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27화 (2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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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 항은 그의 낙관론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수 백 명이 도둑 하나를 막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잖아. 방심하고 있다가 언제든 공격을 당할 수도 있어. 우선은 서둘러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돼.”

그러나 일본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명은 기선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아무 일이 없는 건지 확인을 했다.

애가 닳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와중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미만이 평온을 유지했다.

아미는 이들이 가진 능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여태껏 실험체 중에 그런 식으로 변이를 일으킨 사람들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제단 아래에 실험체들을 모아둔 연구실이 있어요. 거기에는 오십 여 명의 과학자들이 상주하고 있는데 환경에 대한 강화 실험 같은 걸 해요.”

“사람한테 직접 그런단 말이야?”

시영이 물었다.

“네.”

아미는 놀라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진하기까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칼도 거기에 있어요.”

“칼? 칼 맥브라이언? 1대 교주말인가?”

장 항이 물었다.

“그 사람도 과학자였어?”

희영이 물었다.

“아뇨. 실험체죠.”

“시… 실험체? 자기 아버지를?”

기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엔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요. 거기로 보내기 위해서 이단으로 몰고 조작하기도 하죠. 칼 맥브라이언은 후자의 경우고요. 준이 자란 후에 준은 세상이 칼과 공유하기에 좁다는 생각을 했데요. 그 얘기를 해 준 사람은 칸트에요. 아, 칸트가 나를 찾을지 모르는데.”

아미가 감상에 빠져드는 순간은 칸트를 떠올릴 때 뿐인 듯했다.

***

유우신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우신은 자신의 병원에 쇼스케가 들이닥친 날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쇼스케는 유우신이 두 달 전 쯤에 수술해 준 환자의 사진을 그에게 던졌다.

“네가 했다는데. 맞아?”

유우신은 그의 말투에 화가 났지만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마에 사선으로 길게 난 칼자국은 아슬아슬하게 눈 옆으로 빗겨나가 있었다.

실명을 간신히 피한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라.

유우신은 그런 사람이 가진 운을 보면 지레 눌려버리곤 했다.

유우신의 병원은 손님들로 북적거리지는 않지만 그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이 몇 번이고 다시 찾는 그런 병원이었다.

일단 유우신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의사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유우신의 환자들은 그렇게 점조직처럼 번지곤 했다.

그렇다고 환자가 많은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유우신은 자기가 신의 대리자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전혀 다른 얼굴을 선사받으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그런 유우신에게 쇼스케가 들이닥친 것이다.

쇼스케를 따라 들어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남자도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네가 한 게 맞냐고 물었잖아.”

유우신은 쇼스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

쇼스케가 말했다.

“예약 환자가 있습니다.”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이제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될 거야. 보수도 훨씬 많을 거고. 못생긴 여자들 상대할 필요도 없어.”

“나는 내 일에,”

“아, 됐고. 일어나서 밖에 있는 차에 타기만 하면 돼. 여기는 우리가 알아서 정리를 해 줄 테니까.”

당연히 유우신은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쇼스케의 손이 움직이고 그 손날이 유우신의 귓가를 스쳤을 때, 책상 위로 더운 핏방울이 줄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유우신의 머리에 혼돈이 일었다.

쇼스케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던 가느다란 칼날에 진한 피가 묻어났다.

차 안에서 쇼스케는 유우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설명을 해 주었다.

쇼스케가 모시는 조장에게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중 하나가 사고를 당해 죽었고 조장은 쉽게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조장이 흔들리자 조직 전체가 위태로워졌고 쇼스케는 유우신의 소문을 듣고 급기야 그를 찾아나서게 됐던 것이다.

“제가 할 일이라는 게 뭐죠?”

“조장의 여자들. 어차피 하는 일이라는 게 밤에 조장의 몸을 데워주는 정도일 텐데 똑같이 여분으로 만들어놔줘.”

“네?”

“어려울 것도 없잖아.”

“그렇다고 조장이란 분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훈련시킬 거야. 기본적으로 체격 비슷한 여자들을 골라서 똑같이 만들어 놔. 어차피 처음 시도되는 일도 아니잖아?”

쇼스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스케쥴에 쫓기던 유명한 여배우가 자기와 똑같이 수술을 시켜 달라면서 스타일리스트를 데려온 일이 있었다.

유우신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유우신은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 주었다.

그 일이 비밀리에 소문이 퍼져나가서 헐리우드에서도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유우신은 가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가십란을 달구는 스타들이 자기 손을 거쳐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조장이 유우신에게 만족을 했는지 어쨌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유우신이 거처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조장이 죽은 탓이었다.

쇼스케는 과감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다른 유력한 후보들을 누르고 그가 차대 조장에 선출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쇼스케는 심장마비로 죽은 조장의 뒤를 이으면서 많은 것을 개혁했지만 유우신만은 바꾸려 하지 않았다.

유우신은 쇼스케의 비밀병기가 되었다.

쇼스케에게는 여자들이 없었다.

동성애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끔 여자를 안기는 했지만 그 여자가 자위기구로 대체된다고 해도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심각한 일 중독자여서 섹스를 하는 도중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한참 허리를 움직여대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사정을 해버리고 여자를 내보냈다.

쇼스케가 조장이 된 후로 유우신은 더 많은 사람들을 카피해냈다.

거리의 거렁뱅이가 정재계의 인사가 되기도 했고 길에서 호객을 하던 창녀가 권력자의 가족이 되기도 했다.

쇼스케는 정원과 연못이 딸린 별장을 유우신에게 내주었다.

그곳에서 유우신은 쇼스케가 던져놓은 원본을 보고 그에 맞는 사람들을 찾아 얼굴과 몸에 그림을 덧씌우는 일을 맡았다.

다행히 쇼스케는 성격과 습관을 고치는 일까지 유우신에게 시키지는 않았다.

어느 날, 쇼스케 말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의 별장에 낯선 차량이 등장했다.

차에서는 중절모를 쓴 젊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테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어떻게 찾아왔냐는 유우신의 질문에 테오는 거리낌없이 자기가 할 말을 쏟아냈다.

“시체 하나를 가져다 줄 테니까 그 사람의 얼굴을 바꿔줘요.”

“시체요?”

유우신은 쇼스케를 처음 만났던 날 이상으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테오는 유우신에게서 거절이 나올 리는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사진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들어주면 됩니다.”

사진 속에서는 스무 살이 채 돼 보이지 않는 은발의 미소년이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 녀석이 지하철 폭파사고로 죽은 걸로 해 주세요.”

“지하철 폭파사고요? 그거라면 어차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시신이 다 조각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경우의 신원확인은 얼굴을 보고 대조하는 것도 아니고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폭파현장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죽은 걸로. 이 사람이 폭파현장에서 죽을 리는 없거든요. 자세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검시소에 우리쪽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유우신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조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얼마든지요.”

테오는 스스로 쇼스케에게 전화를 걸어서 유우신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줘, 유우신.”

쇼스케의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죽은 걸로 해 달라.

그렇다면 사진 속의 남자는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얼굴을 복사해 주는 것이 아니니 삶이 중첩되며 번거로워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부탁한단 말인가.

사진 속의 남자는, 죽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쫓길 운명인 걸까?

유우신은 미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칸트는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연단에서는 던칸이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바보들이 던칸에게 열렬한 환호를 하는 것을 보면서 칸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왔다.

“테오. 어떻게 됐어?”

“실험체를 만났어.”

“쇼스케를 말하는 거지?”

“그래. 유우신은 진짜 대단하더라.”

“그럼 아미는 공식적으로 사망한 게 되는 거지?”

“그래. 그런데 칸트. 준이 내린 지시인 게 맞는 거지?”

“그래.”

“좋아. 너를 믿어, 칸트. 너를 믿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만들지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래. 그래야지. 너를 믿기 때문에 준한테 확인하지 않는 거니까.”

“……고마워.”

칸트가 말끝을 흐렸다.

던칸이 칸트를 향해 손짓했다.

칸트가 무대로 나가자 환호성이 귀를 찢을 듯 드높이 치솟았다.

“‘붉은 번개의 틈’ 여러분.”

칸트는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쇼스케에게는 여섯 명의 부하가 있었고 그 부하들은 그들 자체로서 다시 수 백명씩의 부하를 거느린 조장이었다.

그 여섯 명 중에 젠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유우신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젠은 쇼스케의 여자라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자에 들었다.

쇼스케는 유우신에게 젠의 카피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젠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명령이 내려졌다.

“젠의 카피를 만들어줘.”

쇼스케가 말했다.

유우신에게 그 말은 경고처럼 들렸다.

젠과 마주치게 되면 격렬하게 그의 심장이 반응을 보였다.

얼굴은 붉어졌고 젠이 사라지기 전까지 젠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마음에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 많아졌다.

쇼스케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유우신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옆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우신이었다.

쇼스케는 그가 자신의 간곡한 경고를 알아들어 주기를 바랐다.

유우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젠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지금까지는 그 마음을 잘 숨겨오고 있었다.

감히 젠에게, 저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기에 젠의 행적을 미리 파악해 내고 자신을 숨겨왔다.

위험한, 끔찍하게 위험하고 치명적인 여자였다.

젠과는 절대로 엮여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젠을 처음 본 순간에 가슴에 새겨 넣은 유우신이었다.

첫 만남 때 쇼스케가 젠에게 그를 소개했다.

젠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젠이 그를 바라봐 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유우신은 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유우신은 자신이 독립기관의 수장이 아니라 그녀의 평범한 부하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젠을 예측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유우신으로 하여금 젠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우신은 젠의 카피를 만들었다.

쇼스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의 일이었다.

쇼스케의 명령 없이 쇼스케가 마음에 둔 여자의 카피를 만들어 곁에 둔다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젠을 향한 열망은 금기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쇼스케가 별장에 올 때마다 유우신은 홀로 긴장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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