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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은 이제 정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장 항 역시 거기에 동참했다.
정인은 웃으면서 자신의 능력은 동족 사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고 안심을 시켜 주었다.
“그래. 아주 좋은 현상이야. 우린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가족한테 능력 쓰면 안 되는 거야.”
소명이 말하자 장 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이 웃음을 짓자 연우가 따라 웃었다.
정인은 자기가 거짓말 한 것을 연우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잠깐동안 찾아왔던 평화로운 분위기는 연우의 그 주책맞은 웃음 때문에 깨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장 항도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다.
자기가 복서의 공포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그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지만 아이는 언제 오냐는 지명의 질문에 감정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틀 후. 공항으로 데리러 갈 거야.”
아들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그는 180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부정적인 감정도 그를 오래 붙들어 둘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형이라고 불리는 선우 형은 장 항의 아들을 위해서 깜짝 파티를 준비하자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어떤 게 좋겠는지 아이디어를 짜 봐. 형한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이번에 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아들인데.”
도대체 선우 형의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그의 이름을 형이라고 지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가지는 기능을 그의 이름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장 항과 소명은 형을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분한 생각이 들었고 그 밑의 사람들은 형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죄책감을 가졌다.
가끔은 형조차도 장 항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제가 지금 누구를 부르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연우와 시영은 일이 해결되면 법원에 개명신청부터 하자고 별렀다.
일이 해결된다라.
과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건지.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만 하면 일순간 적막감이 감돌았다.
칸트는 준이 이제 탈출한 원숭이들에 대한 분노를 거둔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준이 그들에 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준은 단 한 순간도 그들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칸트.”
칸트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면서 준이 속삭이듯 그 이름을 불렀다.
“네?”
“뉴저지에 붉은 번개를 내려.”
“네.”
“붉은 번개의 틈으로 몇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요?”
“쓸만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원숭이 사냥을 하러 가게 되는 거군요.”
“음. 쓸만한 사람들이어야 해.”
“생각해 두신 사람들이 있어요?”
“몇 몇.”
“제가 몇 명 추천해도 될까요?”
“좋아.”
“모두 몇 명이나 생각하고 계세요?”
“붉은 번개가 쳤을 때 여러 사람을 미리 빼돌려 놓는 게 좋겠지.”
“알겠어요.”
“그들을 훈련시켜.”
“시간은 얼마나 주실 건가요?”
“2주면 충분하겠어?”
“2주면 충분해요.”
“그래. 좋아.”
준은 칸트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칸트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생명이 그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이 말했다.
“네?”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야.”
“어떤 걸요?”
“막을 형성한 녀석. 내 소리에 귀를 막아버린 그 발칙한 원숭이.”
“장 항요.”
“그래. 장 항.”
“막이 완전히 형성됐잖아요.”
“장 항의 고막이 찢어지고 귀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강력한 신호를 보내보면 어떻게 될지 보자고. 고막을 찢는 음파가 허접한 막을 뚫지 못하겠어?”
“…….”
“왜 그러지, 칸트?”
칸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준은 칸트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제 뱃속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는 칸트가 이미 모성애를 품고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게 싫은 거지?”
준의 말에 칸트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준이 내리는 명령에 반감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명령에 대해서만은 자꾸만 거부감이 생겼다.
준이 몸을 일으켰다.
“준…….”
칸트는 준의 등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깊게 마음에 두지 마. 알았어, 칸트?”
“네…….”
칸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네, 명심할게요.”
준은 칸트를 보고 웃어주었다.
“너는 나한테 소중해. 너를 다치게 하지 마라. 내가 너를 해치지 않게 하라고.”
칸트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 항은 잠시도 재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명은 그런 장 항이 낯설고 신기했다.
“아이가 예쁘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던데 정말 그래요?”
소명이 장 항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 아기 때 움직임이 전혀 통제가 안 될 때 너무 예뻐서 바짝 붙어서 구경을 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다가 애 손가락에 내 눈이 찔렸는데 엄청 아프더라고.”
“네에?”
소명이 웃었다.
엉뚱한 그의 말에 한참을 웃다가 장 항이 또 재민이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웃음을 멈추었다.
“보내고 나면 어떻게 견뎌야 할지, 그 생각을 하고 있죠?”
소명의 말에 장 항은 놀란 듯 어깨를 움찔했다.
“맞죠?”
“응, 멍청한 짓이라는 거 아는데 자꾸 그 생각을 하게 돼. 안 할 수가 없어. 정말, 너무나 헤어지고 싶지가 않아. 그런데 아이를 위해서는 보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영리한 애에요. 아빠 마음을 알 거예요. 그리고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소명은 말을 하고 나서 주위에 연우가 있는 건 아닌가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런 소명을 보며 장 항이 웃었다.
“너도 그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거짓말은……. 아니죠. 아니지 않아요?”
“그래. 나도 그게 거짓말이 아니길 바라고 있어.”
재민이는 정인을 잘 따랐다.
아주 쫄랑쫄랑 따라다니면서 거의 온종일 정인을 귀찮게 했는데 정인은 그런 아이를 지겨워하지도 않고 잘 놀아 주었다.
지명은 정인을 아이한테 뺏겨버린 기분을 달래려고 사이크와 어울리곤 했다.
사이크는 퓨쳐 컨트롤의 주식이 한 달만에 이십 만원이나 올랐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른 회사의 주식들이 곤두박질치면서 돈이 공중분해되는 와중에 홀로 이루는 장엄한 승리였기에 더욱 가치가 컸다.
확실한 주가방어가 이루어지는 퓨쳐 컨트롤의 주식은 이제 금보다 더 수익성이 뛰어난 투자처로 명성을 얻었다.
“미래 누나하고는 어때?”
지명이 물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해야겠지.”
“다행이야. 네 얼굴이 밝아져서 좋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미래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다니.”
사이크가 차분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재민이가 고릴라 인형을 마음에 들어 하길 바라면서 인형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귀를 찢는 소리가 들린 것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 앞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자기 귀를 찢을 듯이 잡아당기며 쓰러질듯 쓰러질듯 겨우겨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장 항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현관 문이 열렸고 그 틈으로 겁에 질린 재민이의 얼굴이 보였다.
장 항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한 쪽 무릎이 푹 꺾였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누나한테……, 누나 집으로 가고 있어!! 소명이 누나 집으로!!”
사이크는 재민이에게 달려갔고 지명은 장 항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장 항은 핏줄이 터져서 새빨갛게 붉어진 눈으로 지명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괴물에게 사로잡힌 것 같은 그 형체 속에서 유일하게 그의 눈만이 지명을 알아보고 그에게 부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는 자기를 내버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지명은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사이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재민이를 지켜.”
지명이 말했다.
장 항은 몇 번이나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소명의 아파트로 향했다.
지명은 장 항의 귀에서 진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장 항은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장 항이 문을 두드리자 소명이 문을 열었다.
소명은 장 항의 모습을 보고 급히 숨을 들이쉬며 뒤로 물러섰다.
“팔에 있어. 단 번에 노려줘.”
장 항이 한 말은 그것이 다였다.
지명은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 항은 팔을 입에 물었다.
소명이 장 항의 다른 팔을 잡고 칼을 찔러 넣는 것을 보면서 지명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현관 공구상자에서 드릴을 가져오라는 말에도 지명은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소명이 장 항의 팔을 내려놓고 드릴을 가져왔다.
우위이이이이잉!! 드기이이익, 드기이익, 드긱, 드긱, 드긱.
뼈가 갈려나갔다.
장 항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이로 문 팔에는 검붉은 자국이 퍼져나갔다.
금속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장 항은 무릎을 꺾고 무너졌다.
드릴을 거두며 소명이 장 항을 자기 품에 받아냈다.
“정신 차려, 이 멍청아. 이거라도 받아!”
소명이 지명에게 소리질렀다.
소명은 닿기만 했다면 지명을 발로 걷어찼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지명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소명의 다리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지명은 퍼뜩 정신이 들어 드릴을 받아 치워놓고 사이크를 불렀다.
사이크가 달려와서 장 항을 살폈다.
“세상에. 세상에…….”
그는 그 말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다행히도 손까지 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별 것을 다 갖추어 놓은 자기 아파트로 장 항을 옮겨달라고 소명에게 부탁해놓고 소명과 지명이 장 항을 데려갈 동안 그를 치료할 준비를 해 두고 기다렸다.
소명이 비닐을 깐 침대 위에 장 항을 눕히고 손을 펴 보였다.
번데기처럼 여러 겹의 막이 금속체를 막고 있었고 그것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절단된 흔적이 보였다.
“준 맥브라이언!!”
지명이 소리쳤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재민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아빠…….”
장 항은 그 말에 눈을 떴다.
소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 어때 보여?”
장 항이 형편없는 얼굴을 하고 소명에게 물었다.
“최고의 아빠처럼 보여요.”
소명이 말했다.
“연우가 아니라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다 알겠다.”
장 항이 말했다.
그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가 달려오는 것을 지명이 가로막으며 아이를 안아올렸다.
“아빠가 건강해 질 수 있도록 형이랑 기도하고 기다리자. 그럴 수 있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명의 어깨 뒤로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재민이는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 죽을 거지?”
재민이가 물었다.
“안 죽어.”
장 항이 말했다.
“누네띠네도 같이 먹을 거고?”
“그래. 메이플을 혀에 대고.”
“부스러기가 떨어져도?”
“응.”
재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약속을 지킬 사람이라고 아이는 믿고 있었다.
사이크는 차마 아이를 보지 못했다.
“이 오빠를 거짓말쟁이가 되게 하지 마, 사이크. 부탁할게.”
소명이 말하자 사이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가 천재긴 하지만요. 신은 아니거든요.”
“네가 신이길 기대하지 않아. 그냥 기적을 보여주기만 해.”
소명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