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 / 0101 ----------------------------------------------
준은 웃음을 지었다.
“원숭이가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건가?”
희영이 눈을 뜬 채로 환각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지명은 사이크에게 전화를 걸었고 기선은 희영에게 다가갔다.
“희영아. 나야. 기선이. 내가 네 앞에 있어. 너는 빠져나올 수 있어. 너는 안전해. 어떤 위험도 너한테 미치지 않을 거야. 쉬이. 숨을 깊이 쉬고 내 냄새에 집중해봐. 나잖아. 기선이잖아.”
기선이 천천히 희영의 얼굴을 감싸안아 제 가슴에 묻고서 희영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희영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기선이 희영의 몸을 떼내고서 두 손으로 희영의 얼굴을 감쌌다.
희영의 앞에서 무릎 꿇은 채 기선이 희영을 바라보자 희영이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울먹거리더니 울음을 쏟아내면서 기선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매달렸다.
한참을 그냥 울게 하다가 기선이 희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선이 지명을 바라보았다.
“사이크를 부를 필요 없어. 부르더라도 아침이 되면 그때 보자고 하자. 그리고 지명이 너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이제 희영인 괜찮은 것 같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누나?”
지명이 희영에게 묻자 희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도움도 안 됐는데요, 뭘. 그리고 제가 데려온 미친 놈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제가 미안해요.”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우선 지금은 각자 쉬자.”
기선이 말하자 지명이 희영의 손을 꼭 잡아주다가 그들의 침실을 나갔다.
“내가 욕심 부려서 이렇게 된 거예요.”
희영이 풀죽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욕심?”
기선이 희영을 침대에 눕혀주면서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없는 것 같아서 사이크를 졸랐거든요.”
“정인씨도 아직이잖아.”
“정인이는 어리잖아요. 나는 한 사람 몫을 다 하고 싶다고요.”
“왜 너한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기선이 무릎으로 희영을 넘어가서 그 옆에 누우며 물었다.
“그건 물을 것도 없잖아요. 나도 정말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요. 이젠 미래신문도 오지 않잖아요. 버스정류장에 나가서 모두가 기다려 봤어도 더 이상 5515K는 오지 않고.”
“그리고?”
“나도 미래씨에 대한 얘기 들었어요. 그 타투에 대한 것 말이에요. 뭔가가 있는 거잖아요. 누가, 왜, 우리 몸에 금속체를 넣었는지 알아야 돼요. 이게 위험한지도 알아야되고 이걸 제거하는 게 좋은 건지도 알아야 하고.”
“그건 사이크가 계속 알아보는 중이잖아.”
“싱크홀 사건 이후에 다들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한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이 우리한테 뭘 바랐던 건지도 알아야 될 것 같고.”
“그래. 그렇게 할 거야. 조바심 내지 않아도 돼. 그런데 희영이 네가 모르는 게 뭔지 알아?”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당연하지.”
기선이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아. 네가 나를 지켜주려고 어떤 싸움을 싸워냈는지. 너는 미리부터 장담했고, 장담한 대로 약속을 지켰지.”
희영도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넌. 내가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나를 붙잡아 줬어. 내가 작은 형 때문에 완전히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 너는 나를 일으켜줬어. 나를 전적으로 믿어줬고, 믿음이 뭔지를 보여줬어. 너는 나를 만들어주는 사람이야. 그런 능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기선의 말에 희영이 슬쩍 웃음을 띄웠다.
“어때? 기분이 좀 나아져?”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달구는 능력도 너만 가지고 있고.”
기선이 웃으면서 희영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튼튼한 부품 하나가 있는데.”
“그래요? 확실히 튼튼해요?”
“응, 자는 동안에 봐뒀는데 잘 맞을만한 구멍이 보이더라?”
“자는 동안에 봐뒀단 말이죠?”
“응. 워낙 중요한 부품이라 함부로 굴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잘 보관할 장소를 찾고 있었지.”
능청스런 기선의 말에 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잊지 마. 그걸 잊는 건, 내 감정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거랑 마찬가지야.”
“알았어요. 그 말 꼭 기억할게요.”
“너는 약하지 않아. 너는…….”
기선은 희영이 자신을 해치지 않으려고 심장박동을 스스로 통제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일을 겪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사이크가 장 항에게, 장 항이 스스로 금속체를 싼 막을 형성한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오래된 미스터리가 풀렸다.
“희영이 너는 나를 강화해주는 능력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긴. 기선씨를 강화시키는 건 내가 잘하긴 하죠.”
벌써부터 단단하게 굳어가는 페니스를 손으로 감싸쥐며 희영이 말하자 기선이 눈을 감으며 뜨거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희영이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랑해요.”
허스키하게 흐느끼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가 전율했다.
희영의 혀가 그의 귓불을 간질이다가 귓바퀴에 질척한 소리를 내며 머물렀다.
그는 중심을 찌르듯 관통하는 느낌에 주먹을 쥐었다가 팔을 들어올려 침대의 헤드를 밀었다.
“으흐으읏!!”
희영이 기선에게 키스하자 두 사람의 혀가 얽혀들었다.
“나도 내 비밀을 말해줘야 하나?”
“아뇨. 이미 다 알아요. 나를 사랑하잖아요.”
“비밀이었는데.”
기선은 희영의 키스를 방해하지 않으며 은밀하고 조용하게 희영의 옷을 벗겨냈다.
드러난 허벅지에 단단하게 일어선 페니스의 압력이 느껴지자 희영도 더 이상은 한가롭게 미소짓고 있기가 버거웠다.
희영의 호흡이 가빠지자 기선은 피가 머리끝까지 끓어 올라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기선이 희영을 끌어당기자 희영은 양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희영의 벗은 등을 쓰다듬으며 그는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를 벗겨줘.”
희영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칠 것 같아.”
희영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빨리 절정에 이르렀고 그 순간을 오래 지속했다.
그는 희영의 미간이 자꾸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그 사이로 나온 혀로 그의 얼굴이며 목이며 가슴을 적시다가 희영이 성급하게 그의 페니스를 꺼내 쥐었다.
“안에 사정해 줘요. 미치겠어요.”
희영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의 페니스가 순식간에 단단해지며 스스로 희영을 뚫으려는 듯 희영의 허벅지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으으윽!!”
희영이 기선의 페니스를 붙잡고 자신의 안으로 집어넣고 허리를 움직이며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자 기선이 희영의 엉덩이에 두 손을 올려 끌어 당겼다.
깊숙하게 그의 페니스가 들어가자 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거친 숨을 연거푸 토해냈다.
그 표정만 보고 있자면 갑자기 희영의 가슴에, 어디선가 화살이라도 날아든 게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드라마틱했고 격정적이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기선은 자신의 페니스를 문채로 강하게 수축하며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희영의 안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며 사정했다.
희영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의 가슴 위로 무너져 내렸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고 숨을 몰아쉬는 육상 선수처럼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안에서 격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느낌이 희영의 안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말 좋았어.”
희영이 일단 섹스에 집중하기만 하면 오랫동안 즐기는 건 힘들었다.
희영의 몸은 기선이 주는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에게 모든 세포가 일어나 호응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번, 기선의 얼굴을 스크린 삼아 다른 영상이 떠오르려고 했다.
집요하게 한 남자가 희영을 찾아내려고 했고 다시 희영과 눈을 맞추고야 말겠다는 듯이 존재감을 나타나려 했지만 희영은 그 영상에 눈 감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했다.
스크린이 된 것이 기선의 얼굴이었기에 쉬웠던 것인지도 몰랐다.
기선은 그저 희영을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려 주었다.
왜? 무슨 일이야? 라고 묻지도 않았다.
희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항상 네 앞에 내가 있어. 알지?’
희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기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제 퓨쳐 컨트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재난을 피한 운 좋은 회사로 이름을 떨쳤다가 그 후에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는 회사로, 그 후에는 바닥에 깔린 물량을 전부 흡수하며 석달 만에 주가를 20만원이나 끌어 올려놓은 것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선 사장이 기선과 희영을 같이 불렀을 때 두 사람은 무슨 일인지 아느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베리쳐 일이라는 것 밖에는 달리 말씀이 없으시던데.”
기선이 말했다.
사장실에는 지명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희영이 묻자 지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람을 불러 놓고 어딜 가 계신 건지.”
“어디에 가 있긴. 이 녀석아.”
때마침 선 사장이 들어왔고 지명을 꾸짖었다.
“무슨 일로 저희를 전부 부르셨어요?”
지명이 물었다.
“돈을 맡겨놨으면 맡겨 놓은 돈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어쩌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야?”
선 사장이 말했다.
“알아서 잘 하시겠죠.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좀 바빴잖아요.”
지명의 말에 선 사장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눈치였다.
“그래도 시험 잘 봐서 자랑하려고 기다리는데 도무지 얼굴 볼 기회가 안 생기면 기분이 어떻겠어?”
“아버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지명이 대신 해 주었을 뿐, 기선과 희영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테헤란로에 있는 고층 빌딩이 싱크홀에 사라진 건 분명히 엄청난 사건이었지.”
“그걸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지금 그걸 설명하려는 건 아니죠?”
지명은 계속 깐족거리다가 기어이 머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마. 민혁이는 내가 그렇게 권고를 했는데도 끝까지 버티질 못했다. 바닥일 때 던져버렸어. 아주 아주 안 좋은 결정이었지. 매도 타임을 잘못 잡는 바람에 민혁이는 제 도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의 20퍼센트 정도를 한 순간에 날려버렸거든.”
“허억, 그렇게나 많이요?”
기선이 물었다.
“제 도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이라고 말했을 때 20퍼센트를 날린 거지만 지금의 퓨쳐 컨트롤 주가로 계산해 보면 민혁이가 잃은 건 60퍼센트 가까이 될 거야. 주식을 끝까지 쥐고 있기만 했으면 그 녀석이 가진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을 텐데.”
“안타깝네요.”
희영이 말했다.
“누군가의 불운이 누구에겐가는 기회가 되는 법이죠.”
선 사장이 말했다.
“그 기회를 베리쳐가 잡은 건가요?”
희영이 말하자 선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요.”
선 사장은 그야말로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잔뜩 들뜬 채 말했다.
“네, 말해주세요.”
희영과 기선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직원이 달랑 셋인 베리쳐의 자산은 이제 1조가 넘어요.”
“허억.”
지명은 기선과 희영을 차례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