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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항을 필두로 연우와 시영, 선우 형과 기선, 희영이 결국 최종적으로 일본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한 아이가 비행기에 탈 때부터 울어댔고 부모는 아이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아이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면서 사이렌 같은 소리를 계속 질러댔다.
희영은 비행기 창문이 열리기만 하면 창문을 열고 거기로 아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보다 못해 시영이 나섰다.
시영은 희영의 바로 뒤쪽에 앉아있던 부모들을 설득해서 비행기 꼬리 쪽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자리를 바꾸게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바꿔 앉아야 하는 건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바꿔 앉았다.
희영은 시영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와락 끌어 안아 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이는 여전히 울었지만 그나마 거리가 생기니 조금은 견딜만 해졌다.
자고 싶었지만 버섯구름과 섬광의 환영 때문에 희영은 도무지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저 녀석을 겁줄까?”
장 항이 말했지만 그건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인 것 같아서 차마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울면 안 되는 거라고 네가 설득해 봐."
연우가 시영에게 말했지만 희영이 말렸다.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다고 했다.
기선은 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손으로 귀를 막아주었다.
“기선씨.”
희영이 기선을 불렀다.
“응?”
“선택해야 될 때가 오면,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왜 그런 걸 물어? 아직 나를 몰라? 그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희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기선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희영이 물었다.
“아기가 울음을 그쳤어.”
“정말이네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절대로 안 그칠 것 같더니.”
“그러게요.”
희영은 잠을 청해보려고 눈을 감았다.
뒷좌석에서는 그때까지 빽빽 울어대던 아이가 중절모를 쓴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부모들조차도 그의 솜씨에 탄복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동안 눈도 깜빡거리지 않는 테오의 얼굴이 모자에 가려져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테오가 바라보는 대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테오가 몇 번 기선의 곁을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갔지만 기선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그 성실한 신문 배달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기선의 일행이 투숙한 호텔을 알아내고 테오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갔다.
칸트가 그렇게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했던 녀석은 늦지 않게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즉각 알아보았다.
테오가 쓰고 있는 중절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미는 테오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칸트가 테오를 설명하면서 썼던 모든 단어가 그의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네가 아미겠군.”
테오가 말했다.
아미는 테오가 안으려고 내민 팔에서 슬쩍 물러났다.
“아, 이건 네 방식이 아닌가?”
테오는 뻘쭘해하면서 웃었다.
칸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놓기는 했지만 아미는 테오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처음 보자마자 안자고 드는 건 아미 스타일이 아니었다.
테오는 아미에게 길을 안내하면서 칸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지 이 녀석 완전히 얼어버렸는데?”
“맞아. 해결못한 고소공포증을 여전히 안고 있어. 이번엔 준의 암시에 걸려들어서 비행기에 탔지.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미를 바꿔줘.”
아미는 칸트의 목소리를 듣자 서러움이 북받쳤다.
“우리한테 화가 난 거야, 아미?”
“칸트한테는 아니에요.”
“어린애처럼 굴지 마. 아미. 너한테 맡겨진 일이 뭔지 잊지 말고. 거기에 너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을 잘 찾아내고 도움을 받아.”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화내지 마. 아미.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니잖아. 안 그래?”
“…….”
“왜 그래, 아미. 기분이 별로니?”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보 같은 소릴 다 한다. 이틀도 안 걸릴 거야. 네가 좋아하는 걸 잔뜩 만들어줄게. 10층짜리 젤라또를 만들어 먹자.”
“11층.”
“그래. 11층. 12층이어도 돼. 대신 그걸 떨어뜨리면 옷은 네가 전부 빨아야 될 줄 알아.”
“으윽, 생각만 해도 벌써 손이 끈적거리는 것 같아요.”
아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어야 할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칸트의 앞에 준이 있었다.
“깜…짝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칠 뻔 했잖아요.”
칸트가 준의 가슴에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을 했다.
“아미를 보낸 일로 나한테 화가 나 있다는 거 알아.”
준이 말했다.
“아미는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말해줘요, 준.”
“당연하지. 아미는 무사히 돌아올 거야. 자살폭탄 테러를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아미는 아미가 만든 앙증맞은 폭탄을 멀리에서 던지고 돌아서기만 하면 돼. 폭탄이 터질 때까지 삼십 초 정도 시간이 있을 거고 아미가 뛰어서 도망치지 않아도 지하철이 아미에게서 전속력으로 달아날 거야. 걱정하지 마. 잘못될 일은 없어.”
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불안해?”
“모르겠어요.”
“아미는 바보가 아니잖아.”
“그러게요. 아미는 준이 만들어낸 천재죠.”
“그래.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칸트는 다시 한 번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믿기만 하면 정말로 아미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모두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주변 구경을 다니겠다고 서두르는데 기선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은 눈을 하고 나왔다.
“안 나갈 거야?”
연우가 물었다.
기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희영씬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시영이 물었다.
“네, 자꾸만 환영이 보이는 모양이에요. 희영이한테 보이는 환영이 어떤 종류의 건지 알잖아요.”
“그래. 끔찍하겠지. 우리가 뭔가를 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장 항이 말하자 기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서 즐겁게 놀고 오세요. 그러려고 온 거잖아요. 희영이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오라고 했어요. 자기가 다른 분들까지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해요. 저희 신경쓰지 말고 재미있게 노는 게 지금은 저희를 도와주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요.”
남은 사람들은 일제히 서로 눈치를 보았다.
“괜찮다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호텔에 있는 게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고요.”
기선이 눈을 찡긋거리자 ‘하긴.’이라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
장 항이 다짐을 해 두었다.
“네. 그렇게 할 테니까 어서들 출발하세요.”
기선이 객실로 돌아갔을 때 희영은 창가에 서 있었다.
“누워있지 왜 일어나 있어?”
희영이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기선씨는 약속했어요. 그렇죠?”
“응?”
“내 옆에 있겠다고요. 그럴 거죠?”
“당연하지, 희영아. 왜 자꾸 그걸 묻는 거야?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희영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희영아.”
기선이 희영에게 다가갔다.
희영은 머뭇거리다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희영아!”
“지하철 폭파사고가 있을 거예요. 모두 죽어요. 형체도 남지 않고요. 한 사람을 제대로 구성해내기 위해서 조각을 찾아내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사고가 날 거예요.”
“…….”
“…….”
“……언제?”
“내일인 것 같아요.”
이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볼 수 있게 됐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해결해야 할 너무 많은 문제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너무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리에 떠오른 탓이었다.
“어디에서?”
희영은 말없이 건너편의 지하철역을 내려다보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했잖아요!”
“희영아!!”
“남겨지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왜 기선씨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 사람들 전부를 지하철 역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비웃음거리가 되려고 하는 거죠? 비웃음만 받고 끝나는 거라면 그렇게 하라고 하겠어요. 하지만 거기에 있다간 기선씨가 죽는다고요!!”
희영이 소릴 지르며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거였어. 하지만 기선씨는 약속했잖아요.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지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아무 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면요. 기선씨는 아무 것도 변하게 할 수 없어요. 나한테 상실을 안겨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희영아!!”
“기선씨가 그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는 헤어지는 거예요. 그 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내가 떠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돌아오고 싶어도 기선씨한테는 걸어올 다리도 붙어있지 않을 거니까. 다리가 사라진 걸 보고 절망할 일도 없을 거예요. 슬퍼할 심장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
기선은 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을 향해 돌아서며 주먹을 날렸다.
“기선씨 곁에 있으면서 능력이 깊어지는 거, 이런 능력이 깊어지는 거, 싫었어요. 떠날 거였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떠나버리는 게 좋았잖아요.”
희영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고 더 얘길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결국 기선은 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희영도 알았다.
그렇게 될 거라면 상처를 남기는 일은 하지 말자고, 그게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일 거라고 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자리만 지켰다.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기선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로 희영에게 평생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희영이 일어섰을 때 그는 열망하는 눈으로 희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영은 말없이 옷을 갈아 입을 뿐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기선이 누구냐고 묻자 시영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자면 희영씨랑 같이 우리 방으로 올래? 튀김이랑 스시랑 잔뜩 사 왔는데.”
“아……. 형, 희영인 자요. 저도 자던 중이었고요.”
“아, 그래. 방해해서 미안해. 쉬어.”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기선이 돌아서자 핸드백을 들고 희영이 다가왔다.
“희영아,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거야.”
하지만 희영은 기선을 바라보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이 희영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아 기선은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희영아!”
기선이 희영을 만지려 하자 희영은 두 팔을 올리면서 그에게서 벗어났다.
“내가 기선씨라면 나한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내가 기선씨라면 기선씨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요.”
“희영아!!”
“나는 기선씨 추모비를 끌어안고 살 마음 없어요. 나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사람을 보낼 정도의 분별력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희영이 검정 색 펌프스에 발을 밀어넣는 모습을 보면서도, 지금 붙잡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선은 희영을 붙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