 강요할 순 없어요. 나라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거예요.”
“모르겠어. 쉬운 문제는 아니야.”
“아미를 보면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긴 했어요. 우리가 아미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
“아미의 과거는 모르지만 지금 아미가 하는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건 알잖아요. 사무장님 덕에요.”
“그렇긴 하지만.”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중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를 떠안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두 사람은 동시에 경쟁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숨이 떠돌이언정 그 시간에는 평화로웠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만에 그들은 거친 손길에 의해 그것을 박탈당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붙은 얼굴이 쓸렸다.
부러진 팔이 꺾인 채 가슴 밑에 깔려서 엉덩이에 올라탄 녀석이 추삽질을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굵은 살몽둥이가 메마른 살을 쓸어내는데도 그 고통을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항문 밑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드는 데 정액 같지는 않았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 자신의 피인 것 같다고 기선은 생각한다.
퉁퉁 부어오른 눈을 억지로 크게 떴다.
시야에 희영이 들어왔다.
그 옆에 아미가 누워 있었다.
문을 열고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그의 목에 칼이 들어와서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때 쓰러진 후로 계속 저 모습이었다.
아미가 첫 걸음에 칼을 맞은 후에 기선은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를 얻었다.
그의 공격을 받고 희영이 죽었다.
희영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차마 이겨낼 수 없었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어느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가장 큰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냥 사정을 해 버린다면 좋겠는데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허벅지에 힘을 주고 배를 들어 올리면서 절정의 순간을 또 한 번 뒤로 미루었다.
쇼스케가 그의 몸을 뒤집었다.
부러진 팔이 기이하게 꺾이며 주는 고통에 그는 기절을 할 것 같았다.
녀석이 그의 다리를 벌리고 제 가랑이 사이로 끌어 당겼다.
그의 눈에 여자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여자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쇼스케에게 쿠션을 던져 주었고 그는 사납게 그것을 기선의 허리 밑에 쑤셔 넣었다.
녀석의 성기가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기선은 정신을 잃었다.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의 주위에 아우라처럼 번지는 검붉은 피바다 위에 둥둥 뜬 채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직접 체크인 하고 짐을 풀었던 방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연우는 이상한 기분에 제 방 문을 놔두고 기선과 희영이 묵고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문 손잡이가 그대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는 보기 싫은 내면의 모습을 목도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주저했다.
이대로 두고 전력으로 달아나라고 마음 속에서 그가 외쳤다.
하지만 연우는 그러지 못했다.
“기선아.”
그는 대답을 듣기 전에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눈에 기선의 시신이 들어왔다.
‘대체 이게 무슨!!’
그의 얼굴에 주먹질이 가해졌다.
그가 쏟아낸 진득한 피를 밟으며 두 사람이 방을 빠져나갔다.
붉은 페인트를 찍어 만든 것 같은 발자국이 다정하게 이어졌다.
그는 마지막 호흡을 아꼈다.
죽어있는 기선의 품을 더듬어 그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뭐야!”
장 항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쳐요!!!”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는 눈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장 항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노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전환데요?”
선우 형이 물었다.
시영이 힐끗 그의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기선이에요?”
“연우였어.”
“연우요? 연우가 왜 기선이 전화로요?”
“올라가보자. 뭔가 잘못 됐어.”
“연우가 뭐라고 했는데요?”
시영이 물었다.
“도망치라고.”
“그 자식, 엄청 취했잖아요. 제대로 오줌도 못 싸서 바지를 다 버리고 옷 갈아 입으러 간 놈인데.”
시영이 웃었다.
하지만 장 항은 웃지 않았다.
“일어나. 정신 차려.”
이럴 때 바에 내려오는 게 아니었다고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바텐더는 험악한 인상의 두 남녀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영업시간이 곧 끝난다고 말을 해야 했지만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그런 아우라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곧장 장 항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래서 바텐더는 그들이 모두 일행일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겠다고 생각했다.
데리러 온 것일 수도 있을 테니 제 시간에 문을 닫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일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한 눈에도 야쿠자처럼 보이는 쇼스케가 장 항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장 항과 일행은 동시에 쇼스케를 바라보았다.
장 항의 목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오지도 못했다.
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을 때 선우 형과 시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눈 앞에서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그것도 목이 반이나 잘려서 살해되는 것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일어서지도, 달아나지도 못하고 있던 선우 형의 목에 따뜻하고 묵직한 감촉이 닿았다.
“흐억!”
순식간에 목이 비틀어졌다.
젠은 제 품에서 반 이상을 돌아버린 선우 형의 목을 내려 놓았다.
시영은 의자에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채 엉덩이를 끌면서 뒤로 달아났다.
“닫, 다, 다, 다가오지 마…….”
쇼스케는 자신이 그의 말에 묶여버린 것을 깨달았다.
“단번에 해치워.”
쇼스케는 소리치면서 칼을 젠에게 던졌다.
날아오는 칼의 손잡이를 발로 차 올려 제 손 안에 제대로 안착하게 한 후에 젠이 시영의 뒤에서 그를 갈랐다.
솜으로 가득한 곰 인형의 배를 가르듯이 주저함도 없었다.
쇼스케는 젠에게 모두 몇 명이었냐고 물었다.
“여섯에 은발의 백인 남자아이 한 명요.”
쇼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신고하러 간 것 같지는 않았다.
쇼스케는 바 뒤에서 잔뜩 웅크리고 숨어있는 바텐더를 찾았다.
“조장 쇼스케다.”
바텐더는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알려주지 말지.
그렇게 말한 이상 그 이름이 바텐더에게서 나오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을 쇼스케와 젠은 모두 알고 있었다.
칸트가 은발을 아낀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은발까지 죽여버렸다는 것은 조금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쇼스케는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로 했다.
프론트로 내려가자 젠의 눈짓을 받은 직원이 감시 카메라를 다시 작동시켰다.
준은 칸트의 뒷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칸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다른 박동소리도 들렸다.
칸트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준과 칸트의 아이가 칸트의 몸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칸트는 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의 곁을 떠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준은 칸트가 아미를 구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미가 일을 망쳐버렸는데도.
죽이라는 사람은 제대로 죽이지도 못하고 소란스럽게만 만들었는데도 그 아미를 구하고 싶어했다.
하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칸트는 아미를 어린 동생처럼 예뻐하면서 아미가 어렸을 때부터 제 손으로 키우고 싶어했으니까.
아미도 칸트를 따랐다.
아미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인간성은 칸트에게 배운 것이리라.
저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호기심과 사랑을 품은 채 건강하게 잘 자라라고 속삭여준 칸트를 아미는 애정의 원천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게 되어 버렸지만.
준은 칸트가 불안하게 서성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쇼스케가 아미까지 처리해 버린 것이 칸트를 미치게 하는 것 같았다.
준에게 쇼스케의 움직임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쇼스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거두는 동안 준은 그것을 모두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손 끝에 그 감동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칸트는 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칸트는 테오에게 연락을 취해보려고 했다.
아미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테오는 칸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한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쇼스케도 칸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에는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아미까지 제거해 버리라는 명령이 준에게서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에 칸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수족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미를 보내자고 준에게 말한 사람은 칸트였다.
칸트는 아미의 실력을 준에게 자랑하고 싶었고 준이 아미를 마음에 들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기가 아미를 사지로 내몬 격이 되었다.
죽을 곳으로 데려가려는 건줄도 모르고 칸트를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오던 아미의 모습이 칸트의 눈 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칸트는 절망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칸트를 주시하고 있는 준을 발견했다.
준이 칸트를 향해 다가왔다.
칸트는 그를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원망을 담기만 해도 준은 알았다.
칸트의 심장 박동은 칸트의 모든 솔직한 감정을 그에게 고해바쳤다.
심장이 칸트를 배신했다.
다가온 준이 칸트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들어올렸다.
칸트는 그를 미워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다면 말해. 너는 나한테 특별하니까 너한테는 선택할 수 있게 해 줄게.”
준이 속삭였다.
칸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눈망울은 눈물 때문에 부풀어 올랐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잖아요!”
“내가 밉지, 칸트.”
“얼마나 미운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알아. 상상할 수 있어.”
메마른 눈빛을 하고 준이 말했다.
칸트는 서러운 울음을 쏟아냈다.
먼곳에서 번개가 쳤지만 그 번개가 붉은 번개였는지 은빛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누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번개가 치면서 하늘에 틈이 생겼지만 어떤 것도 그리로 올라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틈으로 누군가가 이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교리를 가르치는 누구도 자기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지 않았다.
그저, 방금 친 번개가 붉은 색이었다는 것을 너도 봤냐고 물을 뿐이었다.
지옥에 남겨진 자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며 좌절했다.
또다시 지옥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