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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미 그 앞에 와서 서 있던 열차를 두 대나 그냥 보내버린 후였다.
무슨 미련인 건지.
희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기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희영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거니?
세 번째 열차가 와서 희영을 유혹했을 때 희영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주었던 완벽했던 사랑에게서 떠나는 순간이었다.
희영은 캐리어를 끌고 열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떠난 후, 텅빈 역사에 헉헉거리면서 기선이 달려왔다.
그는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훑고 돌아다녔다.
하나 둘 씩, 다시 지하철을 타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선은 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연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공항에 가 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연우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기선의 머릿속에는 이제 희영에 대한 생각 말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였을까.
내가 원했던 건 뭐였을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 있다고 믿었던 거였을까?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나도 모르는 내 능력이 발휘돼서 내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말고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기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상처입은 한 여자를 남기는 것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초에 없었다고.
그가 가진 능력이라야 기껏 남의 능력을 각성시키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괜한 공명심에 사로잡혔던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지명이 당할 뻔한 교통사고를 막은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의 능력을 명백히 벗어난 문제였다.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지기 직전에 열차가 들어왔다.
기선은 제발 희영을 붙잡을 수 있길 바라며 열차에 올랐다.
주위를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재빨리 노선도를 확인했다.
공항에 가려면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얼마나 걸릴지, 희영과 지금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건지를 계산했다.
왜 이리 출발이 더딘가 했다.
일본의 문들은 모두 이렇게 게으르게 닫히나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렸고 천천히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텅 비었던 역사는 다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선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은발의 미소년.
분명히 희영이 말한 남자였다.
그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막대모양의 것에 달린 고리를 힘껏 잡아 뽑았다.
그리고 개한테 먹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열차에 가까이 다가와 틈새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누군가의 발에 닿았던 그것은 곧 바닥으로 굴러 좌석 밑으로 들어갔다.
무언가가 문 틈에 끼었는지 문은 한 번에 닫히지 않고 다시 열렸다.
“폭탄이에요. 십 초 후에 폭탄이 터질 거예요. 모두 밖으로 나가야 돼요!!”
기선이 소릴 질렀다.
그는 폭탄을 찾으려고 바짝 몸을 숙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치한이라고 소리치는 여자도 있었다.
십.
구.
팔.
희영이 말한 십 초를 전부 기다릴 수도 없었다.
문이 닫히고 있었다.
기선은 자기가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열차에서 빠져나온 기선은 제발 한 사람이라도 나오기를 바랐다.
손에 닿는 몇 사람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끌어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차게 그의 손길을 털어내고 심지어 발길질까지 했다.
역사에 있던 사람들은 기선이 열차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흩어졌다.
천형에 걸린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역겨워하는 표정으로 기선을 노려보는 사람들에게서 기선은 어떤 희망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멀리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기선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기선은 아미를 붙잡으려고 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축이 뒤흔들렸다.
쿠웅, 풍. 푸와아아아 푸붕!!!
희영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울지 않겠다고 작정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열차가 멈추자마자 도망치듯 내려서 미친 사람처럼 기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화 받아. 이 개 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 이렇게 죽어버릴 거!! 왜 나한테 왔어! 왜 나한테 말을 걸었어!! 버스정류장에서! 왜 나를 바라봤고, 이 나쁜 자식아. 이 개자식. 개새끼야!! 왜 나한테 그랬어. 왜 나한테……! 그냥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잖아. 그렇게 거지같은 인생 거지같이 살다가 죽어버리게 놔두지, 이렇게 만들어놓고 혼자 죽어버리면 내가 어떻게 살아. 이 나쁜 자식아!!!”
하도 큰 소리로 떠들어대서, 신호음이 그쳤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전화 잘못 건 것 같은데요. 죽은 사람한테 전화를 걸려고 한 모양인데 난 살아 있거든.”
“……. 여보세요?”
“미안해. 희영아. 돌아와줘.”
“…….”
희영은 더 크게 울면서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아껴만 두었던 욕을 한꺼번에 개방했다.
“꼼짝 말고 기다려요.”
“꼼짝할 수도 없어.”
“다쳤…어요?”
“아니. 아니야. 난. 아니.”
사고 현장은 끔찍했다.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선이 구르듯 내리고 나서 열차가 가까스로 출발을 하자 한껏 기선을 비웃었다.
“아까 그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
“폭탄? 폭발할 거라고? 그러더니 자기가 폭발하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떨어졌잖아.”
누군가의 말에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에 힘을 얻어서, 처음에 말했던 사람은 이제 기선의 말투를 과장되게 흉내내며 ‘폭탄이에요. 십 초 후에 폭탄이 터질 거예요. 모두 밖으로 나가야 돼요!!’ 라며 기선의 불분명한 일본어 발음을 조롱했다.
그들의 발 밑에서 짧은 도화선이 주황색 빛을 발하며 타들어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멍청한 얼굴에 조롱하는 웃음을 가득지은 사람들의 발 아래에서 폭탄이 터졌다.
기다릴 동안에는 죽은 듯 움직임이 없다가도 일단 덮치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는 아무 것도 사리지 않는 맹수처럼 컴퍼지션 4는 잔혹하게 그들을 덮쳤다.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폭발음에 사람들은 귀를 막으려고 했다.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팔을 들려고 했지만 그곳에는 팔이 붙어 있지 않았고 어차피 팔을 든다고 해도 귀가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화염이 지하철을 뒤흔들었을 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무너졌다.
가방과 핸드폰, 넘어진 사람에게서 벗겨진 신발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
찢어진 살덩이들이 공중을 가로지르고 날아가 지하철 창문에 들러붙기도 했다.
누군가의 팔이 다른 사람의 다리였던 살 옆에 붙었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열차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아미가 사용한 양은 비행기를 산산조각내고 그 유산탄을 날려버릴 만한 양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무의미했다.
기선은 정신없이 터널쪽으로 달려가려다가 아미가 달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거기 서!!”
아미는 기선이 좀비처럼 마지막 순간에 열차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어떻게 알고 빠져나온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역사에 있던 사람들이 기선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선은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은 아미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미는 전력을 다 해 계단을 거슬러 달려갔다.
기선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아미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기선이 사납게 몸부림을 치면서 범인은 은발의 저 녀석이라고 소리를 쳐도 기선이 외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호텔에 있다가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고의 징후를 포착하고 기선의 일행이 내려왔다.
선우 형과 연우가 먼저 내려오면서 아미를 붙잡으려 했지만 아미는 이리 저리 몸을 피하며 달아났다.
두 사람은 급히 방향을 트느라 뒤뚱거렸다.
아미는 시영을 봤지만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멈추지.”
시영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는.
연우는 시영이 그 단 한 마디로 아미의 발을 묶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젠장. 몸은 우리가 다 쓰고.”
뒤이어 내려오던 장 항이 상황이 해결된 것을 보고 아미의 팔을 거칠게 뒤로 잡아모아서 한 손으로 손목을 비틀어잡았다.
“으아아악!!”
아미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기선이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있어. 저 바보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장 항이 연우를 불렀다.
“이 자식, 붙잡고 있을 순 있겠지?”
“당연하죠.”
그래도 못미더웠는지 시영이 연우의 옆에 붙어 서 있었다.
장 항이 선우 형과 역사로 내려갔다.
“형!”
기선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장 항을 바라보았다.
분노할 방향을 잘못 잡는 것이 특기인 녀석들은 기선의 패거리라는 이유만으로 장 항과 선우 형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하철을 날려버린 화염에 비견할만한 엄청난 공포가 그들을 덮쳤다.
“흐어억!!”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감히 고개를 드는 인간이 없었다.
시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당신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곧 폭발했고 폭발음을 듣자마자 당신들은 그리로 달려간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일어서서 일제히 열차가 사라진 곳으로 향해 달려갔다.
한 두 사람이 선로로 뛰어내리자 그 후부터는 우르르 선로로 뛰어들었다.
선우 형은 고개를 들어 감시 카메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시영을 데리고 통제실을 찾아들어갔다.
시영의 공백은 이제 기선이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 거예요.”
연우가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 그 자식을 데리고. 어차피 희영이도 그리로 올 거잖아. 그렇지?”
장 항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던 기선에게 희영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럴 거예요, 아마도요.”
기선은 전화를 받았다.
희영과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는 기선을 장 항이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거 알고 있었던 거군."
"죄송해요."
"왜 우리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떤 열찬지 시간도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막지 못하면 형들이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장 항이 말했다.
제재없이 통제실에 들어간 선우 형은 시영을 그들 앞으로 밀었다.
“지금부터.”
시영은 시계를 보고 계산하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십 일분 전까지의 CCTV기록을 삭제합니다. 역사 내에 설치된 모든 CCTV의 기록이 삭제 대상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로.
기선 대신 시영이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면 희생자의 수는 크게 줄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희영은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택시를 잡고 호텔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기선의 방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희영이 도착하자마자 체크 아웃을 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미는 그들에게 끌려다니면서도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시영의 한마디면 그는 꼭두각시처럼 얌전해졌다.
희영이 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녀석에 대해서 알아봐 줘야겠어. 기선씨를 죽이려고 한 녀석이야.”
정인은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라 자신이 없었지만 어린 녀석이 기선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에 온 힘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