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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돼. 이제부턴 내가 할게. 너는 나한테 마중물이 돼 줬으니까 그걸로 족해. 남은 건 내가 할게.”
소명이 웃었다.
그를 보니 웃을 힘이 났다.
웃을 힘이 났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베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겠다고 소명은 결심했다.
진한이 소명에게 머물 곳을 소개해 주었다.
진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조직에 진한은 소명의 보호를 부탁했다.
진한의 부탁이 있었기에 아무도 소명을 건들지 않았다.
진한이 소명을 숨기자마자 즉각적으로 문태성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늦은 오후, 지방에서 취재원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기자의 차가 한적한 국도에서 불길에 휩싸였다.
진한이 소명을 찾아갔을 때 소명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소명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소명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소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진한이 아니었다면, 그때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명은 그의 앞에서 자신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자신을 내 주기 위해서 무언가를 풀어내는 그 순간, 과거에 봉인해 두었던 망령들이 같이 쏟아져 나와 그녀를 질식시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달아나고 싶었던 과거에 발을 들여 놓는 대신, 그 시간에서 괴물만 끌어 내다가 태워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명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화 통화만으로는 소명의 상태를 민감하게 알아내는 것이 어려워서 진한은 직접 소명을 찾아왔다.
소명은 진한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위험할 만큼 너무 들뜬 모습이라고 진한은 생각했다.
“조금은, 냉정해져.”
그가 말했다.
“그래야겠지. 정말 그래야 할 텐데.”
“넌, 혼자 있는 게 아니야.”
소명의 흐릿한 눈을 바라보며 그가 소명의 시야로 들어갔다.
“날 봐. 나를 바라봐. 그리고 네 고동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해. 냉정을 잃는 순간 모든 걸 망치게 될 거야. 내 말이 맞아.”
“알아. 고마워.”
소명을 가슴에 안자 소명의 가슴을 두드리는 격렬한 고동이 그의 것까지 밀쳐낼 듯 두드렸다.
열에 들떠 벌어진 입술에 가만히 혀를 밀어 넣었다.
피식, 소명이 웃었다.
진한은 늘 고요하고 느리고 차가웠다고 소명은 생각했다.
그렇게 남자를 잡으러 갔다.
그리고 세정기로 위장한 통에 구겨 넣어 남자를 승합차에 실어다가 가학성애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차가 퓨쳐 컨트롤 앞에서 신호 대기를 받고 멈춰 서 있었을 때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선 사장의 눈에 전화번호가 눈에 띄었고 선 사장은 잊기 전에 전화를 해서 빌딩 청소를 예약해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러 꼼꼼하게 저장을 해 두었다.
그런대로 위로가 되었다.
남자의 이가 뽑혀지는 것을 보면서.
애널이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를 보면서.
이야기를 마치면서 소명은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소명이 한 마지막 말 만큼은 거짓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남자가 당하는 고통을 보는 것이, 소명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감히 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한 것처럼 한 밤중에 피자와 치킨이 배달되었다.
서로 누가 시킨 거냐고 쳐다보는 와중에 정인이 나가서 묵묵히 계산을 했다.
“이런. 센스쟁이.”
소명이 정인의 목을 한 팔로 와락 감고 장난을 걸자 정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캑캑거렸다.
“아, 미안. 힘 조절도 안 되는 팔로 장난을 쳤다.”
“네에.”
정인은 소명의 오른쪽으로 어슬렁거려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인을 보면서 모두가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소명이 너무 큰 비밀을 털어 놓은 후라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큰 벽이 어느 순간에 허물어져 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시영은 별 것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닭다리 하나를 뜯으면서 얘기했다.
지루한 수험생활.
시험 운. 합격.
대인기피와 죽음에 대한 열망과 강박증.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연우였다.
시영은 연우가 자신의 삶에 빛과 등대, 그리고 이것 저것, 심지어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전부 다 돼 주었다고 했다.
“아, 여기에서 꼭 밝혀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데 시영이도 나도 정기적으로 여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연우가 변명을 하듯 말했다.
“그런 말이야말로 의심스럽다.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두 남자가 여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표현을 쓰다니.”
선우 형이 말하자 일제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솔직히 말할게요. 여자를 오래 사귀는 건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만나는 여자가 없다는 얘길 하면 사람을 이상하게 보잖아요. 그래서 계약관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어요. 그냥 그런, 그러니까 그런, 가벼운.”
연우는 도무지 말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헤맸다.
“됐어. 대충 적당히 끝내.”
보다못해 시영이 말했다.
“형은 어때요? 형 형요. 선우 형 형.”
연우가 화살을 형에게 돌렸다.
“형이라고 말해도 안 때릴 테니까 그냥 한 번만 불러라.”
“그러니까 형은 어떠냐고요. 만나는 여자 있어요?”
“응.”
“그게 다는 아니죠?”
연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야.”
뭘 해도 안 되는 날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숙였고 소명이 연우의 머리를 헝클면서 위로했다.
“이 변한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그건 내가 봤지."
사람들은 소명이 갑자기 이 변이라고 하자 그 말을 이 변호사의 준말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이변이라고 생각하다가 웃었다.
"제민혁이 자살한 날. 이 변이 경찰들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그 사람들을 설득했어. 누가 보더라도 선 사장님한테 의혹의 시선이 쏠릴만한 상황이었는데 이 변호사가 그 사람들을 전부 이해시켰어.”
소명이 말하자 기선과 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소명의 이야기를 스스로 이어갔다.
“그 후로 좀 더 세밀해진 것 같아요. 다행히 나한테는 안 통하는 것 같은데 시영이는 이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약한 정도기는 하지만 조종까지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사이크, 너는 이 닭 뼈다귀들을 입에 물어야 돼, 알지? 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걸로 그런 짓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 같다는 거죠.”
연우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그게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그건 정말 굉장한 거잖아?”
선우 형이 소리쳤다.
선우 형은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솔직하게 열거했다.
“은행에 가서 창구에 있는 여직원들한테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돈을 전부 꺼내고 뒤로 물러서라고. 그러면 순식간에 은행을 털 수도 있겠는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시영이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교하진 않아요.”
“뭐가 문제야? 지금부터 기선씨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라고.”
하지만 기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우 형 형이랑 이 변호사님이 가진 능력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언어를 매체로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건가?”
연우가 말했다.
“우리가 여권을 잃어버린 채로 공항에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선우 형 형이랑 같이 가면 검색대를 무사하게 통과할 수도 있을 거예요. 상황을 설명하거나 부탁을 하지 않아도 말이죠.”
기선은 자기가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대신 시영이는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하지. 시영이 네 능력은 좀 후진 것 같은데?”
연우가 그렇게 말하자 시영이 발끈했다.
“그래도 구체적인 일을 지시할 수 있는 건 나잖아!”
시영의 그 말에 모두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줄곧 남이 차려주는 밥그릇에 고상하게 숟가락만 얹다가 드디어 자기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밥을 퍼담은 꼴이었다.
“왜……. 왜요?”
시영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형이 그러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지명이 웃으며 말했다.
“보기 좋네요. 혼자만 고상한 척 입 다물고 있을 땐 얄밉더니.”
희영이 직격탄을 날렸지만 시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그래도 믿고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시영의 말에 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명씨도 이렇게 달라졌잖아요. 지명씨가 처음에 어땠는지 안 봐서 그래요. 지명씨는 주위에 몇 사람만 모여들어도 땀을 흘리면서 호흡곤란을 겪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었네?”
유독 그런 말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랬더라는 말이.
그들은 어느새 자기들이 그렇게 바뀐 건지 놀라워하곤 했다.
“저도 그럼 살짝 소개를 하고 넘어갈까요?"
기선이 말했다.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 어렵긴 한데.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 회사에서 고생을 했는데 사장이 날라버렸어요. 회사 집기도 밤에 다 빼버리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사장이 여자 하나를 끼고 걸어가는 걸 봤죠. 눈이 뒤집혔는지 그대로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어서 부웅 떠올랐고 병원신세. 금속체 기부 받고 버스 정류장 고고. 미래신문. 주진태가 죽는 바람에 살인 누명을 쓸뻔 하기도 했고. 아, 주진태가 우리 회사 사장이었어요.”
“주진태?”
소명이 물었다.
“네. 아세요?”
“아, 아니…….”
연우는 모르는 척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소명은 그래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어도 조직에 해가 될만한 내용까지 털어 놓을 권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진태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주진태가 보낸 해결사에게 손목을 잃은 남자가 소명을 찾아 왔었다.
주진태를 죽여주기만 하면 사례를 하겠다고.
‘남한테 줄 돈은 주지도 않으면서 제 돈은 받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던가 보지?’
그 생각을 하면서 소명은 연우가 자꾸만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연우는 제 존재가 소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보니 자꾸 소명을 보게 됐고 결국 눈이 마주쳤다.
소명의 눈에서 나오는 열기만 가지고 사람 하나를 족히 불살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흡.’
연우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주진태의 건은 소명들이 처리한 게 맞았다.
신기한 것은 일을 처리하기 직전에 똑같은 일을 의뢰하려는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바로 주진태의 아내였다.
한 차례의 수고로 두 건을 처리했다.
소명이 직접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로 기선이 의심을 받고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것은 이제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하긴 그때는 기선을 알지도 못했으니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만.
“너.”
소명이 연우를 불렀다.
“잠깐 나 좀 봐.”
“저요? 왜요? 저만요?”
연우가 말했다.
“그럼 너 혼자지. 내가 그런 자리에 미쳤다고 네 변호사까지 데려가겠냐?”
“그런 자리라뇨, 누나? 대체 어떤 자리로 만드실 생각이신데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
“제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로 만들 거라는데 제가 따라갈 리가 없죠. 시영이 없이는 안 가요.”
일이 그렇게 되자 이제 시영이 나서서 손사래를 쳤다.
“사적인 영역에 내가 관여해선 안 되지.”
시영의 말에 소명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윙크를 날렸다.
“널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간단한 협상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거라면 따로 안 나가도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걸로 알아들을 수 있어요.”
“좋아. 네가 나한테 네 능력 쓰면 나는 너한테 내 능력 쓴다. 알아 들었지?”
“네.”
“쓰지 마.”
“……네.”
“안 쓸 수 있어?”
“……그렇게는 안 되는 것 같아요.”
“…….”
“어쨌든. 어떻게든 해 볼게요.”
“좋아.”
그 날.
다른 사람들에게 별 쓸 데도 없는 능력이 생겼다.
연우가 소명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고 소명이 거짓말 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능력이 모두에게 골고루 갖춰졌다.
하나도 안 고맙게도.
그리고 기선은 자기 소개를 하라고 허락받은 시간 동안 희영을 향한 사랑의 고백만 구구절절 늘어 놓았다.
그것이 여러 사람의 기분을 확 나쁘게 해 버렸다.
그 후로 희영과 정인이 차례대로 자기들이 자각하게 된 능력의 ‘증상’에 대해서 급히 설명했고 마지막으로 장 항이 짧게 설명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