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 / 0101 ----------------------------------------------
그가 정인을 엎드리게 하고 정인의 뒤에서 들어 올 때는 그와 정인 두 사람이 서서히 절정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팔의 통증으로 정인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어 그에게 멈춰달라고 말해야 했을 때는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좌절까지 경험해야 했다.
다행히 그가 수완 좋게 정인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리며 행위를 이어가 주었다.
“많이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바로바로 말해야 돼. 알았지? 난 괜찮으니까.”
“나는 별로 괜찮지가 않아요.”
“아프지 않고도 즐길 수 있잖아.”
“모르겠어요.”
각각의 체위에 따른 변화에 민감했고 그때마다 기대하는 것들이 있었기에 정인은 점점 우울해졌다.
“그만할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삽입한 것을 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모두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가끔 페니스를 움직여 페니스가 계속 정인의 안에서 기운을 유지할 수 있게 하며 정인의 가슴을 만졌다.
흥분이나 쾌감을 떠나서 그 행위가 지극히 친밀하게 느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인이 누군가로부터 완전한 신뢰와 보호를 동시에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것이 정인의 안에 있는데 정인이 꺾어버리면 어쩌려고 한없이 정인에게 기대고 머무른단 말인가.
정인이 힘을 주어 조여주면 그의 잇사이에서 간지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정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정인의 체취를 맡았다.
그의 손바닥은 아기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정인의 가슴을 만지면서 뒤에서 다시 힘을 주며 깊이 들어왔다.
그를 안고 싶어서 뒤로 돌다가 두 사람이 모두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의 것이 꺾이는 고통 때문에, 정인은 상처 입은 팔을 갑자기 바닥에 내리누른 덕분에.
“섹스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안고 싶어요.”
그는 고통이 남아있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기는 했지만 웃어주었다.
정인은 아프지 않은 팔로 그를 안았다.
“여기가 종착역은 아니겠지만, 오래 오래 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오늘의 일이 떠오를 수는 있을 것 같아.”
지명이 말했다.
“나도.”
그 날은 자신들의 모습이 정말 너무 퇴폐적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힘을 다해서 사랑을 나누었다.
콘돔을 벗겨내고 지명이 정인의 아랫배에 뜨거운 정액을 쏟아낸 덕분에 정인의 몸이 번들거렸다.
씻어야겠다고 하는데도 지명이 고집을 부렸다.
“그냥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명에게 안긴 채, 처음에는 찝찝하다고 투덜대던 정인도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기가 들어 잠에서 깼다.
지명은 정인을 끌어 안은 채 자고 있었다.
정인은 제 눈 앞에 있는 사랑스런 남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 영상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다른 때 정인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필름 조각이 후두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상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지명이었다.
어린.
스무살 즈음의.
지명의 앞에는 지명만큼이나 어린 남자 아이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정인은 그곳이 기숙사 방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알약들이 놓여 있었고 그는 주저하는 눈으로 지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애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명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인은 그가 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명은 그가 약을 다 먹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고 토해내려 애쓰고 지명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지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지명이 약을 먹인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 아이는 지명에게 끝까지 애원하다가 약을 먹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그 아이는 지명의 강요로 자살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인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돌아서는 지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두 눈이.
그것은 현실이었다.
영상 속에서 빛나던 것과 똑같은 두 눈이 정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인은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명이 정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카락이 젖었어. 무서운 꿈을 꿨어?”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팔이 아파서?”
정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잘래?”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 나쁜 꿈 안 꾸게 내가 옆에 있을게.”
지명이 정인을 끌어 안았다.
정인은 그의 턱밑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명이 제 후를 죽인 거라던 제 도의 말이 옳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체 왜?
온통 의문에 싸인 정인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 정인아."
그리고 정인을 끌어 안았다.
그의 품에 갇힌 채 정인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제 후가 자살한 날.”
사이크가 입을 열었다.
“새벽에 지명을 봤어요. 지명은 자기가 그 시간에 분명히 도서관에 있었다고 했지만 아니에요. 나는 지명이 자기 기숙사인 커크랜드 하우스로 가는 걸 분명히 봤어요. 내가 본 사람이 지명이 맞다는데 모든 걸 다 걸 수 있어요.”
“지명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정인이 물었다.
“지명이는 아니라고 했어요. 지명이는 자기가 도서관에 있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지명에게는 진실이었을 거예요.”
“지명씨에게는 진실이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정인이 물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제 후의 자살에 자기가 관여된 게 아니라고요.”
“사이크는요? 사이크는 아니라고 믿어요?”
“내가 아는 건, 지명이 이해하는 사실이 그날 실제로 일어난 일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솔직히 관심이 없어요. 나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나는 그저 지명을 믿어요. 지명이 왜 그랬는지에 상관 없이요.”
사이크의 말은 솔직히 정인에게 충격적이었다.
정인은 지명을 사랑했지만 사이크처럼 무조건적으로 그를 믿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크는 정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한다는 듯이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생각해 본 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지명씨가 그냥,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뻔뻔하게 말 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 생각을 묻는 거라면.”
정인은 사이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상 두뇌에 기억을 억제시키는 메커니즘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망각의 메커니즘에 작용하는 효소의 생성을 돕는 유전자를 합성시켜서 기억억제제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죠. 망각에 관여하는 화학적 구조를 이해한 사람이 기억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지명이 그랬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명이라면 충분히 그 물질을 생성해낼 수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기억을 도려낸다고요? 하지만 지명씨의 경우엔 기억이 도려내진 게 아니라 다른 기억이 자리를 잡고 있잖아요.”
“그것도 할 수 있죠. 설명하기가 복잡하긴 하지만. 그리고 이건 가설에 불과합니다. 모르겠어요. 나도. 처음에는 지명이 스스로 망각에 관여했다고 생각했지만 준 맥브라이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난 후에는 그가 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솜씨 좋은 최면술사인 것 같고 지명에게 다른 기억을 주입하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울 것 같지가 않거든요. 제 후를 자살에 이르도록 조종한 것도 최면상태에서 벌인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어느 쪽이든, 지명이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건 변함이 없고요.”
“…….”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명에게 말할 겁니까?”
사이크가 물었다.
정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지명씨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쉽게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렇겠죠. 분명히 그럴 거예요.”
“제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정인이 물었다.
사이크도 고개를 저었다.
“제 후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지명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어요.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된다면. 지명은 절대로 견디지 못할 거예요.”
세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해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
정인이 갑자기 생각난 것을 말을 할지 말지 머뭇거리다가 사이크를 바라보았다.
“지명씨한테, 지명씨가 모르는 흉터가 있어요. 그냥 흉터도 아니고 수술자국 같았거든요. 지명씨는 그 자국이 왜 있는지 기억을 못했는데. 등에 있어서 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혹시 그럼.”
사이크가 연우와 정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지명씨도 금속체를 갖고 있었던 거군. 무슨 이유에선가 사후에 적출된 거고. 그리고 그 이유라는 건 제 후라는 친구의 자살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연우가 말했다.
“지명이가 그 일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해서 준 맥브라이언이 금속체를 적출한 걸까요?”
사이크가 말했다.
“하지만 왜? 그게 준 맥브라이언한테 중요한 문제였을까?”
“그러게요.”
정인이 말했다.
“범행이 기수까지 이르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는 경우에는 여러 요인이 있어. 외부적인 이유로 중지된 경우도 있고 후회 같은 자의적인 결정으로 멈추는 경우도 있지. 준 맥브라이언이 어떤 행동을 도중에 멈췄다라고 한다면 ‘후회해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
연우가 말했다.
“진행하는 도중에 뭔가 잘못된 거예요.”
사이크가 말했다.
“멈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항이 심했던 걸까? 아니면 지명은 암시에 걸리고도 준 맥브라이언을 기억해냈다거나.”
연우가 말했다.
“지명씨한테서도 능력이 발현됐을지 몰라요.”
정인이 말했다.
“그 능력이 뭐가 됐든 그게 준 맥브라이언한테 위협적이었다는 뜻이 되겠군.”
연우가 말했다.
준 맥브라이언에게 위협이 된 능력.
하지만 그들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칸트는 여섯 시간이나 운전을 한 끝에 괴상한 돔형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칸트가 그곳에서 데려갈 녀석이 고소공포증 앞에서 매번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칸트가 친히 운전을 하고 와야만 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더운 흙먼지가 올라왔다.
칸트는 여러 모로 기분이 나빴다.
아미가 태어났을 때 칸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아미는 어려서부터 독보적이었다.
아미는 빠르게 읽은 책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언제든지 그것을 활용할 줄 알았다.
그가 사제 폭탄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되기까지 아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무섭게 섭렵해나갔다.
칸트는 그런 아미를 귀여워했고 가까이에 두며 많은 것을 가르쳤다.
아미도 칸트를 따르고 좋아했지만 결국 자기가 칸트보다도 폭탄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칸트는 준이 아미를 말려주길 바랐지만 준은 적극적으로 아미의 꿈을 장려했다.
이곳에 실험실을 만들어준 사람도 준이었고 필요에 따라 던칸의 힘을 동원하기도 했다.
칸트는 준이 억지로 아미를 칸트로부터 떼 놓으려고 한 것 같아서 아미를 생각할 때면 준에게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미.”
칸트는 이십 명 남짓한 연구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은발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보지 못한 사이에 키가 훌쩍 자랐지만 앳된 기미를 아직 버리지 못한 아미가 칸트를 돌아보았고 이내 놀라움이 가득 담긴 환호를 하며 칸트에게 달려왔다.
“칸트!!”
“아미. 정말 많이 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