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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칸은 거부할 수 없는 최대 후원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칸트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준은 직접 나서고 싶지 않은 일에 칸트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것 때문에 준 맥브라이언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준 맥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일 뿐이고 사실은 칸트가 준 맥브라이언이라는 소문이 지지를 얻을 정도였다.
던칸 상원의원은 붉은 번개의 틈에 깊이 관여가 되어 있었고 붉은 번개의 틈은 던칸을 절대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붉은 번개의 틈은 던칸의 확고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가끔 보수적인 기독교도들과 이해가 상반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칸트는 힘으로 밀어붙여서 던칸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곤 했다.
선동적인 반대진영의 후보가 세력을 얻어가는 것 같으면 칸트는 직접 나서서 골칫거리를 제거해 주었다.
"칸트."
던칸은 칸트와 대화를 할 때는 언제나 긴장이 되었지만 자기가 칸트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칸트는 던칸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요즘은 굵은 기삿거리가 없어요."
칸트가 말했다.
"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던칸이 물었다.
"자극적이기도 하고 흥미도 유발되는 것.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되던 사람의 죽음. 사실은 전혀 가깝지도 않지만 부고를 들었을 때는 충분히 슬퍼질 것 같은 죽음 같은 것 말이에요."
"칸트. 혹시 생각해 두신 사람이 있습니까?"
던칸은 이마에서 솟아나는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스마트폰에 대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영부인이라면 어떨까요?"
"칸트!!"
아무리 칸트라고 해도, 아무리 붉은 번개의 틈이라고 해도 린다를 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하려고 했다.
칸트가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는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음 말고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린다. 그 너구리를 죽이라는 건가?'
던칸은 고뇌에 휩싸였다.
도무지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틀 후에 던칸은 우연이란 말처럼 교만한 표현도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면서, 암센터 건립을 위한 기부 파티에 나타난 영부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등장한 영부인 때문에 연설할 기회를 뺏기기는 했지만 그의 가슴은 희열로 가득 찼다.
“칸트. 너구리가 제 발로 기어 들어왔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던칸은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칸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높은 톤은 던칸 의원이 얼마나 흥분에 들떴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좋아요. 던칸을 위해서 잘 된 일이네요.”
칸트가 말했다.
“린다하고는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죠. 대통령도 알지 못하는 린다의 성적 기호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시간낭비가 아니길 바라요, 던칸.”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칸트. 우리의 퍼스트 레이디가 레즈비언이란 말입니다.”
“뭐라고요?”
“내 계획은 이래요. 사흘 후에 의회 아래에 있는 내 비밀 사무실로 린다를 초청할 겁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필요 없어요. 던칸. 그걸 던칸한테 준 게 우린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네, 그렇죠. 일단 사무실로 데려 가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린다한테 붙은 꼬리는 전부 다 따돌릴 수가 있어요.”
“그렇겠죠. 아무도 그곳의 존재를 모르니까.”
“그때부터는 칸트가 도와줬으면 해요.”
“내가요?”
“너구리를 유인하려면 미끼가 필요하죠. 칸트야말로 너구리를 홀릴만한 미끼가 될 거예요.”
“그 다음엔요?”
“어느 정도는 사실을 말할 겁니다. 어차피 며칠 안에 죽을 사람이잖아요. 칸트가 내 최대 후원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칸트를 린다에게 소개해 줄게요.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은 후에 칸트가 린다에게 함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하는 거죠. 바쁜 일정에 혹사당하는 게 안타깝다는 둥, 할 말이야 많겠죠. 린다는 다른 사람들이 치하해 주면 약해지죠. 게다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칸트라면, 린다는 경계심을 무너뜨릴 겁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나쁘지 않군요.”
“제가 맡을 부분은 이미 그렇게 이루어진 거나 다름 없습니다.”
“장난해요, 던칸? 내가 맡을 부분이야말로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곧 너구리 요리를 맛보길 기대하면 되겠군요.”
“좋아요. 물먹은 너구리라 맛은 없을 것 같지만.”
“이제 전화를 끊어야 돼요, 칸트. 너구리가 오고 있어요.”
칸트는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준이 칸트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좋은 소식이군. 그렇지?”
준이 칸트의 턱 선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세밀한 사항까지 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십 분 안에 기사를 써 드리죠. 영부인을 잃고 비통에 빠진 미국이란 제목으로.”
“지금부터 십 분 동안은 네가 다른 일로 나를 만족시켜 줬으면 하는데.”
준의 말에 칸트의 얼굴이 홍조를 띄었다.
“린다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응.”
“던칸은 린다가 나를 좋아할 거래요.”
“네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건 원치 않아.”
준은 칸트에게 부드럽게 키스를 하면서 칸트의 바지를 벗겨냈다.
칸트는 두 다리를 조용히 움직이면서 바지를 벗었다.
준에게 그런 부드러운 키스를 받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다는 자부심이 칸트를 나른한 황홀감으로 몰아갔다.
모두가 준을, 그저 준이라고만 불렀다.
교주라든가 거창한 호칭으로 대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준의 명령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준에 의해 죽게 될 때도 대단한 호칭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준에 의해 죽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준은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헛되게 여기기를 바랐다.
헛되게.
헛되고 헛되게.
칸트는 입을 다문 채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급한 삽입에 칸트가 준의 목을 팔로 감으며 바라보았다.
“사정, 하고 싶어요?”
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
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칸트는 그의 페니스가 죽지 않도록만 허리를 움직여주었고 준이 허리를 붙잡으면 그대로 멈추었다.
“내 곁에 있는 게 싫지 않아?”
준이 물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다른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겠는가.
칸트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위에서 머리카락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칸트의 눈이 갑자기 부푸는 것처럼 보였다.
준은 칸트의 눈물을 보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신음이 뚝뚝 떨어졌을 뿐, 칸트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게 바로 준이 칸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제 감정을 쓸데없이 남에게 전이시키지 않고 제가 처리한다는 점.
준이 칸트의 안을 샅샅이 채워넣었다.
칸트는 준이 콘돔도 사용하지 않은 채 사정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이가 생기면 키워.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나를 닮겠지.”
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가서 기사를 써. 미래신문을 받지 못하게 됐다고 절망하고 있을 텐데. 특종을 실어서 던져주자고.”
“네.”
***
퓨쳐 컨트롤의 비서실로 보내기로 한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사이크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그냥 그대로 비서실 쓰레기통이나 채우다가 버려질 운명이었다.
사이크는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신문을 빼들고 사장실로 향하려다가 베리쳐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선은 사이크의 연락을 받고 사람들을 모아 들였다.
소명은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더니 한참만에야 전화를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퓨쳐 컨트롤 비서실로 미래신문이 왔데요. 사이크가 발견하고 그걸 가지고 지금 이리로 오는 중이에요. 누나도 올 수 있으면 오세요.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 오늘 못 갈 수도 있는데. 내가 알아야 되는 내용이면 나중에 알려줘.”
소명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누나, 다쳤어요?”
왜 그것을 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질문이 되기는 했다.
천하무적인 것은 오른 손 뿐이었고 무방비한 등에 날아오는 칼을 막을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주고 받은 것을 다 더하고 빼서 계산을 해 보면 소명의 승리라고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빅 대디의 손실은 재건이 불가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컸다.
진한이 뒤늦게라도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날의 판세는 그렇게 끝이 났다.
“넌 괜찮은 거지?”
기선이 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희영은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난처해하며 물었다.
“또 뭔가 보이는 게 아닌가 해서 걱정이 돼.”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꽤나 애매한데.”
기선이 희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한 희영을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이긴 해요.”
“그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친 적도 있어?”
희영은 고개를 저었다.
희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준 맥브라이언은 미칠 노릇이었다.
준은 희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자기가 있는 공간에 희영의 시선이 다다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 희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희영은 두리번거리는 준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 처음에 그렇게 눈이 마주친 이후로 다시 눈이 마주치는 경우는 없었다.
공포가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으면 희영은 기선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기선은 자신을 기억하라고 말해주곤 했다.
“내 냄새를 기억해. 그리고 나를 기억해.”
그것은 기선이 만들어낸 민간요법일지는 모르겠지만 희영에게는 잘 통했다.
희영은 기선의 체취가 자신을 준에게서 가려주는 것 같다고까지 생각하게 됐다.
기선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비웃을 것 같아서 기선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선은 확실히 주위 사람들을 강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게 맞는 것 같다는 말을 사이크는 여러 번이나 했다.
장 항과 선우 형도 사이크의 말에 동조했다.
기선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좀 더 정교하게 자신들의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선우 형은,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통제실에까지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었다.
목표를 가지고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런 것도 가능할까 해서 가 본 거였는데 아무도 형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형이 먼저 웃음을 지으면 그 웃음을 따라 웃으면서 형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형이 그 얘기를 하자 기선과 장 항은 크게 놀랐다.
“형이는 살아있는 마스터 키나 마찬가지잖아?”
항의 말에 선우 형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각성도 발달도 느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히 신경쓰이는 능력인 것에는 분명했다.
정인은 장 항을 보고 복서의 투신자살 장면을 떠올렸고 장 항은 어떻게든 그 일을 설명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절대로 정인을 이해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 금속체에 막을 두른 최초의 사람이었으니까.
정인에게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상황에 의해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도록 떠밀렸다고 하더라도 정인에게 그의 본질은 아들을 지키려고 자신의 몸에 단호하게 명령을 내린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