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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18화 (1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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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기적은 정말 사소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거야. 너처럼 사소한 사람들.”

“…….”

“솔직히 말해봐. 기적까지 필요한 상황은 아니지?”

“검사를 해 봐야 돼요. 귀에서 흐른 피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 그나저나 사람들은 전부 어딜 간 거예요?”

“파티준비를 한다고 마트에 갔어.”

“하필 이때.”

치료가 끝나갈 무렵 사이크가 소명을 바라보았다.

“누나. 누나 팔에 있는 금속체도 제거하고 싶어요? 금세 아물 텐데.”

“사이크, 너는 능력을 가져본 적 없지? 한 번 단 맛을 봤는데 그걸 포기할 사람은 없을 거야.”

“아뇨. 누나. 그렇지 않아요. 평범한 일상의 만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단 맛의 유혹을 거뜬히 이기고요.”

“나는 그럼 소수자네.”

“확실히 그래 보여요.”

복도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대로 사이크의 아파트까지 이어졌다.

정인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더니 곧장 재민이를 찾아 달려갔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이크는 환자와 자신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밀조밀 붙어 앉아서 뭐라도 해 보려고 안달이었다.

결국 사이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 항은 한참만에 눈을 뜨더니 자기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간들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야, 보기만 해도 덥다. 좀 물러나 앉든가.”

마지막으로 기선과 선 사장이 들어왔다.

그들은 커다란 케익 상자와 선물을 바리바리든 채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침대를 온통 붉게 물들여버리고 누운 장 항을 발견했다.

“형! 어떻게 된 거예요?”

기선은 손에 든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 했고 시영이 일어서서 그의 물건들을 받아 바닥에 내려 놔 주었다.

소명이 금속체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막에 예리한 절단면이 생겼어. 준 맥브라이언의 광기가 다시 시작된 거지.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왔고 제대로 걸어 들어오지도 못했어. 몸에 다른 손상이 간 건지도 모르고. 이곳에 이런 장비들이 갖춰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사이크가 미리 응급시설을 갖춰놔 준 덕에 여기에서 치료가 가능하긴 한가봐.”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사장님이 해 주신 거죠.”

사이크가 말했다.

선 사장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한테 쏠린 것도 모르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얼마나, 위험한, 거지?”

선 사장의 말에 장 항이 웃음을 지었다.

“사장님, 들려요. 다 들린다고요. 한쪽 고막은 성한 것 같거든요. 환자 앞에서 그런 살벌한 질문은 하지 말아줘요. 사이크가 가망 없다고 말하면 그 말이 저한테도 들릴 거란 말이에요.”

장항의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선이 이제는 모두 사이크에게 향했다.

사이크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기만 했다.

“아이가 혹시, 봤어?”

선 사장이 물었다.

역시 아버지라서 그게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

장 항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문이 열리고 지명과 정인이 들어왔다.

예기치 않았던 급작스런 통증이 장 항의 전신을 휘감았다.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생소한 통증에 그는 아랫 입술을 질끈 감았다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가줘. 모두들. 수치심 없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

장 항이 말했다.

선우 형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냥 소리 질러요. 아무도 안 비웃어요.”

장 항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거세게 밀려들던 해일이 슬금 슬금 기세를 주춤하는 것 같더니 맹위를 꺾은 채 스르르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스스로가 통증과 상황과 아이에 대한 근심과 불안한 마음에 잠식돼 있던 것을, 선우 형의 도움으로 거기에서 한 발을 빼내게 된 것 같았다.

사이크와 소명이 선우 형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선우 형이 장 항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선우 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선우 형은 정작 자기가 뭘 해야 하는 건지를 알지 못했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면 제 능력이 더 잘 발휘될까 하고 얼굴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힘을 줘 보기도 했지만 장 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형.”

연우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능력을 쥐어짜내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사이크는 장 항의 바이탈 사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오빠는 자기 안에 내재돼 있는 불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자극해서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던가 봐요. 오빠가 공격을 당하고 아이를 지키지 못한 채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빠 안에 있던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시켜서 오빠가 거기에 잠식돼 위험에 처했던 것 같아요. 오빠가 가진 능력이라고 했던 게 어느 순간 오빠한테 방향을 틀어서 오빠를 공격할 수도 있었던 거라는 얘기에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소명이 말하자 사이크가 수긍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 형이 가진 긍정적인 능력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힐링하는 데까지 갈 수 있는 것 같아.”

“그럼 저,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선우 형이 으쓱해서 말했다.

“그래. 대단해.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모두들, 고마워.”

장 항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이크를 바라보았다.

“나,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사이크는 모니터에 눈길을 주면서 괜찮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사이크, 금속체가 사라졌어. 그러면 내가 가진 능력도 사라지는 걸까?”

장 항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사이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는 말이다. 우리 중에 그나마 다른 사람을 공격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곤 소명이랑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가 능력을 잃는다면 견디기가 힘들 것 같아.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내가 모든 걸 망쳐버린 거잖아. 내가 아이를 보고 싶어 했다는 것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지킬 수도 있었을 기회를 날려버린 거야.”

“이거, 다시 박아 넣을까?”

소명이 말했다.

“어차피 인조뼈를 박아 넣긴 해야 할 텐데. 막 같은 거 말고 다른 걸로 감싸서, 준 맥브라이언 따위가 멀리에서 절단할 수 없는 걸로 잘 싸서 다시 넣어줘요? 이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래요?”

사이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농담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말을 지껄였다.

덕분에 모두는 혼란에 휩싸였다.

“우선은. 능력을 발휘해 봐요. 금속체 없이도 되는지. 우리가 겁에 질려서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서 자살해 버리고 싶게 한 번 만들어 봐요.”

소명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큰 실수가 될 뻔했다는 것은 금방 밝혀졌다.

선 사장이 먼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연우와 사이크가 무릎을 꺾은 채 비명을 질렀고 정인은 뒷걸음질을 쳐 벽에 등을 붙이고 제 머리를 감쌌다.

소명도 커다란 손이 제 목을 감아 쥐는 것 같은 느낌에 몸부림을 쳤다.

점점 그 강도가 높아졌다.

호흡의 곤란을 겪으며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선우 형은 폭설이 내린 현장에 맨 몸으로 던져진 것처럼 두 손으로 제 몸을 감싸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벌벌 떨었다.

희영은 옷장으로 들어가서 저를 보이지 않게 숨기려 했다.

시영은 귀를 막은 채, 그가 잘 하는 짓이며 줄곧 해 왔던 짓인 자살 시도를 하려고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만 둬요! 당장!”

기선이 소리쳤다.

장 항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박을 필요가 없다는 건 확실해졌군.”

장 항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날이 위력을 더 해 가는 소명의 오른 손이 그대로 장 항의 머리로 날아왔던 것이다.

장 항은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사이크는 겨우 살아난 환자가 자기 침대 위로 톡 떨어져 눕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해 보라는 걸 해 본 것 뿐이잖아.”

장 항도 자기가 한 짓이 심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소극적으로 징징거리다가 돌아누워 버렸다.

소명도, 왼 손으로 친 것도 아니고 오른 손으로 아주 작심을 하고 친 거라서 장 항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반성을 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사람들이 하나씩 장 항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가 장 항이 기선을 바라보았다.

“기선씨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네?”

“기선씨는 나한테 영향을 받지 않았잖아. 그렇지? 무섭지 않았지?”

“…….”

기선은, 무서웠던가를 생각해내려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지만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싱크홀 때도 그러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는데 기선씨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 선우 형은 그때 나한테 다가와서 손을 내밀기까지 했지. 그런 선우 형도 방금 전에는 겁에 질렸는데. 기선씨는…….”

“제가 원래. 겁이 없는 편이긴 해요.”

기선은 의미 둘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 씨익 웃어버렸지만 그 의문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지명이 기선을 팔꿈치로 툭 건들었다.

“혼자만 이것 저것 너무 많이 갖고 있잖아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소수자도 있는데.”

“너 같은 녀석이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니.”

희영은 상실감을 느꼈다.

장 항에게 일어난 일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자기 책임처럼 여겨졌다.

준이 사냥을 시작할 거라는 것까지는 알았으면서 정작 첫 타겟이 장 항이 될 거라는 것은 알아내지를 못했다.

희영에게 보여지는 영상들이 어떤 가치를 갖는 건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선의 팔이 부드럽게 그 어깨에 얹어졌을 때는 근심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막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중이지? 미리 알아내지 못했다고.”

작게 속삭였는데도 그 소리를 모두들 듣고 일제히 희영을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이야? 희영씨. 전혀 그런 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나 같은 잉여인간도 이 괴물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버티려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연우가 말했다.

그야말로 시의적절한 충고 같았다.

"마음 쓰지마.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야."

기선이 말했다.

"그래. 희영씨 때문에 우리가 대비할 수 있었잖아. 희영씨가 아니었다면 내 눈빛만 보고 내 팔에 칼을 쑤셔 박아줄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을 거야. 소명인 주저하지도 않고 내 뼈를 드릴로 깎아내버렸다고. 금속체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이긴 했지만 조금은 즐기는 것 같던데?"

장 항이 열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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