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9화 (9/101)

0009 / 0101 ----------------------------------------------

정인은 사람들의 치부를 알아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왜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필요한지를 깨달았다.

정인은 지명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조금씩의 허물과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문젠지 모를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허물투성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나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고 소망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미래신문을 받은 사람들은 성격이 좋거나 착해서 선택된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분히 이기적이었고 까탈스러웠고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사회성의 결여와 대인기피라는 문제를 거의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들보다 높은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깨진 자국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달팽이 같았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집에는 부서진 껍질이 다시 이어져 자란 부분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자라난 껍질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유경태의 습격에서 소명이 구해주었을 때는 소명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로 소명과 마주칠 일이 없기는 했지만 소명을 보게 되면 소명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 같다고 정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크가 왔을 때 사람들은 각자 케미가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저게 미래신문이라면 사이크가 읽을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지명이 기선에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기선이 말했지만 희영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최면에 저항하기 시작한 이상, 우리한테 미래신문을 보내는 사람은 미래신문을 통해 우리한테 확실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을 거예요. 나라면 쉬운 방법을 택했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발행하는 방식으로요.”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신문을 본 사람들의 동요를 막을 방법이 없을 텐데요?”

연우가 다가오며 말을 보탰다.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라면 그냥 나한테 물으면 돼요.”

사이크가 말했다.

“보이냐는 거죠? 네. 보여요. 이걸 본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는지 그게 궁금한 거라면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해야겠군요. 이 신문은 펼쳐지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쳐박혀 있었거든요.”

“사이크!!”

기선이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다.

“왜… 왜요?”

“한국말이 언제 그렇게 는 거야? 우리끼리 한국말로 한 걸 지금 다 알아듣고 대답한 거야?”

“우선은 기사를 봐요.”

사이크가 말하자 모두가 일제히 사이크를 향해 몰려 들었다.

“퍼스트 레이디의 요트사고? 이건……. 굉장히, 사적인 얘기로 들리는데?”

지명이 말했다.

“그래. 한가로워 보이지. 어쩌다가? 라는 생각이 들고. 린다가 스스로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밀회를 즐기려고 했던 것 같아.”

“엄청난 후폭풍이 밀어닥치겠군.”

시영이 중얼거렸다.

“누구를 배후로 지목할지가 더 궁금해.”

선우 형이 말했다.

“네 생각은 어때?”

지명이 사이크에게 물었다.

“이미 몇 가지 지시를 내려놨어. 퓨쳐 컨트롤은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부양하게 될 거야.”

“사이크. 잔인하다, 정말.”

지명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지명. 넌 지금 네가 누구를 상대하는 거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미래신문에 실리는 내용이 우연히 미리 알려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닌 것 같아. 누군가 예고하는 것 같다고.”

“싱크홀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그게 싱크홀이 아니거나, 싱크홀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곳에 다른 힘을 추가적으로 가한 걸 수도 있지.”

지명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미래 신문이 다른 사람을 겨냥하고 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타겟이 될 수도 있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그때 뭘 가지고 대응을 할 거야? 지금은 상대가 봐주고 있다고. 그러면 이때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 되는 거잖아.”

사이크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 같아 기선이 나서서 그를 달랬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이크가 울컥하는 것을 보고 지명이 그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기선이 그 뒤를 따랐다.

“왜 그래, 사이크. 무슨 일 있어?”

지명이 물었다.

“미래가 헤어지자고 했어.”

사이크가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뭐?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지명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래도 그 집단에 대해서 알아봤겠지. 그리고 자기가 어떤 식으로든 그곳이랑 연관이 돼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거야.”

“…….”

“나는 아직 모르겠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어.”

지명은 진심으로 사이크를 위로했다.

“내가 누나를 만나볼까?”

지명의 말에 사이크가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 좀 설득해줘. 미래가 없으면 나는 안 될 것 같아. 이미 너무 미래한테 젖어 버린 것 같다고.”

지명이 사이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붉은 번개의 틈. 그 2대 교주. 그의 이름이 준이야. 준 맥브라이언. 칼 맥브라이언이 아직 살아있다고 하지만 수년동안 그를 봤다는 사람이 없어. 준은 한국에서 입양된 양자야. 나는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있는 게 준일 거라고 생각해. 준 맥브라이언과 싸우는 일은 힘들 거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기선과 지명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고 숨을 죽여 탄식을 했다.

***

린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린다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마법과도 같았다.

일직선상을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거라고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던칸은 린다에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CIA 녀석들도 지금쯤 엉덩이 사이로 땀 좀 흘리고 있을 거야.”

린다는 상원의원의 상스러운 농담에 격의 없이 웃었다.

아무도 자신의 행방을 알지 못할 거라는 말에 린다는 꽉 조이는 코르셋 후크를 풀어버린 것처럼 가벼운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던칸이 비밀스런 사무실에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은 린다의 가슴을 확 막히게 해 버렸다.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칸트는 한 순간에 린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칸트는 린다를 조용히 바라봤을 뿐 웃음을 짓지는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린다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한 수였다.

린다가 영부인이 된 후부터, 아니, 실은 그 이전부터 어느 누구도 린다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칸트처럼 그렇게 차갑고 무관심하게, 수 십 마리의 오리 새끼중에 낀 별 볼일 없는

오리 새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던칸은 칸트를 자신의 최대 후원자라고 스스럼없이 털어 놓았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린다가 던칸을 바라보았다.

‘뭔가 더 있는 거지? 털어놔 봐.’

던칸은 린다의 집요한 시선 아래서 고개를 떨군 채 린다의 귀에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속삭였다.

“‘붉은 번개의 틈’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지? 우선은 여기까지만 말하는 걸로 하지.”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린다의 두뇌 우반구에서 시냅스와 세포로 구성된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이야기의 틈을 재빠르게 채워가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후원자’, ‘붉은 번개의 틈’이라는 단어들은 신데렐라를 치장해준 요술할멈들처럼 칸트를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던칸은 린다가 칸트와 함께 사무실을 떠나려 할 때 린다에게 다가가 우정어린 포옹을 해 주었다.

린다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많은 것을 이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 너구리.’

문이 닫히자 던칸이 웃음을 지었다.

수천억이 공중에서 분해되어 사라지는 마술이 곧 펼쳐질 터였다.

미합중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밝혀지면 미국 뿐만 아니라 국제 정서가 들끓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사이크는 선 사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선 사장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그것들을 승인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봐요.”

선 사장은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사이크도 쉽게 숙이려 들지 않았다.

“저는 설명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장님이 제 뜻에 따르기로 하신다면 사장님은 종말론을 믿는 신자처럼 정말 그 일이 일어나기만 바라야 하실 겁니다. 그 믿음에 모든 것을 전부 다 건 사람처럼요. 믿고 안 믿고는 사장님의 문제지, 제 문제가 아닙니다.”

선 사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베리쳐는 모든 자산의 관리를 제게 일임했습니다.”

사이크가 말했다.

“베리쳐 자산을? 모두?”

선 사장이 놀란 눈으로 사이크를 바라보았다.

“염려가 되신다면 그냥 계셔도 됩니다. 베리쳐는 저를 믿기로 했고 저는 베리쳐와 함께 종말을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사이크의 말에 선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그 믿음에 동조하기가 어렵겠군요.”

선 사장의 솔직한 말에 사이크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충분히 담대하셨습니다.”

“베리쳐는,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될 운명인가 보죠.”

선 사장이 말했다.

“아니면 스크루업의 성공신화를 이어 나가거나요. 행운을 빌어주세요.”

“당연하죠. 한 다스나 되는 아들 중에 하나를 꺼내서 맡긴 것도 아니고. 지명이는 나한테 하나뿐인 녀석입니다.”

사이크는 그런 선 사장이 좋았다.

선 사장은 퓨쳐 컨트롤 내부의 보안 시스템을 이용해서 사이크가 부리는 마술을 구경했다.

사이크의 거래를 보면서 선 사장의 입에서는 장탄식만이 나왔다.

‘끝장을 내려는 거군. 단 한 방에…….’

사이크는 3차 대전이라도 대비하는 것 같은 매매를 했다.

그의 거래에서 읽어지는 메시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동’,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규모의.

***

린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터보 엔진마저 잠들어 있었다.

린다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물결치는 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린다가 말했다.

칸트는 그런 린다를 바라보며 음료를 비우고 있었다.

칸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부끄러워하면서 린다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게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에 대해서 궁금한 건 없어요?”

린다가 말했다.

“있어요.”

칸트가 유리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떤 건데요?”

린다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칸트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죠?”

“네?”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겨우 1,2 초 정도였고 린다는 그것을 짓궂은 농담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나는 그의 이상형이 아니죠.”

린다가 말했다.

“어떤 여자라면 대통령을 단 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해야 되는 질문인가요?”

“성실하게 답해주면 좋겠어요.”

린다는 최선의 답을 내놓으려고 노력했고 칸트는 ‘붉은 번개의 틈’에 속해 있는 여자들 중에 누가 그 조건들에 부합하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마침내 린다와 헤어질 시간이 됐다고 느꼈을 때 칸트가 말했다.

“다행히 물이 많이 차갑진 않네요. 당신을 위해서 잘 된 일이군요.”

그게 왜 다행인 거냐고 린다는 묻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