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14화 (1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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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잘 안 됐다면 어쩔 거였어?”

기선이 물었다.

저절로 말이 더듬어졌다.

몰랐으니 망정이지,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린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나올 때까지 물도 제대로 못 마셨어요.”

“허억.”

비난하는 건지 놀라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신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전문가답게 냉철하고, 한편으론 무모할 정도로 뜨겁군.”

장 항이 코멘트를 내놓자 거기에 편승해서 같은 방향의 논평들이 쏟아져나왔다.

사이크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너, 엄청 후달렸겠다.”

지명이 말했다.

“말도 마. 죽는 줄 알았어. 그게 잘못되는 날이면 영국으로 튈 생각이었지. 가까이에서 보니까 희영이 누나도 그렇게 성격이 좋은 것 같지도 않고 너도 그렇고.”

희영의 눈초리가 찌릿, 하고 빛났지만 지명과 사이크는 헤헤거리면서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럼 사이크를 베리쳐의 자산관리사로 이해하면 되는 건가?”

선우 형이 물었다.

기선과 지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사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으로 대답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금속체 종과 소수자들 할 것 없이 베리쳐에 투자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 그럼 다음에는 저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지명의 소개를 들어보는 걸로 하죠.”

사이크가 바톤을 지명에게 넘겼다.

“저는, 소수자죠. 할 말이 별로 없는데. 미래신문을 보고 내가 교통사고로 죽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알게 된 기선이 형이 나를 구해준 걸 계기로 기선이 형이랑 만나게 됐고요. 기선이 형이 미래신문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됐고. 음. 아버지가 퓨쳐 컨트롤에 CEO로 계셔서 기선이형이랑 같이 거기에 적을 두려고 했다가 제 도라는 아저씨 때문에 무산되면서 베리쳐라는 회사를 세웠죠. 제 도 아저씨에 대해서도 말해야 되나?”

지명이 기선과 사이크를 차례로 바라보며 묻자 두 사람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어떻게 연관된 건지 모르니까 우선은 전부 털어 놓도록 하는 게 좋겠어.”

기선이 말했다.

“네, 좋아요. 제 도 아저씨는 퓨쳐 컨트롤의 최대 주주였고 제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던 제 후의 아버지였어요. 이제 그 분을 설명하면서 과거형을 써야 하게 되네요. 악연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후의 아버지였고 우리 아버지의 친구였죠. 후는 같이 하버드 대학에 갈 정도로 인연이 깊었는데 거기에서 자살을 했어요. 기숙사에서. 내 룸메이트였죠. 제 도 아저씨는 후의 죽음이 나한테 책임이 있다고 믿었어요. 정말 괴로운 일이었죠. 여러 모로. 그리고 그 아저씨는 여러분이 다 아는 그 싱크홀 사건으로 혼자 빌딩 안에 남아있다가 돌아가셨어요.”

지명이 잠시 침묵을 만들었다.

갑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지명은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지명이에 대해서 내가 좀 보충설명을 하자면 이 자식은 괴물이에요. 천재들한테 추앙받는 천재였죠. 제 후의 자살 후에 지명이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려서 내 상심이 정말 컸는데 이 자식은 내가 필요해지니까 그제야 겨우 연락을 하더군요. 지금도 보세요. 제 후를 유일한 친구라고 하잖아요. 이 자식은 남의 감정을 헤아릴 줄 모르고 툭툭 말을 뱉으니까 여러분도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그렇게 말을 하면 나는 뭐가 되겠어요? 친구가 아니면. 떨거지?”

사이크가 열을 올리면서 설명을 하자 여기 저기에서 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이젠 네가 내 유일한 친군데. 내가 그 말 안 했나?”

지명이 말했다.

“됐어. 네가 나를 친구라고 인정하건 말건 이제는 상관 없어. 나한테는 미래가 있으니까.”

“우리 모두에게 미래가 있어.”

지명이 키득거리면서 사이크를 놀리자 희영이 지명을 쥐어박았다.

“그만 좀 놀려. 남의 나라에 와서 안 그래도 기죽어 사는 애를 자꾸 놀리면 재밌어?”

희영의 말에, 졸지에 남의 나라에 와서 기죽어 사는 애로 낙인이 찍혀버린 사이크는 희영을 아군으로 인식해야 하는 건지 적군으로 인식해야 하는 건지 혼란에 빠졌다.

“아, 그것도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나랑 희영이한테는 부분적으로만 보였던 기사가, 그러니까 많아봐야 두 개 정도까지밖에 보이지 않던 기사가 지명이한테는 전부 보였다는 거. 그리고 보는 즉시 외워버린다는 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기선의 말에 지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응수하자 연우가 헉, 소리를 냈다.

“그게 대단한 게 아니라고? 그런 두뇌라니. 정말 훔치고 싶다.”

“별 건 아니에요.”

“베리처의 자산을 처음에 불려 놓은 건 거의 지명이었어요. 기업 분석에도 재능이 뛰어나고 흐름을 잘 잡아내서 예측을 잘 하거든요. 우리가 하나, 둘, 셋 하고 세고 있으면 이 녀석은 벌써 조 단위에 가서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머, 그래? 지명씨에 대해서 진작 소개를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잉여인간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말이야.”

소명이 말했다.

지명은 그 말에 고개를 떨구고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정인이 키득거렸다.

“나중에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더 말할게요. 우선은 다른 사람이 이어서 자기 소개를 해 주세요.”

이제는 연우가 손을 들었다.

“남아있는 소수자는 저 뿐인 것 같네요. 그러니까 당연히 제 차례겠죠? 저는 소수자고 능력도 나타나지 않고 이시영 법률 사무소에서 시영이 밑에서 사무장을 하고 있어요. 우와.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저야말로 잉여인간처럼 느껴지네요. 수퍼맨 팬티나 다려주는 사람처럼 너무 잉여롭게 여겨져요.”

“연우는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아요. 그건 연우가 가진 능력이죠.”

시영이 말했다.

“저도 그걸 느꼈어요.”

정인이 거들었다.

“그건. 일종의 트릭이에요. 수 십 개의 질문을 찔러 넣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거예요.”

연우가 말했지만 시영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지만 확실히 연우의 직관은 점점 발달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시점이 싱크홀 사건으로 우리가 다 같이 모였던 때였던 것 같아요. 기선씨의 영향인지도 모르죠.”

“나는 소수자잖아.”

연우가 항변했다.

“소수자에게도 이미 나타나고 있던 능력이 있으면 그걸 강화시키는 역할을 기선이 형이 하는 건지도 모르죠.”

지명이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어버렸고 대단하다는 듯이 기선을 우러러 보았다.

“이게 말이야. 우리한테 있는 능력이라는 거. 이게 우리 사이에서도 통하나?”

소명이 물었다.

그러자 연우가 큰 소리로 웃었다.

“누나가 동종업계 종사자가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연우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 말을 믿었는데?”

선우 형이 말하자 장항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라는 말이 무더기로 나왔다.

“젠장. 우리 사이에서도 통한다는 소리야?”

소명이 연우를 노려보자 연우는 괜히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소명은 이렇게 된 이상 막을 치는 행위는 무의미하겠다고 판단했다.

“좋아. 그 다음에는 내가 말할게. 나. 오른팔이 세졌어. 단순히 세진 것 뿐만 아니라 회복도 빨라. 어느 정돈지 궁금하다면 보여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소명이 두리번거리다가 씽크대를 향해 직행하려 하자 기선이 소명을 말렸다.

“됐어요, 누나. 보여주지 않아도 돼요.”

“그래? 보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별로요.”

“그래? 어쨌든 그래. 상처가 완전히 아무는데 일, 이십분이면 되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시간이 점점 더 단축되고 있어. 상처의 깊이에 따라서 다르거나 그런 것도 아니야. 팔을 찔리고 싸우다보면, 싸움이 끝났을 때 나아있어. 안타깝게도 그건 오른 팔에 한정된 얘기라 다른 곳은 여전히 한정돼 있지. 한정돼 있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은데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불멸의 반대 개념. 하여튼. 뜻은 통했지?”

“그런데 왜 싸우는 건데요?”

지명이 물었다.

“그게 내 일이니까.”

“에엥?”

“응, 그게 내 일이라고. 나를 믿고 나한테 의탁한 녀석들을 지켜주기 위해서도 싸우고 내 영역에 코를 들이미는 놈들을 혼내주려고도 싸우고 내 영역을 넓히려고도 싸우지.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일반적인 이유랑 같은 이유로 싸워.”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요?”

시영이 물었다.

소명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침묵을 너무 오래 지킨 탓에 그것이 일종의 대답이 되어 버렸다.

거짓말을 할까 했지만 연우가 버티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좋지 않은 인간한테 걸렸어. 얘기하면 알 거야. 십년이 다 돼 가는 일이긴 하지만 신문지상에 떠들썩하게 실렸으니까.”

“하기 힘든 얘기면 하지 마. 서로 어떤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자는 거지 속을 파내서 보이라는 건 아니니까.”

장 항이 말했다.

하지만 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죠. 마냥 믿으라고 할 수만은 없잖아요. 나랑 등을 마주 대고 싸울 사람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사람이 누가 됐든 나에 대해서 확신을 갖길 바라거든요.”

그렇게 해서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누구도 그 이야기를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입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소명은 혼자서 집을 나섰다.

내심 기대가 컸지만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는 것을 알고 집에 전화를 해서 그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 이상으로 소식을 듣는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고 소명은 기억했다.

그래서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더 불편해 보이는 길을 찾아서 걸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두워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모르는 길이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멈추는 택시가 없었다.

집에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공중전화 부스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그런 곳까지 이르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소명의 앞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학생, 태워다 줄까?”

소명은 망설였지만 너무 오랫동안 대답이 없으면 그가 그냥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다.

소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어서 타라고 말했다.

소명을 태운 차가 쏜살처럼 달렸다.

“이 방향이 아닌데요.”

“이게 택신줄 알아?”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저씨, 내려주세요.”

“볼 일이 끝나면 내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내려줄 테니까 징징거리지 마.”

남자는 소명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소명은 저항이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저 악몽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랐다.

그는 소명의 처녀를 가져가고 몇 번이나 더 성폭행을 했다.

볼 일이 끝나면 보내줄 거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출근한 사이 달아났던 소명을 찾으러 그가 소명의 집까지 찾아왔다.

소명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학생증을 훔쳐 그것으로 소명의 주소를 알아낸 후였다.

무분별하게 폭행을 휘둘러대는 그의 앞에서 소명의 오빠가 나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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