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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11화 (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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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친절한 선생처럼 전두엽이니 대뇌피질이니 뉴런과 해마라느니 하는 용어를 들먹이면서 칸트를 이리 저리 움직이게 하며 칸트가 그것들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에 보이는 이게 해마야. 기억의 대부분을 해마가 관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 자기 역량에 넘치는 일을 맡은 멍청한 여자가 그동안 얼마나 고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생각해 보라고. 이제부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자기가 어떤 일로 고통 받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걸? 퀸은 이제 제대로 된 거짓말을 만들어내지도 못할 거야.”

“이거야말로 퀸의 구원이네요.”

칸트가 말했다.

해마가 제거된 두뇌에 구멍이 생겨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퀸은 눈을 뜬 채 제 머릿속을 뒤집어 섞으려는 것 같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준은 가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또 그 여자가 지켜보고 있는 건가요?”

칸트가 물었다.

준은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희영은 물 속에서 숨을 참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기선이 그런 희영을 기다리고 있다가 희영을 안은 채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희영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드디어 희영이 눈을 뜨고 기선을 바라보았다.

매번 기선은, 이대로 희영이 눈을 뜨지 못하고 육체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희영이 다시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봐주면 그동안 걱정하게 했던 것에 대한 원망은 한 순간에 잊고 희영을 향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돌아와줘서 고마워."

희영의 뺨을 감싸쥐고 그가 말했다.

퀸은 자기 배에 난 상처가 어쩌다가 생긴 건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역할을 한 몇 몇 사람은 기억해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충돌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여러 시대의 사람들이 동시에 퀸의 기억에서 살아났다.

퀸은 마침내 생각을 짜 맞추는 일을 포기했고 사람들과 이야기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퀸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붉은 번개의 틈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믿은 새로운 입교자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인해 퀸은 목숨을 잃었다.

***

은미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정인과 같이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지명이었다.

기선은 옛 애인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꼭 새 애인과 함께 가야 하는 거냐면서 말렸지만 지명의 생각은 달랐다.

“형, 정인이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봐요. 우리 중에 가장 기댈만한 사람은 지금으로선 정인이인 것 같다고요.”

지명이 그렇게 말하자 기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몰랐어. 정말 정인씨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정인씨가 함께 가야겠지. 그런데. 넌 괜찮겠어?”

기선이 팔꿈치로 지명을 툭 건들었다.

“왜요? 뭐가요?”

“정인씨가 본다는 거. 어느 정도야?”

“그건 잘 몰라요. 정인이도 얘기하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상대가 유경태였어서 마주 앉아서 그게 네 과거에 있었던 일이냐 어쩐거냐 묻고 들을 상황이 안 됐고요.”

“나는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럼 뭔데요?”

지명이 물었다.

“미래씨하고 너하고의 그 은밀한, 그런 것까지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거야.”

“네?”

지명은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듯 당혹스런 표정으로 기선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정인씨랑은 내가 가까이 있지 않는 게 낫겠다. 내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강화시킨다는 사이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정인씨하고 가까이 있는 게 너한테 불리할 수도 있지 않겠어?”

기선은 지명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우스워 죽겠는지 낄낄거렸다.

희영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기선에게 눈을 흘기면서 지명을 그만 놀리라고 타박했다.

“이 녀석 얼굴 붉어지는 것 좀 봐. 진짜 걱정되나 봐. 너, 이 자식. 미래씨하고 뭘 하고 놀았길래 그렇게 빨개지는 거야?”

그 말에 지명은 지은 죄도 없이 얼굴만 더욱 붉혔다.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손만 만지고 나란히 누워 있다가 나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정인에게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정말, 형. 정인이랑 가까이 있지 마요.”

지명이 당부하자 기선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때는 희영도 따라 웃었다.

“하여간, 두 사람 다 엉뚱한 구석이 있다니까.”

희영이 말했다.

“일단 정인이 능력을 강화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정인이가 미래 누나를 만나고 온 다음에 해요. 알았죠?”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이 자식아. 변태같이 놀지 말고 좀 정상적으로 굴어!”

기선의 말에 지명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변태 같이 논 적은 없어요. 그냥 평소에 궁금했던 걸 실천해 본 것 뿐이고 미래 누나도 싫어하지 않았다고요.”

“구체적으로 대답할 필요 없어.”

기선은 여전히 웃던 채로 정인의 방문을 받았고 지명은 정인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대로 정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우린 그럼 미래 누나한테 갔다 올게요.”

희영과 기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명에게 떠밀려가는 정인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고 영문도 모르는 정인은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명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댔다.

미래는 지명의 방문이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고, 사이크를 위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웠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몇 번이나 사이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참았고 일부러 일을 더 많이 만들어서 일에 몰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지명이 별다른 약속을 잡지도 않고 들이닥친 것이다.

지명에게 화가 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지명이 데리고 온 정인에게 호기심이 일기는 했다.

정인은 미래의 장난스런 시선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누나. 정인이에요.”

지명의 소개에 미래가 다가와 정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인은 수줍게 웃으면서 미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강력한 전기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미래의 손을 털어내듯 놓아 버렸다.

미래는 불쾌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정인을 걱정했다.

“괜찮아요?”

“아, 네……. 죄송해요…….”

정인이 말했다.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미래의 말에 정인은 슬쩍 고개를 들어 미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혹시 나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던가 그런 거예요?”

미래가 웃으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들 있거든요. 내가 강연도 많이 나가고 TV에도 간혹 출연을 하니까 내 얼굴이 낯익어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봐요. 반가워하면서 인사를 하면서도 나를 어떻게 아는지는 끝내 생각이 안 나서 갸웃거리면서 가는 사람이 꽤 많아요.”

미래는 어떻게든 정인을 안심시키려고 애썼지만 정인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질 않았다.

“보인…거야?”

지명이 작은 소리로 정인에게 물었다.

정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미래를 슬쩍 바라보았다.

불안과 공포가 정인의 얼굴에 가득했다.

“무슨 일인지, 두 사람. 설명 좀 해 줄래요?”

미래가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어투였다.

지명은 미래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한테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사이크가 누나한테 어디까지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 사이크는 누나하고 헤어진 걸 이겨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누나를 만나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처음에는 나만 오려고 했는데 정인이가 같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정인이는 사람의 과거를 보는 것 같거든요.”

“…….”

미래는 예단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는지 코멘트를 하지 않고 지명이 더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누나한테 말하는 건 힘들었어요. 누나는, 잘 안 풀린다고 해서 던져버려도 되는 문제하고는 다르니까요. 누나는 우리한테 소중한 사람이고 사이크도 나도 누나하고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미래는 이제 지명을 바라보지 않았다.

미래의 시선은 정인에게 가 있었다.

정인은 미래를 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미래에게서 무언가가 툭툭 날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형태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영상이었다.

필름 한 장 한 장이 정인을 향해 던져졌다.

미래는 정인이 허공을 노려본다고 생각했지만 정인은 미래가 살아온 개인사를 읽고 있었다.

“누나.”

지명은 미래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알고 싶었다.

미래는 한동안 더 침묵을 지켰다.

“지금, 내 과거를 들여다 보고 있는 거란 말이지?”

미래가 지명에게 말했다.

정인의 시선이 미래에게 향했다.

“뭔가. 보여요?”

미래가 정인에게 물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정인이 지명을 바라보자 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믿어도 돼.”

정인은 한참을 주저하더니 미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투…….”

“네?”

미래가 되물었다.

“붉은 번개. 만져 봐도 될까요?”

“왜요?”

미래는 본능적으로 뒷목으로 손을 뻗어 타투가 있는 자리를 더듬으면서 되물었다.

“알아야 되잖아요.”

정인이 말했다.

맹랑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정인이야말로 미래와 사이크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래는 경계를 늦추었다.

마침내 긴 침묵을 깨면서 미래가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싶어요. 무슨 일이 나한테 있었던 건지. 어떻게 내가 알지도 못하는 타투가 이런 부위에 새겨진 건지.”

지명과 정인은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지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지명이 정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져보고 싶어하지만 만져봐도 되냐고 물을 용기를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죠.”

미래가 정인에게만 특별히 허락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정인도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돌아 앉을까요? 아니면.”

미래가 정인에게 물었다.

“제가 일어날게요.”

미래는 머리를 돌돌 감아서 위로 말아 올렸다.

정인은 심호흡을 하고 붉은 번개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흐아악!!”

희영이 비명을 질렀다.

잠깐 백일몽에 빠져들었던 것 치고 대가는 너무 컸다.

기선은 희영에게 다가갔고 온몸이 젖을 정도로 희영이 땀을 흠뻑 흘린 것을 보았다.

“또……?”

희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꿈속에서 희영은 준의 침실에서 준을 보았다.

준이 희영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희영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알아졌다.

준이 말했다.

칸트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씩 정리를 할 때가 됐지? 탈출한 원숭이들.”

“메시지는 어떻게 전하죠?”

칸트가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또 나를 기웃거리고 있거든. 거기에서 듣고 있잖아. 그렇지?”

그것은 분명히 희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모든 것들을 다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기선이 손을 잡아 주고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주는데도 아무 것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흉통까지 찾아왔다.

기선이 희영의 얼굴을 감쌌다.

“뭘 본 거야, 희영아.”

희영의 입술이 떨렸다.

기선은 귀를 갖다 대고야 희영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를, 하나씩 정리한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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