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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21화 (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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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아미를 가득 안아주고 아미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요.”

“보고 싶어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저는 준비 됐어요. 이대로 출발하기만 하면 돼요.”

이 어린 녀석이 실험실의 소장이었다.

누구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었다.

이제 열 여섯이지만 아이비리그의 대학 교수들과도 그 실력을 나란히 견줄만 했다.

“갈까?”

“네, 운전은 제가 할게요.”

“그래. 어차피 두 세 시간 동안은 차를 한 대도 못 만났으니까 네가 운전해도 상관 없겠지.”

아미는 칸트를 다시 보게 됐다는 게 감격스러웠는지 몇 번이나 칸트를 안았다.

이 열 여섯 살의 미소년이 폭발음과 유산탄, 떨어져 나가는 팔, 다리와 아비규환의 현장에 열렬하게 환호를 보내는 것을 칸트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미는 운전대를 잡고도 자기가 얼마나 앙증맞은 폭탄으로 어떤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는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아마도 아미에게는 너무 많은 정보를 처리해내느라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동조할 능력은 결여된 듯 보였다.

차가 준의 대저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동안 아미는 그곳에서의 추억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미의 무미건조한 음성에서 칸트는 아미가 그저 기억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일 뿐 좋은 추억을 되새기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미.”

칸트가 아미를 불렀다.

“네?”

“이곳에서의 생활. 그리웠어?”

아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어?”

“칸트는 보고 싶었어요.”

“준은?”

이번에도 아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은 널 좋아하는데.”

“칸트는 정원 가꾸는데 소질이 있었죠. 가끔 칸트의 정원이 생각날 때가 있었어요.”

아미는 정원에 눈길을 주면서 기술 좋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 준도 나한테 나이가 들면 정원사가 되라고 말하곤 해.”

꽃과 나무를 보살피는 칸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식물들이 추위에 얼어 죽을까봐 화분에 조심스럽게 옮겨 심고 따뜻한 곳에서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칸트를 보면 말할 수 없는 모순이 보였다.

그런 면에서 아미는 자기가 칸트와 동류라고 느끼곤 했다.

“저를 왜 불렀는지는 언제 알려주실 거예요?”

아미가 물었다.

“준을 보기 전에 나한테 대충이라도 듣고 싶은 거야?”

칸트가 묻자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니?”

“걱정된다기보다. 조금은 긴장이 돼요.”

“왜?”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서요.”

“너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잖아.”

“아이들을 상대할 때는 그렇죠. 하지만 준을 상대할 때는 그렇지 못해요.”

“아이들이라고?”

칸트가 웃었다.

“아이비리그의 교수들을 지금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거니?”

아미는 그러는 칸트에게 어서 얘기나 해 달라고 재촉했다.

“준은 사실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아. 준의 실험체들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아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죠?”

칸트는 고개를 저었다.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 말고. 준은 실험실이 좁다고 생각했어. 준의 통제력이라면 사람들을 굳이 실험실에 가두고 관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더 넓은 환경, 더 많은 변수. 준은 그 상황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일이 잘못 됐군요.”

“응. 서울에서. 이상한 일이지. 실험체들이 준의 통제에 따르지 않게 됐어. 저항을 시작했고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해. 생체에 명령을 내리고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가고 있어.”

“준이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겠군요.”

“응, 린다가 죽은 건 우연이 아니야. 준은 실험체들 때문에 화가 났고 자기가 여전히 많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했어. 그래서 린다가 희생된 거지.”

“칸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은 준과 칸트 말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준은 자기 통제가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실험체들을 회수할 계획을 세웠지.”

“그들을 죽이면 되는 거군요.”

“그래.”

“간단하네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야. 그들은 정말로 진화하고 있어.”

“어떤 식으로요?”

“한 여자는 우리를 들여다 봐. 그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는 몰라.”

“재미있네요.”

“재미있다고? 준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걸"

“아, 그렇긴 하겠네요.”

“이제 너도 긴장해야 될 거야. 준의 영역으로 들어왔잖아. 그리고 한 가지 충고하자면 이제부터는 준이 가까이에 있지 않아도 그가 네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걸 명심해야 돼.”

“도청이에요?”

“아니. 그의 청각이 하는 일이야.”

“설마요.”

“준이 자신의 감각을 어느 정도로까지 끌어 올렸는지는 나도 자세히 몰라. 하지만 준은 쉬지 않고 자신을 단련하니까. 준에게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생각하고 마는 게 좋을 거야.”

칸트가 웃었다.

“유용한 충고네요.”

웃고는 있었지만 아미는 벌써부터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연우는 카트를 밀고 긴 줄의 끝에 서 있었다.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면서 어느 줄이 더 빨리 줄어들지를 예상하다가 줄을 바꿔서면 연우가 포기한 줄이 순식간에 줄어들거나 줄에 끼어 있던 사람이 카트를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거나 했다.

“으이구, 열 받아.”

연우가 아직도 계산을 못 마친 것을 보고 선우 형이 여유있게 걸어왔다.

그의 팔에는 치즈볼이 대용량으로 들어있는 용기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선우 형은 오자마자 대뜸 그것들을 카트에 담더니 앞으로 밀고 나갔다.

“뭐하는 거예요, 형?”

연우는 놀란 얼굴로 그를 쫓아갔다.

그리고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선우 형이 지나가면 처음에는 불쾌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던 사람들이 일단 선우 형과 시선을 맞춘 후에는 형에게 길을 내 주었다.

결국 형은 맨 앞줄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만 들이고 계산을 마쳤다.

계산원도 형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돼!!”

연우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말도 안돼요. 나쁜 일이잖아요.”

연우가 앙알앙알거리자 선우 형은 지겹다는 듯이 연우의 얼굴을 밀어버렸다.

“공중도덕 얘길 하고 싶은 거야? 뭘 훔친 것도 아닌데 그만 하지?”

“그래도 이건 불공평하다고요. 전부다 나처럼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들인데.”

“그래서 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해? 나는 장 사무장한테 매일 이렇게 시달리고 살아야 되는데 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 잘 생각해봐. 그래도 저 사람들이 더 불쌍해? 내가 한 번 새치기 했다고 나만 나쁜 놈 같아?”

“에엥? 형이 저한테 시달리다뇨?”

“연우 넌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넌 정말. 일하다가 그게 습관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죄하는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게 아주 몸에 붙어버린 것 같아. 소명이 누나가 먼저 나서서 너를 한 번 확 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헉. 정말이에요?”

사실, 정말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연우가 거짓말을 분별해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누구도 연우의 앞에서 거짓말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선우 형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 너한테 있다는 능력도 신경 쓰이고. 도덕 선생님이랑 살게 된 기분이야. 짜증나.”

“정말 못 됐다. 어떻게 그런 말을 스스럼 없이 해요? 형이 하는 말이 전부 다 진심이라는 걸 아는 나한테.”

“그러니까 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만 좀 쫑알거려.”

선우 형이 그렇게 말해 놓고 웃었다.

연우는 뜨끔했고 일단 그의 말은 새겨두기로 했다.

주차장을 나가려다 보니 영수증에 적힌 금액이 무료주차를 이용하기에 충분한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 형은 이번에도 무사통과였다.

차단봉은 저항 없이 올라갔다.

“형이랑 같이 다니면 확실히 편하긴 하네요.”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건 불공평해. 연우 너는 나한테 도움을 받는데 나는 감시만 받잖아.”

그 말에 연우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정도 거짓말하는 건 눈 감아 줄게요.”

“약속한 거다.”

선우 형도 괜찮은 협상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지었다.

막상 일본으로 가기 위해 티켓팅을 할 때는 처음에 예상했던 수보다 몇 명이 줄어 있었다.

사이크는 선 사장에게 붙들렸고 지명은 사이크에게 붙잡혔다.

사이크는 지명에게 몇 가지 연구를 제의했다.

준 맥브라이언이 금속체를 통해 사람들을 조종했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지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정인까지도 지명을 사이크에게 군소리없이 양보해주었다.

연구에 매달린 두 사람은 완전히 딴 사람들 같았다.

선 사장은 사이크한테 그 일을 시키려고 잡아둔 게 아니었는데 사이크에게 퓨쳐 컨트롤 일을 해 달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디에 쓰는지 모를 기구들이 베리쳐 사무실을 개조해 임시로 만든 실험실에 들어찼다.

사무실 앞에는 베리쳐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지명과 사이크 두 사람이 실험 장비들이 가득 찬 선반 사이사이를 오가며 시트에 빽빽이 기록을 해갔다.

흰 쥐와 원숭이, 파리까지 갇혀 있었고 진한 액체에 잠겨 유리병을 채우고 있는 동물의 피질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을 살풍경하게 보이도록 한 것은 해골 바깥으로 뛰쳐나온 뇌들이었다.

그것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지명과 사이크가 갑자기 악마주의에 빠져들기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명과 사이크는 뇌 세포핵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과 과학적인 의미를 규명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흰 쥐의 작은 뇌에 약리적으로 강화시킨 물질을 주입하고 그들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지켜보았다.

경우에 따라서 바보 쥐를 만들기도 했고 두뇌활동의 수명이 거의 다한 쥐의 두뇌를 다시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사이크와 지명은 많은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였기에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가끔 고개를 돌려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으로 서로 전부를 이해했다.

뉴런과 뉴런을 강한 연결망으로 이을 수 있는 화학 성분을 발견해서 그것을 강화시키면 그들이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준 맥브라이언이 어떻게 사람들을 조종했는지를 풀지 못해도, 그들 자신의 능력을 한 단계 진화시킬 방법을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이크가 노린 것 중에는 또다른 것이 있었다.

지명이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더라도 제 후의 죽음에 관여한 기억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봉인됐던 기억이 각성된다면 준 맥브라이언을 절망하게 만든 능력도 각성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사이크가 가진 소망이었다.

지명은 실험을 마친 쥐에게서 뇌를 제거해내고, 죽은 쥐의 몸을 실험실 한쪽에 마련해둔 커다란 통에 담긴 흙에 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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