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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아…….”
희영은 그를 바라보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남겠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선은 희영을 붙잡지 못했다.
식사를 하러 가자고 테오가 찾아왔었지만 아미는 배고프지 않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
칸트가 알려준 실험체 중 도쿄대에 재직중인 남자가, 구하기 까다로운 물건들을 가져다 준 덕에 아미는 여러 가지 조합으로 가능성들을 따져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테이블 위에 재료들을 늘어놓고 신중한 작업을 시작했다.
호텔의 바는 한산했다.
희영의 앞에 놓인 잔은 내용물을 전혀 줄이지 못한 채 차가운 물방울만 겉에 만들어 흘려내고 있었다.
기묘한 모양으로 턱수염을 정리한 남자가 희영에게 추파를 던지려고 시도했지만 고개도 들지 않는 희영에게 수작을 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올리브만 들었다 놨다 하기를 수 십 번이었다.
희영은 결국 올리브도 내려놓고 프론트로 내려가 체크인을 다시 했다.
기선이 있는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희영은 초점 잃은 눈으로 문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흥분한 기선과 눈이 마주쳤다.
기선은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희영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희영을 그대로 지나쳐갈 뻔 했다.
희영을 찾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 바에 있는 건가 싶어서 바에 갔을 때는 희영이 그곳을 나온 직후였다.
기선은 미친 사람 같았다.
어떻게 희영이 자신을 그렇게 헤집어 놓을 수 있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영아!!”
그는 서러운 원망을 담아서 희영을 불렀다.
희영은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는 희영을 찾아다닌 것일 뿐 다른 대답을 주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기선은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친 동안 그 사실을 알았다.
“방을 다시 잡았어요. 거기로 갈 거예요. 기다리지 말고 문 잘 잠그고 자요. 나머지 짐은 내일 가지러 갈게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만.”
“희영아, 제발 이러지 마.”
“나는 영웅의 여자 친구가 되는 데는 관심 없어요. 기선씨가 수 백 명을 구하고 죽으면 그 수 백명이 나한테 한 마디씩이라도 위로해 줄 것 같아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로 위로받지 못해요. 우리 관계를 포기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기선씨에요. 생각이 바뀐다면 내 방으로 와 줘요. 어차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으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 기선씨가 와주면 좋겠어요. 조금은 나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네가 가치 없을 수가 있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대로 행동하게 돼 있는 거예요.”
지독하게 길고 어두운 밤이었다.
두 개의 방에서 두 사람은 똑같은 모습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초췌한 얼굴로 기선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정말 지하철역으로 가야하는 거냐고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기선 자신도 알지 못했다.
벨이 울리는 소리에 기선이 서둘러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잔뜩 기대를 담아 그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세요? 희영이니?”
그는 문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은 희영이었다.
기선은 허겁지겁 문을 열어주었다.
“희영아!”
하지만 희영은 냉정하게 뒤로 물러서며 그를 바라보았다.
“해 줘야 할 말이 있어요.”
“희영아…….”
“플라스틱 폭탄이라고 불리는 컴포지션4 같아요. 긴 막대모양으로 만들어진 폭탄이 지하철 안으로 던져지는 순간부터 불과 십여 초 만에 모든 게 끝나요. 그 안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게 던져지는 걸 보면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돼요. 폭탄이 던져지자마자 지하철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그걸 실은 채로 터널에 빨려 들어갈 거예요. 이 얘기는 해야 했어요…….”
“희영아…….”
“스무 살이 채 안 된 남자 아이에요. 백인이고 은발의 미소년이에요. 키는 훤칠하게 커요.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선지 얼굴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애는 천연덕스럽게 그걸 지하철 안으로 던져 넣으니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돌아서서 갈 거예요. 지하철 역에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 사람을 먼저 찾아내서 뇌관이 기폭되기 전에 폭탄을 뺏는다면 모를까 그 후에는 막을 방법이 없어요. 이걸로. 내가 할 얘기는 전부 끝났어요. 그럼. 건투를 빌어요. 괜찮다면 지금 짐을 가져가고 싶은데.”
“희영아……. 제발 다시 생각해 줘.”
"더이상 실망시키지 말아줘요. 화 내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애 쓰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거예요."
팬트라이트라는 질산염을 섞어 만든 C4에 전기뇌관을 달면서 아미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뇌관이 기폭되는 순간 폭발에서 발생되는 폭풍과 열이 도륙의 축제를 시작할 터였다.
C4의 폭발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가 넘었다.
강한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는 가방과 핸드폰이 흉기가 되기도 한다.
아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테오가 알려주었던 호텔로 갈 준비를 서두르면서 아미는 플라스틱 폭탄을 가방에 넣었다.
아미는 스마트폰에서 사진들을 확인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진을 보다가 아미는 기선의 사진에서 멈추었다.
준과 칸트가 왜 그 사람을 특히 신경쓰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런 일에 궁금증을 내는 것은 아미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을 오늘 날려버리면 되는 거잖아?”
아미는 경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지하철 폭파 사고에 집중되었을 때 저는 한 사람씩을 찾아다니며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아미는 간단하게 배를 불리고 침대 위에 뒹굴면서 칸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칸트.”
아미의 목소리가 가벼운 흥분으로 흔들렸다.
“아미, 준비는 잘 된 거야?”
“네, 칸트.”
“사람들은 도움이 됐어?”
“네. 필요한 걸 전부 가져다 줬어요.”
“생각했던 대로 잘 만들어 졌어?”
“네. 마음에 쏙 들 정도로요.”
“기분은 어때? 긴장되니?”
“아뇨. 로마를 불태우는 황제처럼 나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되는데 내가 왜요?”
“그래.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겠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거예요.”
“그래? 어떻게? 나한테도 그런 수가 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생겨도 칸트한테 돌아가겠다고 약속할게요.”
“……. 왜?”
칸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누군가 준으로부터 칸트를 지켜줘야 하잖아요.”
“방금까지 준의 침대에 같이 있었는데. 너는 겨우 몇 초 차이로 위기를 벗어난 거야, 이 꼬맹아. 준이 네가 하는 얘길 들었다면 웃고 넘어가진 않았을 거야.”
“칸트.”
“그래도 내가 천재의 첫사랑이 됐다니 영광인데?”
“그런 식으로 말할 거라는 거 알았어요.”
“정말이야.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 아미.”
칸트는 푸풉거리고 웃었다.
아미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녁에 다시 전화할게요, 칸트. 일을 전부 마치고 나서요.”
“좋아. 그땐 다른 호텔에서 전화하도록 해. 그리고 내일은 여기에 와서 나랑 같이 젤라또 가게들을 들쑤시고 다니기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꼭 약속 지켜.”
“칸트와의 데이트 약속인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켜야죠.”
“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천재야. 알지?”
“천재중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자중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글쎄. 그건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
칸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또르르, 청량하게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에 아미의 기분도 밝아졌다.
“속보를 들을 준비나 하고 계세요, 칸트. 전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그래. 조심해.”
아미는 욕실에 들어가 고조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나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기선이 머물고 있는 호텔과는 십 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아미는 느긋하게 그 길을 걸어갔다.
머릿속에서는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빈틈없이 떠올랐다.
부움!! 콰콰콱!! 푸웅, 퐈!!
터져오르는 폭죽처럼.
거기에서 깜짝 선물처럼 쏟아지는 신체의 잔해들.
그것은 아미를 소름끼칠 정도로 흥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 샤워할 때 간단히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해 버리고 올 걸.
지나치게 흥분을 하다 보니 자꾸 페니스로 피가 몰렸다.
결국 아미는 불편한 자세로 걷다가 기선이 머무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을 찾아 직행했다.
마지막 칸에 들어가서 몸을 부르르 떨며 제 분신들을 털어내 놓고는 얼굴 가득 흡족한 웃음을 걸고 나왔다.
그렇게 느긋하게 걸어 나오던 아미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훤칠한 동양 남자 하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미는 그가 기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의 능력이라는 것이 혹시 예지력 같은 거여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아미는 슬쩍 몸을 숨겼다.
하지만 기선의 안중에 아미는 없었다.
아미는 기선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다가 곧 그의 뒤를 밟았다.
기선을 직접 보고 나서 아미는 그가 대단한 미남자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완벽한 얼굴이 곧 형체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아미는 가슴이 뜨거워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시간을 뒤로 늦춘다는 것이 아미에게는 너무 견디기 어려운 형벌 같았다.
기선은 지하철 역을 향했다.
연우에게서 희영이 떠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쉬지 않고 달렸다.
희영의 곁에 남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하려고 희영의 방으로 찾아갔지만 방은 이미 비어 있었다.
방을 청소하던 나이든 여자와 눈이 맞춰져서 이미 체크아웃이 된 거냐고 물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고개를 과하게 숙였는데 말을 알아듣고 한 건지 어쩐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프론트에 내려가 확인을 하려는데 도중에 연우와 마주쳤다.
연우는 기선을 꾸짖고 싶은 마음을 참고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했다.
“지하철역으로 갔을 거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어. 오분 정도 놓친 거야. 뛰면 따라잡을 수 있어.”
연우는 기선의 걸음을 지체시키지 않으려고 기선과 같이 걸으면서 그 얘기를 해 주었다.
기선은 연우의 어깨를 한 번 잡고는 심호흡을 했다.
“행운을 빌어줘요, 형. 나는 희영이를 놓칠 수 없어.”
“당연하지, 이 바보야.”
기선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닫힘 버튼만 몇 번을 눌렀다.
문은 기선의 가슴을 다 태우고야 닫힐 생각인지 한껏 여유를 부렸다.
아래층까지 가는데도 더럽게 오래 걸렸다.
차라리 계단으로 내려가는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선은 은발의 남자 아이가 자기를 주시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희영이 말해주었던 녀석이 자기를 뒤따른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