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1화 (1/101)

0001 / 0101 ----------------------------------------------

“여길, 어떻게 빌린 거래?”

희영이 작은 소리로 지명에게 물었다.

“거액의 기부금. 거기에 인맥 쌓는 걸 도와주기까지 하면. 사이크한테는 간단한 일인가 봐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지명도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값비싼 의료기기들이 즐비한 곳을 통째로 비우고 사이크에게 사용하도록 허가해 줄 병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이크는 그들이 하는 말에는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다못해 선우 형이 사이크에게 제발 고개 좀 놔 두라고 소릴 질렀다.

“의사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설명을 기다리는 환자가 얼마나 초조할지 아세요?”

“하지만.”

사이크는 뭔가 강변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아요. 일단 말해볼게요. 내가 예상했던 사람들한테서 모두 금속체가 발견됐어요. 그게 자랐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각자의 몸 속에서 발견된 금속들의 크기가 거의 비슷해요.”

사이크가 사진을 늘어 놓자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명이랑 연우씨한테는 이게 없어요. 알죠?”

연우를 보고 묻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연신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진 속에는 정인의 머리에 박힌 금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명이 정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주자 정인이 그 손을 꼭 쥐었다.

“수술을 받기는 했지만 이런 게 들어 있을 거라고는…….”

“가장 이상한 건…….”

사이크는 신중하게 말을 하더니 장 항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상대하기가 가장 어려운 장 항에게 그 말을 해야했다.

장 항은 두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사이크의 설명을 기다렸다.

“이것만 유독 하얀 뭔가로 감싸여 있어요.”

장 항은 고개를 떨구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군요.”

사이크가 말했다.

장 항은 말을 해야 할지 어쩔지를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아들 녀석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일 뻔 했죠.”

기선의 몸이 움찔했다.

지명도 기선이 놀란 것을 눈치챘다.

“두 개의 불규칙한 소리가 들렸어요. 하나는 심장의 고동 소리 같았는데 다른 건 어디에서 들리는 소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니 저기에서 난 소리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는, 최면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로렐라이 노래에 취하는 것처럼. 하지만 훨씬 더 나빠질 뻔했죠. 내가 죽게 됐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겁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아이의 얼굴을 팔로 누르고 있었어요. 그걸 깨닫자마자 나는 창밖으로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내가 아이의 곁에 있는 게 아이에게 위협이 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나를 붙잡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았을 겁니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는데 어떻게든 울지 않고 버티려고 참고 있었어요. 나는 아이한테, 너하고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해 줬어요. 아이는 괜찮다고 했어요. 우리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가 침대에 있는 동안 나는 다른 방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내 혈관을 떠도는 모든 것들에게 명령을 했죠.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해야만 했고 그게 성공해야만 했거든요.”

사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까?”

“아뇨.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어요. 결국 아이를 누나한테 맡겼어요. 누나는 중국에서 대학교수로 있어요. 아이가 없어서 늘 외로워했죠. 내 아들을 친아들 이상으로 예뻐해줬고요. 중국에 있는 누나한테 보낸 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아들을 찾으러 갈 것 같아서였습니다.”

“…….”

모두가 먹먹해진 가슴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길 보시면. 마치 태아가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한 과정으로 한 꺼풀의 막이 생겨나 있습니다. 이게 금속체를 감싸고 있죠.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그 소리가 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았던 것 같습니다.”

“태아요?”

장 항이 되물었다.

꺼림칙한 소리였다.

남자의 몸 안에 태아라니.

사이크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임신을 해서 태아가 만들어질 때는 세포들끼리 끊임없이 화학적 신호를 서로 전달한다고 해요. 하나의 세포가 다른 세포에게 신호를 주고 그 세포가 다른 세포에게 다시 신호를 보내면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관들을 만들어가고 피부를 만들어 씌우는 거죠. 이 신호가 제대로 작동해서 태아를 만드는 겁니다. 그것처럼 장 항씨가 세포에 명령을 내린 게 아닐까요? 서로 신호를 주고받도록. 금속의 고동소리가 들리지 못할 정도로 여러 겹으로 그것을 감싸도록 명령을 내려서…….”

사이크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희영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아주 희미한 시도였던 것 같기는 하지만 희영씨도 그 일을 시도했던 것 같아요.”

사이크의 손가락이 사진 속의 얇은 막을 더듬었다.

기선이 희영의 어깨를 감쌌다.

“왠지 점점 무서워지네요.”

희영이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기선씨를 공격하려고 시도했다는 거죠?”

희영의 말에 기선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러지 않았어. 너는 모든 힘을 다 해서 싸웠어. 그리고 이겨줬어.”

희영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희영은 크게 놀랐다.

“내가 정말 그런 거예요?”

“아니. 그러지 않!았!다!고!. 잘 들어. 희영아. 너는 그러지 않았어. 알았지?”

기선이 희영의 얼굴을 감싸고 두 눈을 들여다본 채 힘주어 말하자 희영도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아니. 내가 고맙다고 해야 돼. 고마워. 언제나 고마워.”

연우는 슬금슬금 시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고 시영은 어림없다는 듯 연우의 옷깃을 잡아채서 제 옆에 꼭 붙들어 놓았다.

“이제 와서 어딜 가려고.”

“너도 그랬을까?”

연우가 물었다.

“우리는 같이 자는 사이가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걱정이야?”

“뭐?”

연우는 지은 죄도 없이 얼굴이 붉어졌고 지명은 그런 연우를 보고 키득거렸다.

“이 금속체에서 일정한 규칙의 심장 고동 같은 게 느껴진다는 건 새롭게 알게 됐군요. 제 생각에는 이게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명과 연우씨는 제외하고요.”

사이크가 말했다.

“이게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들의 능력을 각성시킨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기선씨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건 그에게 어떤 특별한 종류의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거였어요. 그건 장 항씨가 가진 것과는 완전히 반대 의미의 겁니다. 치유하는 힘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선씨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아주 견고하게 해 줘요. 그 사람들이 가진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 위에서 단단하게 일어서게 해 주는 것 같아요. 제가 지명의 예전 모습을 알지 못했다면 기선씨가 가진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엉망이었던 때의 지명을 알죠. 그리고 지명을 바꿔 놓은 게 기선씨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희영씨도 기선씨의 곁에 있으면서 안정됐죠.”

희영도 사이크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 항씨야말로 그 능력이 아주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죠. 장 항씨는 한 사람의 내면에 떠도는 부정적인 감정을 캐치해서 그걸 극대화시키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대부분의 경우에 그건 공포지만 나는 장 항씨가 세밀하게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게 여러 가지 다른 양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죄책감과 직면하게 만들 수 있고 그걸 극대화시킬 수 있다면 장 항씨는 누군가에게 자살을 결단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모두들 사이크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멋진데? 기선이 형이 가진 능력보다 훨씬 멋지잖아?”

지명이 말했다.

“어서. 계속해 봐요.”

시영은 자기 차례에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한 듯했다.

하지만 사이크는 시영을 바라보더니 어설프게 웃음을 지었고 시영과 정인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저는요?”

희영이 물었다.

“아, 희영씨도요.”

소명이 손을 들었다.

“나는 어떤 것 같아요?”

“아, 소명씨에 대해서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나는 알 것 같아요.” 모두의 시선이 소명에게 향했다.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그 반대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오른 팔에 통증을 못 느껴요. 그리고 위력이 좀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와우, 너도 저런 능력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연우가 시영에게 말하며 괜히 부러워했다.

“통증을 못 느낀다는 건 확실히 해가 될 수도 있죠. 제동장치가 무너진 거나 다름없는 거니까요.”

사이크의 말에 소명이 샐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누나가 제일 멋진 것 같아요.” 지명이 말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줘서 고마워요.”

“아뇨. 말이라도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알았어요. 말이라도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네. 네에. 헤헤.”

아직 선우 형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다는 거야 모두가 느끼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좀 불공평하긴 하네요. 왜 누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는 거죠?”

지명이 말했다.

“지명씨가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 금속체도 없으면서.”

“누나. 그게 없는 게 더 좋은 것 아니에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누나는 꽝을 뽑은 건가 봐요.”

“어쨌거나 지명씨가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라니까?”

희영이 발끈하자 정인도 거들었다.

“그건 언니 말이 맞아요.”

“그럼 여자들 중엔 나만 있는 건가?”

소명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희영과 정인은 다시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제 생각엔, 장 항씨가 한 일을 여러 분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 항씨처럼 적극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여러분들한테도 잠재적인 능력은 다 있는 것 같거든요. 물론.”

“나랑 연우형은 제외라는 말은 안 해도 돼. 우리도 아니까.”

“그래?”

사이크는 지명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희영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 항에게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장 항은 저기가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려고 애쓰면서 그들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사이크가 지명을 불러냈다.

“왜? 나도 듣고 싶다고. 나도 언젠가 희한한 능력을 갖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때 금속체를 묶어둘 방법을 알아야 할 것 아냐.”

“너한테는 별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그보다 네가 알아줘야 할 일이 있어.”

사이크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지명이 그에게 다가갔다.

“미래씨하고 어떤 사이가 됐다는 건 설명했으니까 그 다음부터 얘기할게.”

“좋아. 말해봐.”

“미래씨랑 잤어.”

“알아. 네가 말했잖아. 누나도 말했고.”

“우린 좋은 관계로 발전해가는 중이야.”

“그것도 알아. 축하해. 네가 누나 때문에 한국에 남기로 결정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나도 네가 한국에 남게 돼서 기뻐.”

“내가 하려는 얘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래. 말해 봐.”

“미래씨의 타투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타투? 어디에?”

“목. 뒷목. 머리카락이 나는 선 바로 아래에.”

“나는 몰랐는데?”

“붉은 번개 모양의 타투가 있어. 그런데 미래씨는 몰라.”

“좋지 않게 들리네. 아버지 얘기가 갑자기 떠오르는데?”

“무슨 얘기?”

“어떤 채무에 연대보증을 하고 사인을 했는데 아버지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래. 영상 속에서 아버지는 분명히 사인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보고도 전혀 기억을 해 내지 못하셨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야.”

“뭐가 또 있는데?”

“붉은 번개. 내가 이걸 찾아냈어.”

사이크가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창을 띄웠다.

Red Lightening`s Crack.

“붉은 번개의 틈?”

“붉은 번개의 틈?”

지명이 되물었다.

“응.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칼 맥브라이언에 의해 주창된 이후 영향력 있는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가 되면서 수많은 추종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들은 하늘에 붉은 번개가 칠 때 하늘에 생긴 틈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 구원이란, 붉은 번개가 치는 틈으로 외계의 고등한 생명체가 지구의 열등한 생명체들을 건져준다는 의미였다.

마치 빈민가에 리무진이 와서 멈춰 아무 조건도 없이 한 아이를 데려다가 미국의 최상류층 중에서도 상류층의 삶을 살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더 이상 지구에서의 비루한 삶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칼 맥브라이언은 지금도 건재하며 외계 생명체와 지구인들과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그가 메신저로 있는 동안 수많은 교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 구원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다.

붉은 번개의 틈에 속한 사람들은 몸의 일부에 R.L.C. 라는 이니셜을 새겨 넣음으로써 하늘에 틈이 열렸을 때 외계의 구원자들이 자기들을 즉각 알아봐주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누나한테 붉은 번개 타투가 있었다고?”

지명이 놀란 눈으로 묻자 사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지명이 물었다.

그 말에 사이크는 크게 모욕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거야?”

“누나가 혹시라도 그 교단과 관계있는 사람이라면…….”

“미래씨가 나를 속인 거라면 모르겠지만 미래씨가 나를 속인 것도 아니고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후에 나타난 문제야. 이게 우리 사이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거야.”

“그래도 이건 중대한 문제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걸어다니고 무슨 짓인가를 저지르고 다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너희 아버지도 그러셨다면서.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서 네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어?”

사이크의 강경한 말에 지명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미래 누나를 그 정도로 생각하는지 몰랐어.”

“너랑 사람들을 여기로 부르기 전에 미래씨가 먼저 여기에 왔다 갔어. 미래씨한테도 금속체 같은 게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

“그런데?”

“없었어.”

“다행이네. 다행인가? 모르겠다.”

“응. 나도 아직 모르겠어.”

“아버지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 번개 타투?”

“번개 타투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붉은 번갠지가 중요해.”

“왜 하필 붉어야 된다는 거야?”

“보통 번개는 붉지 않으니까. 그리고 번개는, 친 다음에 보거나 하지 번개가 치는 순간 보고 있지는 않잖아. 몇 사람이 소리 높여서 주장한다고 해 봐. ‘방금 붉은 번개가 쳤어.’라고.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야.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만 그걸 주장할 수 있을 거라고. 언제 칠지도 모르는 번개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번개가 무슨 색이었는지를 말한다는 건 어려워. 그리고 번개 색깔을, 도대체 너는 무슨 색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군. 표현의 공백에 놓인 문제인 거야.”

“앞으로 붉은 번개의 틈을 주시해 볼 생각이야. 혹시 미래신문이랑 거기가 연관되는지도 모르고.”

“그건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긴 해.”

“사람들한테 그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지명이 물었다.

“네가 믿는 사람들이잖아. 적어도 기선씨한테는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지명은 한 짐을 벗었다는 듯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5515K에서 내린 남자가 버스 기사와 함께 나란히 서서 버스를 바라보았다.

“이젠 안녕인가?”

중절모를 쓴 남자가 웃으며 말하더니 모자를 벗었다.

그의 머리가죽에 붉은 번개가 새겨져 있었다.

“그 사람들, 오늘도 버스 정류장에 와서 기다렸을 거야. 떼를 지어서 나와서 기다렸겠지.”

버스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말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 그럼. 앞으로도 잘 살라구. 이제 나는 떠날 시간인 것 같거든. 이 버스를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결정하도록 해. 팔아서 그 돈을 가져도 되고 개조해서 써도 되고.”

그리고 그는 다시 모자를 눌러쓰며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