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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장항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몸 안에 막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희영이 자신을 보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희영을 조종할 수도 있을 거라고 소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희영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희영이 ‘스스로’ ‘눈을 감는 법’을 터득한 후로는 희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제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만 하면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준의 앞에서 웃고 있는 여자들.
그것이 준을 더 화나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거냐고. 도대체 뭐가. 도대체 왜!!’
준이 커프스 단추를 얼굴 근처로 들어올려 칸트를 불렀다.
“지루해. 뭐라도 준비해봐. 아가씨들을 화끈하게 해 줘야겠어.”
“어떤…….”
“정맥에 헤로인이나 잔뜩 줘 버릴까?”
“준비하겠습니다.”
“실망시키지마.”
칸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 현상에 선악이 없듯 준의 명령에서도 칸트는 선악을 분간할 수 없었다.
칸트에게 준의 명령은 화난 바람과도 같았다.
바람이 분다는 것을 느끼고 바람을 두려워하고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칸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그것도 여럿이 그에게 저항을 했고 그것이 준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칸트의 기분도 아주 나빠졌다.
“헤로인을 준비해.”
칸트 역시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의식은 준 뿐만 아니라 칸트에게도 기분 전환이 되어줄 터였다.
얼마후
준은 환각을 보는 여자들을 버려두고 방을 나왔다.
칸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칸트의 지시를 받고 몇 사람이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의 짧은 비명이 날카롭게 울렸다.
***
선 사장은 갑작스런 민혁의 방문이 부담스러웠다.
한때는 부하직원과 상사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민혁은 최대주주의 상속인이었다가 퓨쳐 컨트롤로 인해 엄청난 손해를 본 주주였다.
민혁은 선 사장이 자신의 방문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그냥 와 봤어요.”
민혁이 웃었다.
얼굴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가면 때문에 웃을 때의 표정은 더욱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언제든 찾아와도 돼.”
민혁은 선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쉽게 자리를 뜨지 않고 주저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
선 사장이 물었다.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건 아니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랑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까 얘기 나눌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 말에 선 사장의 가슴이 탁 막혀왔다.
“진작에 찾아오지 그랬니.”
“쉽지 않았다는 거 아실 거예요.”
다시 민혁이 웃었다.
“차라도 줄까?”
“아니요. 안돼요.”
그가 다시 어색한 표정을 만들었다.
“이 안에서는 벗고 있어도 된다, 민혁아.”
“…….”
“정말이야. 괜찮아.”
“아니에요. 어머니도 저를 보러 오지 않으세요. 병원에서 저를 한 번 보고는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그 후로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아요.”
“그건 분명히 어머니가 잘못 하신 거다.”
“사장님도 마찬가질 거예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한다고 받아들여지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저도 아직 거울을 보는 게 힘들어요. 그게 난데도 나를 보면서 내가 얼굴을 찡그려요.”
“괜찮아. 여기에서만이라도 네가 편하게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편하게 있으려면 이걸 계속 쓰는 게 좋아요.”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그래. 그럼 편한 대로 해라.”
선 사장은 민혁에게 손수 커피를 타 주었고 민혁은 커피 잔을 이리 저리 돌리면서 어루만지기만 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을 나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치기만 하다가 끝낸 것 같다는 생각요.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 자리에 삼촌을 세우고 삼촌한테 인정 받으려고 애를 썼죠.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실 거예요.”
“잘은, 모르겠구나.”
“바보 같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민혁아. 그리고 혹시라도 이제 네가 그 빈자리에 나를 두고 싶다면 내가 기꺼이 그 자리에 서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되면 민혁이 너는 내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돼. 나는 네가 어떤 애라는 걸 알아. 너는 마음 씀씀이가 깊은 애다.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아이고 상대방의 웃음을 가치있게 간직해 줄 줄 아는 애다. 그게 내가 아는 제 민혁의 모습이다.”
민혁은 놀란 듯 선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선 사장이 민혁 모르게 민혁의 삶을 관찰해 온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선 사장이 한 말중에 그냥 나온 말은 없었다.
그것은 모두 민혁이,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소망하면서 마음 속에 간직해 왔던 것들이었다.
정말 한 순간이라도 그런 모습으로 보인 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울컥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선 사장은 민혁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았다.
“받기 힘든 전화면 받지 말아라. 내가 대신 받아줄 수도 있어.”
“아뇨. 받아야 돼요.”
민혁이 말했다.
선 사장은 민혁을 괴롭히는 전화가 무슨 전환지 궁금하기도 했고 민혁이 힘들어하면 전화를 뺏을 작정까지 서 있었다.
“민혁씨.”
민혁은 그의 목소리가 제 세포들을 깨우는 것을 느꼈다.
준.
준 맥브라이언. 왜 하필 그가 지금.
“안녕하세요.”
“안녕하진 못해요. 나는 지금 무척 피곤하고 기분이 나빠요.”
준이 말했다.
“유감스럽네요.”
“잘 통제되고 있었는데. 왜 그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실험체들이 달아났어요. 그런 일은 없었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지금 길게 통화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서요.”
“아뇨.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럴 수 없다뇨?”
“나중에 다시 전화할 수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왜요?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나요?”
“아뇨, 여행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제민혁씨가 될 겁니다.”
“제가요? 저는 여행 계획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셋에서부터 하나까지 거꾸로 세면 제민혁씨는 내 말대로 따르게 됩니다. 다른 것은 전혀 제민혁씨를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민혁씨는 나를 믿고 내가 인도하는 대로 내 손을 잡고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셋……. 둘……, 하나!”
선 사장은 자신의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혁은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어쩌면 몽유병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면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이제 막 한 걸음씩 옮겨보려고 시도하는 사람처럼 희미하게 걸었다.
민혁이 마침내 선 사장의 책상으로 갔을 때 민혁은 선 사장의 연필꽂이를 뒤집어 쏟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마트폰만큼은 고집스럽게 귓가에 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커터를 찾은 민혁이 커터 날을 끝까지 올렸다.
“민혁아!!”
선 사장이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다가갔지만 민혁은 오히려 그것으로 선 사장을 위협했다.
“전화를 끊어. 전화를 끊어라, 민혁아!!”
하지만 민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귀에 선 사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선 사장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문가로 달려가며 지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빨리 와줘, 지명아. 민혁이가 이상하다. 민혁이가 이상해!!”
지명이 사람들을 데리고 왔을 때, 비서실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아버지는요!!”
지명이 외쳤지만 모두들 지명을 외면했다.
기선이 한 사람을 붙잡고 소리쳐 물었다.
“사장님은 지금 안에 계신 겁니까?”
“사장님이……. 살인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곧 경찰이 올 거예요.”
지명은 사장실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시영과 연우가 뛰어들어왔고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1층까지 내려갔던 엘리베이터는 소명을 싣고 올라왔다.
“문이 안 열려요. 아버지!! 아버지!!”
지명의 고함소리를 듣고 소명이 복도를 달려갔다.
사람들이 소명을 돌아보는 순간 소명은 손을 감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 손잡이 위쪽에 주먹을 갖다 꽂았다.
와지끈, 문이 부서지는 소리는, 넋을 잃고 문에 기댄채 주저 앉아있던 선 사장의 정신을 깨울 정도였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지명은 선 사장을 끌어 안았다.
“아……!!”
연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기선도 연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피칠을 한 민혁이 목이 반 이상이 잘려나간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선 사장은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민혁이가 그런 거야. 전화를 받고 홀린 듯이 움직이더니 칼로 제 몸을 긋고 결국에는 제 목을……!!”
선 사장은 민혁을 잃은 그 순간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느라 민혁에게 죄를 씌우는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이 되어 오열했다.
“민혁아. 민혁아!!!”
지명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연우가 시영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하시는 게 아니야. 알지?”
연우의 말에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시영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연우가 아닌 시영이 처음으로 직접 자기 명함을 건네는 순간이었다.
“희생자는 퓨쳐 컨트롤의 최대 주주 제 민혁씨입니다. 삼촌인 제 도씨로부터 최근에 상속을 받았지요. 삼촌은 씽크홀로 퓨쳐 컨트롤 본사가 있던 건물이 무너졌을 때 건물에 있다가 사망했고요. 그 충격뿐만 아니라 제 민혁씨는 심각한 추상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절망했을 겁니다. 위안을 얻고자 여기에 왔다가 아마도 다시 감정이 격해진 것 같습니다. 제 의뢰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시죠. 그 사람과의 통화로 감정이 격해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 수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이런 일을 접한 경험이 많지 않았는지 불편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살을 할 수도 있습니까?”
시영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심각한 추상장애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어머니까지도 아들의 얼굴이 저렇게 된 후로는 전혀 왕래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 마음의 상처가 어땠을지 짐작해 보십시오.”
기선은 도무지 이해시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던 상황을 시영이 이해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혁에게 평생 추상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이 기선이라는 얘기도 불가결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영은 기술적으로 요철을 만들어가며 정작 중요한 얘기들은 어렴풋이 가려지게 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요인에 집중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