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28화 (2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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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되지 않은 카피를 만들었을 때 어떤 징계가 내려질지 선례가 없어서 알 수는 없었지만  유우신이 만든 카피의 존재를 알게 되면 쇼스케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를 살해할 거라고 유우신은 생각했다.

쇼스케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고 살의를 다스리는 기술이 늘 부족했다.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들을 바라보던 유우신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크게 비틀거렸다.

극심한 어지럼증에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온 천지가 그의 주위로 빙글빙글 돌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었다.

가끔 찾아와서 그를 실컷 괴롭히다가 흥미가 사라져야만 그를 놓아주고 떠나버리는 어지럼증이었다.

젠이 그에게 다가왔다.

물론 젠이 아니었다.

히나타.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유우신은 히나타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누가보더라도 그녀는 젠이었다.

“히나타.”

히나타가 유우신의 곁에 앉았다.

“젠의 카피를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그럼 이제 내 존재가 공식화돼도 되는 거네요?”

숨어있어야 하는 게 히나타에게도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처음 히나타를 만났을 때 유우신은 엉뚱하게도 자신을 역사소설가라고 소개했다.

“나는 소설을 쓰고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서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역사라는 덫, 이미 일어난 사실이라는 장벽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인물들이 비극을 맞이하게 돼도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아무 힘도 써줄 수가 없지요. 나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결말을 맺어놓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몇 시간동안 울어요.”

하지만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이라고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문장도 써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히나타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가 성형외과의라는 사실, 그리고 카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자신이 그의 은유를 오해하고 불쾌해 한 것을 사과했다.

그는 그야말로 역사소설가의 비극적인 운명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냘프고 창백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고, 그리고 ‘쉽게’ ‘쓰러졌다’.

멀쩡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자꾸만 옆으로 꺾는 일도 있었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은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서 있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지는 일도 많았다.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하도 많이 봐 와서 이제는 괜찮냐는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쓰러져도 그의 의식은 명확했다.

그저 그의 세계가 유우신만 홀로 놔둔 채로 울렁거리고 뒤틀리고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혼돈의 순간이 찾아오면 겸허하게 자신을 그 순간에 내던졌다.

눈을 감는 게 나을지 뜨는 게 나을지 그 답을 찾지 못해서 그 순간을 다시 지나게 될 때마다 그는 수 천번이나 눈을 깜박여댔다.

히나타는 그가 가진 흠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세계는 늘 붕괴직전에 있었다.

무너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주면 그는 드디어 엄마를 찾아낸 젖먹이처럼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히나타가 히나타였을 때 유우신은 섹스도 자위도 하지 않았다.

사정을 한 다음 날은 지옥을 경험하게 되어서였다.

바닥에 앉아서도 어지럼증을 이겨낼 수가 없었고 엎드려도 세상이 뒤집힐 듯 흔들렸다.

그는 육욕에 사로잡힌 짐승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다.

다음날이면 그 끔찍한 지옥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쾌락에 몸을 던질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쓰러져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생존을 향한 격렬한 애착으로 그가 틈 없이 자신의 손을 부여잡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냉소적인 유우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히나타가 젠을 덧입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꼼꼼하게 살폈다.

젠의 알몸을 본 적은 없었지만 타이트한 옷을 입었을 때 드러난 몸매는 사진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황홀한 눈으로 히나타를 벗겼고 성스러운 물건을 발견한 것처럼 감격에 겨워했다.

유우신이 그녀를 벗기는 동안 그녀는 몇 번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가 곧 스스로 멈출 거라고 생각했기에 강경한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히나타가 젠의 모습을 한 순간부터 히나타뿐만 아니라 유우신도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의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녀는 그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버거웠다.

그는 그 다음날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겪을지 알면서도 그녀에게 삽입하기를 원했고 주저 없이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히나타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비쳐도 그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도 아니면서 그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봐주며 미소 짓는 것은 황홀했으나 절정의 순간에 그가 부르는 이름은 젠이었다.

그녀를 흥분시키기 위해 그녀의 귓가에 흘려 넣는 고백도 모두가 젠을 향한 고백이었다.

히나타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인 말의 억양과 톤,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그런 것들을 전부 세세히 기억해낼 수 있었지만 정작 그의 고백을 받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쇼스케는 젠을 불렀다.

한국에서 온 일반인 몇 명을 처리하는데 젠과 둘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칸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그냥 죽이는 것만으로는 칸트의 화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쇼스케는 깨달았다.

쇼스케는 칸트가 준을 속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들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알아서 하라지 뭐.'

준의 대척점에 서게 되는 것만 뺀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젠의 표정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젠의 머리카락을 마구 날렸다.

쇼스케는 손을 뻗어 젠의 얼굴을 손안에 쥐고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젠이 그를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쇼스케는 젠의 카피를 생각했다.

카피라도 있지 않으면 그 공백을 견디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여자는 젠이 처음이었다.

***

기선은 한동안 시영에게 붙들려 있다가 이제 희영에게 가 봐야겠다면서 일어섰다.

기선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시영이 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나갔어.”

“알았어요.”

기선은 무슨 내통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희영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기에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었나? 희영인 어딜 간 거지?’

주변 지리를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아무 말도 없이 나간 것이 걱정됐다.

희영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스마트폰을 방에 두고 왔던 것이 떠올랐다.

‘젠장. 요즘엔 자꾸 잊어버려.’

기선은 문을 열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창가에는 보란 듯이 두 남녀가 엉켜 있었다.

기선의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은, 내가 남의 방에 잘못 들어왔나 보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방 안 여기저기에 놓인 가방을 보았고 그게 분명히 자신의 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저치들이 지금 남의 방에 와서 저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기선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엉켜있는 두 사람중 한 사람이 희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혹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기선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의 시선이 기선에게 얽혀들어왔다.

아미였다.

젠장!

아미의 손은 희영의 어깨에서 옷을 내렸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이 미끄러지면서 희영의 하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선은 저에게 처용의 기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작정 아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미를 붙잡아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어?”

태양을 똑바로 보려다가 어설픈 형상마저 놓치게 되듯, 그는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모든 것을 잃었다.

“우와, 정말 통하나봐.”

희영의 목소리였다.

놀란 기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희영은 침대 뒤에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너, 너, 뭐야? 왜, 거기에서 나와? 아미, 이 개자식은 어디에 있어. 어?”

그러면서 기선은 제 손을 보았다.

“옷은 언제 입었고? 이게 도대체 다 뭐냐고!!!”

희영이 침대에 벌러덩 몸을 던지면서 기선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능력. 다듬어 보면 내가 보는 걸 상대방한테도 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변호사님이랑 얘길 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전시키면 될지 감을 잡았거든요.”

“시영이 형이랑?”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는?”

“사실은 아미가 가장 많이 도와주긴 했어요. 우리가 딱 막혀 버렸을 때 아주 열정적으로 실험체가 돼 줬거든요.”

“실험체? 그 말은 들을 때마다 화가 나는데.”

“시각을 관장하는 부위가 어딘지를 설명해 주면서 정확하게 그곳에 명령을 내린다는 느낌으로 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환시를 보게 되는 원리를 알아낼 수 있으면 상대방한테도 환시를 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환시 뿐 아니라 환촉까지도요. 아미는 이 변호사님이 가진 능력을 이해했어요. 이 변호사님이 창틀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하면 그 명령에 저항하지 못할 거라는 것까지 깨달은 것 같더라고요. 아미는 내가 가진 능력도 그렇게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걸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떻게?”

“실제로 코카인에 취해 환시에 시달린 사람이 주변에서 같이 코카인을 하고 잠들어 있는 사람의 피부를 전부 벗겨 죽이고 자기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은 경우를 봤데요. 환시를 조종할 수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세세하게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거예요. 공격받는다는  망상을 심어주고 같은 편끼리 싸우게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어요. 뭔가가 몸 위를 기어다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할 수도 있을 거라는데 어땠어요?”

“그건 아직 안 되는 모양인데? 그런 느낌은 못 받았어.”

“환시는요?”

“끔찍했어. 정말 아주 아주 화가 났어. 화가 나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진짜 같았어요?”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 나를 속일 생각을 하다니 정말 나쁘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고. 얼마나 현실성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시영이 형이 나를 부른 건 이미 계획된 거였어?”

“네.”

희영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뭐가 그렇게 당당해?”

“당연히 당당하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요. 나도 공격에 가담할 수 있다고요.”

“뭐?”

기선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싶었던 거야?”

“당연하죠. 무력하게 견디기만 하는 건 정말 싫다고요. 불안에 떨기만 하는 건 싫어요. 맞서고 싶고 도움이 되고 싶고 구하고 싶다고요.”

“구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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