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을 꿈꾸는 늑대-114화 (114/128)

낭만을 꿈꾸는 늑대 114부

법암과 장모가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20년 넘게 싸이고 싸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두 사람의 눈물과 함께 맑게 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영은 사군자들로부터 갈치파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무석과 장로원이 자신과 사부를 배신하고 조직까지 장악했다고 한다. 더욱이 조직을 장악한 무석은 지금까지 갈치파의 고향과 같은 인천을 비우는 극한의 처방을 하면서까지 서울로 진격했다고 한다. 이건 자살행위다. 만일 천랑파의 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천랑파는 서울보다는 인천을 밀고 들어올 것이다. 왜 그걸 생각지 못한단 말인가? 수영은 조직에 대해생각 하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자신이 지금 누굴 걱정하는 것인가? 자신과 사부를 배신한 그들을 걱정하고 있다니 참 웃기는 일이다. 몸에 밴 오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수영은 고개를 흔들고 사부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조직의 일보다는 가족간의 일을 생각할 때다.

“이제 두 분 화해하신 겁니까?”

“그래. 그동안 내가 장모님을 오해한 부분도 많았구나. 또 설렁 섭섭한 일이 있었더라도 20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다. 하늘에 있는 부인도 내가 장모님과 싸우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네가 바보였어. 왜~ 그걸 이제야 깨달았는지.........장모님 그동안 원망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나 자네 아버님이 두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이제라도 이렇게 자네에게 용서를 빌었으니 이제 죽어서 저승에 가서라도 웃으면서 딸의 얼굴을 볼 수 있겠네 그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무슨 말씀을 하세요. 이제부터 외손자도 만나보시고 증손자도 보시려면 오래오래 사셔야죠. 수혼이 그놈 부인들이 많아서 증손들도 많이 태어날 겁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내 손자 놈인데 어련하겠어.........그래 나도 손자 놈이 보고 싶군.”

“그럼 저랑 일산으로 같이 가시죠. 수영아~ 너도 오빠에게 정식으로 인사해야지.”

“오빠?............아~ 예! 인사해야죠. 사부님은 어떻게 하실 거죠. 아버님이랑 함께 오빠가 있는 일산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수영이도 정식으로 오빠를 만나봐야지.”

“사부님..........사군자에게 들으니 조직의 상황이 좋지 않아요. 원로원과 무석이가 조직을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먼저 조직의 일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끝내 원로원이 조직을 장악했단 말이지.........인천을 포기하고 서울로 진격했어.........휴~ 조직의 일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먼저 일산으로 가서 수혼을 만나보자구나.”

“알겠습니다. 사부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수영아. 이젠 그냥 할미라고 불러줄 수 없겠니.”

“예?..............하지만.........알겠습니다.........할머니.”

“그래~ 우리 예쁜 수영이~ 그동안 못난 할미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다. 자자~ 우리 오빠를 만나려 가볼까?”

중심을 못 잡고 차선을 넘다들던 강기의 차가 사거리로 들어섰다. 강기는 팔에서 전해오는 심한 통증 때문에 자꾸만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무석에게 원예와 대사부가 탈출 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무석에게 알려 갈치파의 화랑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원예와 대사부가 조직으로 돌아오는 일은 막아야한다. 아직 조직에는 원예와 대사부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다. 그들이 돌아간다면 조직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원로원을 따르는 무리들과 원예와 대사부를 따르는 무리들로 편이 갈린 것이 자명한 일이다. 파가 갈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강기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눈꺼풀은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고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강기의 희미해진 눈동자에 자동차 한대가 자신을 차로 돌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의 차가 미쳤나.’ 하지만 미친 건 달려오는 차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 자동차다. 자신이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사거리로 뛰어든 것이다.

“빵아~ 앙~~~”

“쾅~~~”

강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달려오는 차가 또렷하게 보였다. 상대편 차는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차량이었다. 그 차는 느린 속도로 자신의 조수석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강기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강기의 차는 무섭게 달려오던 상대편 차와 충돌하며 튀겨 나갔고,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온 강기의 차와 충돌했다. 흔들리는 차에서 강기는 환상을 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수지와 꽃밭에서 뛰어노는 환상이다. 어린 적 수지와 자신과 꽃밭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해맑은 미소를 지어준다. 바람이 불어와 민들레 씨앗들이 날아오른다. 수지와 자신은 민들레 씨앗이 날리는 꽃발에서 마냥 행복하게 뛰어놀았다. 그게 끝이다. 더 이상의 환상은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이 무겁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진다. 강기는 끝내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법암 일행은 일산으로 출발했다. 수영은 차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자신의 신상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모님의 가슴 아픈 과거지사를 알게 되었고 20년 동안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던 아버님을 만났다. 갈치파의 수장자리에서 쫓겨나고 강기에 의해 감금당하는 고초도 당했다. 하지만 지금 수영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생각은 수혼에 대한 생각이다. 수혼은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게 해준 유일한 남자다.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다. 자신을 버리고서라도 사랑하고 싶었던 남자다. 그 남자가 오빠가 되었다. 자신의 친오빠가 된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수혼을 오빠라고 인정하면 문제는 간단해 진다. 수혼과 자신이 친남매라고 인정하면 더 생각할 것도 없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친남매이기에 앞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가? 수영의 작은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란은 수영을 힐긋힐긋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우수에 젖은 표정에서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자신도 수혼과의 사랑에 실패하고 칼로 가슴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아픔을 격지 않았는가? 원예님도 지금 아파할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민할 것이다. 란은 한숨을 쉬었다. 수혼이란 남자.........정말 나쁜 자식이다. 자신을 아프게 하더니 이젠 원예님까지 아프게 한다.

수혼이 있는 저택에 2대의 택시가 도착했다. 2대의 택시에서 법암일행이 내린다. 정문을 지키던 보초는 법암과 수영을 기억한다. 그는 법암과 수영이 같이 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명은 천랑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다. 한명은 갈치파의 수장이라고 알고 있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다정해 보인다. 녀석은 자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했다.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수혼은 자신의 서재에서 검법에 대해 연구하다가 길식에게 아버님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혼은 부인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부인들도 모두 수혼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버님을 들어오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다. 수혼은 6명의 부인들과 정문으로 뛰어갔다. 정문이 가까워지며 수혼의 눈에 수영과 수지의 얼굴이 들어왔다. 갑자기 수혼의 발걸음이 무거워 진다. 수영의 옆에는 고집스럽게 생긴 한 노파가 서 있었고, 수지의 옆에는 가끔 갈치파와의 전투에서 보았던 2명의 여인도 있었다. 수혼은 자신이 손수 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버님 다녀오셨어요.”

수혼과 6명의 부인들이 법암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다들 잘 있었어. 뭘~ 이렇게 단체로 나왔어. 하하하~ 하여튼 잘됐어. 모두 인사드려 외할머니시다.”

“저.........저분이 수영이 사부님.”

수혼은 촉촉하게 젖은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파를 보았다. 저 사람이 수영의 사부님이며 자신의 외할머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보지 못한 외할머니다. 수혼이 할머니를 보고도 멍하니 있으니 지나가 수혼의 손을 잡아 외할머니 앞으로 끌고 갔다. 외할머니는 수혼을 유심히 보았다. 수혼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수혼을 1년간 자신의 손으로 키운 적이 있다. 그때 당시는 수혼이 겨우 기어다릴 정도의 핏덩이에 불과 했다. 그러던 놈이 이렇게 당당한 청년이 되어 자신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수혼도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그녀의 눈물이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수혼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만든다. 가슴이 찡하고 울컥하는 감정의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이다. 수혼의 무릎이 굽혀진다.

“할머니 손자 수혼입니다.”

수혼이 땅바닥에 큰절을 올리자 수혼을 따라온 6명의 부인들도 수혼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예쁘게 봐주세요. 수혼씨의 내자되는 사람입니다.”

외할머니는 수혼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수혼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래........이놈 어디보자. 많이 컸구나. 그래 어릴 적에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할...........할머니.”

수혼은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주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수혼은 외할머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할머니는 수혼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녀는 수혼의 등을 토닥거린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녀는 수혼이 어릴 적에 병든 어미대신 수혼을 돌봐주었다. 그때 수혼은 자신의 품에서 포근히 잠들곤 했다. 그 어린놈이 이렇게 장성해서 다시 자신의 품에 안긴 것이다.

수영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수혼과 할머니가 20년만의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장면이지 않는가? 수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코끝이 찡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수혼씨 뭐하세요. 빨리 안으로 모셔야죠?”

“아~ 내 정신 좀 봐~ 할머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들어가자.”

수혼은 할머니를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수혼의 부인들이 따른다. 수영은 멍하니 수혼과 부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빠에게 부인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들을 한번 이상은 모두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다정하게 보인다. 그 모습이 보고 있노라니 가슴 한쪽이 허전해 진다. 그때 란이 수영의 손을 잡는다.

“우리도 들어가요.”

“응~ 그래야지. 자~ 우리도 들어가야죠?”

수영과 사군자도 수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천랑파의 거대한 저택과 엄청난 인원에 놀라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침 친위대가 체육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또한 정원 한쪽에서는 새롭게 편성된 기동대가 한참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혼의 모습을 발견하고 모두들 수혼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수영은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수영은 정원 한쪽에서 훈련하고 있는 사내들이 저번전투에서 맹활약한 천랑파의 친위대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수혼에게 인사하고 체육관으로 뛰어가던 사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지금까지 천랑파의 대결에서 검으로 무장한 부대는 없었다.

“방금 지나간 사람들은 누구죠.”

수영은 마음속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던 링링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수혼과 부인들은 수영이 수혼의 이복남매라고만 알고 있고 있으며 그녀가 갈치파의 수장자리에서 쫓겨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천랑파에서 친위대의 존재는 기밀에 속한다.

“말해주어도 되는 건가? 쩝~ 이거 대답하기 곤란하네. 아저씨 뭐라고 대답해.”

앞서가던 수혼이 링링을 보고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가 남이가? 그냥 말해주면 되지 뭘 물어봐.”

“치~ 아저씨는 링링이 구박하는 재미로 살지. 아이 정말~ 속상해...............친위대예요.”

“치.......친위대? 저기 정원에서 훈련하는 사람들이 친위대 아닌가요?”

“저들은 기동대인데요.”

“아니 전번 전투에서 저들이 활약하지 않았어요. 내 기억이 확실한데........그때 본 사람들도 있고........저들이 정말 친위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아~ 그때는 별동대라고 불리던 부대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에요. 전번 전투에서 별동대에 사상자가 많이 발생해서 이번에 기존의 기동대와 별동대를 통합했어요.”

“.........그때 출동한 부대가 그럼 별동대? 그럼 친위대는 어떻게 된 거죠? 저들은 한번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예. 친위대는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았어요. 훈련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었죠. 그게 이상해요?”

“하~~ 정말 할말이 없군요. 지금까지 우린 천랑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군요. 최정예부대인 친위대는 아직 그림자도 못보고 있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무석이는...........휴~”

수영은 습관적으로 갈치파에 대해서 생각했다. 갈치파는 지금까지 천랑파의 전력에 대해서 철하게 오판하고 있었다. 천랑파는 자신들의 최정예부대를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무석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서울전역으로 진격하고 있다. 수영은 갈치파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수혼은 할머니와 수영일행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람들이 모두 응접실에 앉자 부인들이 밖으로 나가 다과를 준비해 와서 테이블에 올리고 그녀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이 처자들이 모두 네 부인들이냐.”

“헤헤~ 좀 많지요? 그러고 보니 소개도 못했네요. 이쪽은 제 사매이자 부인인 지나입니다. 이쪽은 월아문의 전인들인 미나, 미희입니다. 이쪽은 국선도문의 제자인 링링입니다. 이쪽은 일본 인자문의 전인인 요키에고 마지막으로 요코입니다.”

수혼이 차례차례 소개하자 여인들은 수혼이 호명한 대로 일어나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들 반갑구려. 내가 저놈의 외할머니 되는 사람이라네. 그리고 이쪽은 수영이라고 자네들에게는 시누이가 되겠구만. 수영이도 일어나서 오빠와 언니들에게 인사야지.”

사부의 말에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오빠의 동생인 조수영이라고 합니다.”

“조........수영? 수영씨 성이 조가였어.”

수혼이 물어보자 수영이 대답대신 수혼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동안 친오빠인지도 모르고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해요. 정식으로 인사드려요. 조수영입니다.”

“하..........할머니 어떻게 된 거죠. 아버지. 수영씨 말이 사실인가요. 제 친동생이 맞아요?”

“휴~ 이 할미가 설명해 주마.”

그녀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수혼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수영은 자신의 친동생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수영을 출산하고 병마와 시름하면서도 아버지와의 만남을 위해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말에 끝내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법암도 한번 들었던 이야기지만 다시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군자와 부인들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훌쩍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끝났다. 수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에게 다가갔다. 수영의 뺨에도 눈물이 흐려 내리고 있었다. 수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친동생이로구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정말이구나. 네가 친동생이야. 이렇게 예쁜 수영이가 친동생이야.”

“오.........오빠~”

수혼은 수영을 안아준다. 수영은 힘없이 수혼의 품에 안긴다. 따뜻하다. 달콤하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품인가. 얼마나 안기고 싶었던 가슴인가? 수영의 손이 올라와 수혼을 안아주려다 다시 힘없이 내려간다. 안된다. 이 사람은 친오빠다. 그는 단지 동생으로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감정은 지워야한다. 수영의 눈에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린다. 무슨 의미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기쁨의 눈물일까? 자신도 모르겠다. 수혼은 수영을 풀어 준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일걸. 이렇게 아름다운 누이동생도 생기고 외할머니도 생기고.......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 부인들 우리 잔치하자. 이대로 넘어갈 수 없잖아?”

“좋아요. 저희가 준비하죠. 오늘은 성대한 잔치를 해요. 이렇게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났는데 잔치라도 하지 않으면 섭섭하겠죠.”

“이제 사부님만 오시면 되겠네요. 그렇죠.”

지나가 한마디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수혼의 할아버지만 모이면 전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이다.

“맞아. 이놈의 영감탱이 어디 숨은 거야. 아버지 혹시 할아버지 어디 숨었는지 아세요?”

“허허허~ 글쎄. 옛날에는 숨어 다니는 분이 아니셨는데 손자 보기가 무서운 모양이구나.”

“하여튼 나타나기만 해봐~ 수염을 몽땅 뽑아버릴 거야.

“하하하~ 아버지도 손자에게는 앞에서는 꼼짝 못하시는 모양이네.”

수혼은 수영을 자리에 앉히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럼 우리들은 음식준비를 해야겠네요. 자~ 모두 일어나.”

미희가 이야기하자 수혼의 부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5층으로 올라갔다.

“참~ 수영씨하고 할머니가 오신 건 알겠는데..........수지씨와 다른 아가씨들은 무슨 일이죠. 할머니를 모시고 오신 건가?”

“그동안 갈치파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수영아~ 네가 설명해 주겠니.”

“사부님 갈치파 내부의 일인데 이야기해도 될까요?”

“이야기해~ 수혼이 말대로 우리가 남이냐. 우린 그동안 천랑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들어올 때 보았던 녀석들이 친위대라고 했나. 숫자가 얼마나 되지.”

“5백 명입니다. 천랑파 최고 실력자들이죠.”

“화랑들과 비교하면 어때.”

“아직 제가 바라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했지만 지금 출동해도 화랑들에게 밀리지 않을 겁니다.”

“화랑들과 대등한 실력들이란 말이지.”

“예~ 하지만 저들만 가지고 갈치파가 숨겨두고 있는 전력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그건 무슨 소리야.”

“전 현재의 화랑들이 갈치파 전력의 전부라고 생각지 않아요. 우리가 친위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갈치파도 숨겨둔 부대가 있겠죠. 친위대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허~~ 정말 할말이 없군. 어떻게 우리가 숨겨둔 전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확실한 물증은 없어요. 다만 그렇게 짐작하고 있을 뿐이죠. 갈치파는 제1차 서울침공 때 서울을 정복하고도 아버지에게 대부분의 화랑들이 희생당해서 나중에 강철파라는 의외의 적을 만나 그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을 포기해야만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아픈 과거가 있는 갈치파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시 서울을 침략했을까요. ‘정상에 오르기보다 정상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라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낀 갈치파입니다. 그런 갈치파이기에 과거를 겨울삼아 서울을 정복한 다음 서울을 지킬 병력을 따로 양성하고 있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어요.”

“허~ 그동안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를 알겠군. 우리 속을 환히 꿰뚫고 있으니 당할 수밖에.........그래 우리가 뒤에 감추고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될 것 같아. 그것도 짐작하고 있겠지.”

“최소한 지금 활동하는 화랑들과 같은 수의 병력이 아닐까요? 갈치파가 처음 서울을 침공할 때 1천 화랑이었으니 뒤에 감추고 있는 화랑도 최소한 1천은 될 것으로 짐작합니다.”

“완전히 점쟁이가 따로 없군. 허허~ 그럼 친위대가 1천 화랑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되나. 친위대 한명에 두 명의 화랑은 상대할 수 있다............이런 말이지.”

“그 정도는 기본이죠. 제가 원하는 건 더 높은 걸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그 정도 실력은 안 됩니다. 자~ 이제 갈치파 내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수영은 수혼과 사부의 대화를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수혼은 자신들의 현재 전력뿐만 아니라 숨기고 있는 전력까지 손바닥 보듯 환하게 보고 있었다. 더욱이 그 대비책까지 완벽하게 마련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까지 자신은 부처님 손바닥위에 손오공처럼 수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휴~ 정말 할말이 없군요. 맞아요. 오빠의 예상대로 1천 화랑들이 비밀리에 훈련하고 있어요. 전대 사군자가 모종의 장소에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있죠.”

“전대 사군자.........음~ 그렇군. 그건 나도 그건 생각지 못했는데........전대 사군자가 살아있단 말이지. 그들이 1천 화랑들을 훈련시키고 있단 말이지.”

“1천화랑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것보다는 아침부터 서울전역에서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어요?”

“아침부터 서울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단 말이야. 현장에 있는 호식이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그런데............”

“지금 현재 갈치파는 서울로 진격하고 있어요. 성민파가 차지하고 있던 구역을 접수하기위해 오늘 아침에 인천을 출발했어요.”

“성민파 구역을 접수하시겠다. 마음대로 해. 우린 성민파 구역에 관심 없어.”

“역시..........제 예상대로군요. 저도 오빠가 성민파 구역에 관심 없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어요. 정말 성민파 구역을 포기하시는 건가요?”

“우린 말이야. 현재 구역만 가지고도 불만 없는 사람들이야. 갈치파가 우릴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가 갈치파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사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갈치파를 부셔버릴 생각도 했었어. 그래야 할머니와 수영씨가 우리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잖아. 할머니와 수영씨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고........이젠 한 식구 아닌가? 굳이 싸울 필요 없잖아?”

“그렇게 쉽다면 저도 좋겠어요. 하지만 갈치파 내부에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오빠와 친남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원로원이 저와 할머니를 배신했어요.”

“원로원?.......할머니와 수영씨를 배신해? 아니 할머니는 갈치파를 만드신 분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수영씨는 갈치파의 수장 아니야. 그런데 그들이 배신했단 말이야. 허허~ 참~ 아주 죽으려고 발악을 하네. 그 사람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야. 아니 수영씨와 할머니가 있어도 우리 상대가.........관두자. 하여튼 이것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감히 배신을 해........가만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했다고 했지. 갈치파에 그만한 여유 전력이 남아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 없다고 알고 있는데..........혹시 인천을 비워두고 서울로 진격하는 건가?”

“할말 없게 만드네. 정말 오빠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네요? 어떻게 갈치파가 서울로 진격했다는 말만 듣고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죠?”

“쩝~ 그냥 조금만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 아닌가? 멍청한 새끼들~ 자신들의 구역을 버리면서까지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하여튼 할머니와 수영씨를 배신하고 그들이 인천까지 버리면서 서울로 진격했다면 우리와 본격적으로 붙어보겠다는 말이군.”

“그래요. 설명은 필요 없겠군요. 지금 갈치파에서 우리 편은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에요.”

“할머니 한 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제가 갈치파를 부셔버려도 되겠습니까? 듣고 보니 성질이 나서 용서가 안 되는 군요.”

“감히 우리 손자를 못살게 구는 녀석들인데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겠지.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니. 그들 중에는 아직 우릴 따르는 무리들도 많아. 그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넘기 수는 없지 않느냐?”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죠. 성질 같아서는 지금당장 인천부터 초토화 시켜버리고 싶지만 참도록 하죠.”

“인천?.........서울이 아니고?”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집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죠. 그런 상식도 모르는 놈들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인천부터 초토화시켜버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작가주 :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整齊)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

“자~ 갈치파에 대해서는 대충 들어서 알겠어요. 수지씨 오랜만이네.”

“아~ 안녕........하세요.”

“웬 존댓말. 우린 친구잖아. 옛날처럼 편하게 말해. 그리고 다른 분들도 반가워요. 이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들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천랑파에 와서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그렇죠. 세상사 그래서 재미있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가 이렇게 웃으며 만나줄 알았겠어요. 자자~ 모두 5층으로 올라가시죠. 오늘은 기쁜 날이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즐겁게 즐기도록 해요.”

그때 요코가 들어왔다.

“수혼씨 식사 준비가 대충은 끝났어요. 5층이 아니라 연회장에 마련했으니 모두 연회장으로 가시지요.”

“연회장?”

“우리만 즐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잔치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음식들을 충분히 준비했어요.”

“이거 통장이 바닥나겠군.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저택의 식구들이 모두 먹을 만한 음식들을 어떻게 준비한거야.”

“쩝~ 아마 일산일대에 있는 음식점들 오늘 매상은 우리들이 다 올려주었을 걸요. 지금 밖을 보세요. 차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수혼이 창밖을 바라보자 요코의 말대로 오토바이가 음식을 가득 실은 차들이 저택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 생각이야.”

“미희 언니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모두 찬성했는데요.”

“하여튼 덩치는 조금만 여자가 손은 무지하게 커요. 자~ 모두 일어나시죠.”

잔치가 시작되었다. 부인들은 가족들이 먹을 음식들만큼은 순수 준비했다. 천랑파 저택의 식구들은 이런 잔치는 처음이다. 수혼은 할머니와 아버님을 술을 올렸다. 잠시 후 호식이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길식도 참석했다.........갈치파가 서울로 진격하고 있을 때 천랑파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수혼은 술을 마시다 수영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잔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수혼은 연회장에 수영이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자신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수영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정원바닥에는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수영은 바닥에 깔린 낙엽들을 밟아보았다. “바스락” 낙엽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셔진다. 그때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긴 생머리가 날린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어둠이 깔려 반짝거리는 별들이 보인다. 저택이 일산외곽이고 가을이라 그런지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반짝이는 별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수혼이다. 그가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는 왜 나왔어요.”

“수영씨가 연회장에서 보이지 않아 찾으려 나왔지.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

“오빠! 그냥 편하게 불려요. 동생이잖아요. 그냥 편하게 수영아라고 불러주세요.”

“아직 습관이 안돼서.........그런데 왜 나왔어.”

“그냥 답답해서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수영씨.........아니 수영이는 갑자기 존댓말을 하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해.”

“편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수영이는 불편한 모양이네. 난 수영이가 편한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그러니까?”

“바보~ 이리와 봐~”

수혼은 수영의 손을 잡고 달렸다. 수영은 수혼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를 따라서 달려간다. 수혼은 수영의 팔목을 잡고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앞쪽에 있는 정원과는 다르게 예쁜 꽃밭들이 있었다. 옛날 이곳은 학교였을 때 아이들이 꽃밭을 가꾸던 곳이다. 지금 그곳에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었다. 수혼은 수영의 손을 잡고 코스모스 밭을 헤치고 들어갔다.

“오빠~ 꽃들이 상하잖아요. 그만 들어가요.”

“괜찮아. 조금만 저기까지만 가자.”

수혼은 코스모스 밭 가운데에 멈추었다. 한쪽에는 높은 담으로 한쪽에 거대한 건물로 가려진 코스모스 꽃밭의 중간이다. 수혼은 그곳에서 수영의 손을 풀어주고 수영의 앞에 우뚝 섰다. 달빛이 수영의 얼굴을 비춘다. 수영의 하얀 얼굴이 달빛에 밝게 빛난다. 수혼은 수영의 어깨에 손을 얻었다. 수영은 고개를 숙인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빨라지며 얼굴이 붉어진다. 수영은 살짝 고개를 들어 수혼을 보았다. 수혼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수영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수혼의 손을 잡았다.

“오빠~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요. 그리고 손 내려주세요.”

“내 눈빛이 어떤데.........”

“모.........몰라요. 그냥 이상해서........”

수혼은 수영이 자신의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수영을 와락 안아버린다. 수영은 가슴이 답답했다. 수혼이 너무 강하게 안았기 때문이다. 수영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수혼이 강하게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자신에게 이러면 안 된다. 자신보고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면 어찌하란 말인가? 오빠까지 이러면 감정이 무게를 이길 수 없지 않는가? 이대로 오빠에게 무너져 버릴 것 같지 않는가?

“수영씨. 오늘까지만...........오늘까지만 우리 남남이 되자. 그렇게 할 수 있지. 수영씨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오빠 답답해. 풀어. 그리고 오빠 정신 차려. 우린 남매란 말이야.”

“나도 알아. 나도 알고 있단 말이야. 하루만.........하루만 남남으로 지내면 안 될까?”

“오빠 풀고 이야기해. 몸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수혼의 계속된 설득에 수영이 가지고 있던 마음 벽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 수혼의 말대로 하루만 남남이 되는 거다. 그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강기에게 잡힌 이후 몇 칠 동안 목욕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수혼은 수영 풀어주었다. 수영은 수혼의 가슴을 밀며 수혼의 품을 벗어났다.

“수혼씨..........제가 수혼씨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알아.”

수영의 입에서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말이 나왔다. 수혼도 수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수영과 자신이 남매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정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도 수영을 사랑한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따뜻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나와는 다른 미묘한 감정을 느낀 수영이다. 그것 사랑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이다. 자신들은 남매다. 수영과 자신이 서로를 사랑한다 해도 천륜을 어길 수는 없다. 그건 죄악이다. 수혼은 그녀를 만나기전에 자신과 그녀의 사이를 남매사이로 정리했다.

오늘 그녀를 보았다. 굳게 마음이 먹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의 사슴같이 슬픔에 젖은 눈빛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그녀도 마음이 아픈 것일까? 그녀도 자신을 오빠이기 전에 한 남자로 사랑하는 것일까? 이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달려주어야 할까? 수혼은 그녀를 무작정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녀와 이곳으로 달려오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수혼은 생각들이 스쳐가는 것이다.

“수영씨.........나도 수영씨 사랑해. 오늘은 그것만 생각하자. 다른 생각은 지워버리자.”

“오늘만..........오늘 하루만이야. 내일이 되면 우린 남매가 되는 거야.”

“응~ 그렇게 하자.”

“좋아. 수혼씨 보고 싶었어. 이거 어떡하지..........수혼씨에게 안기고 싶은데........지저분해서.”

“바보. 이리와~”

솔직해 지기로 했다. 하루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그녀에게 솔직해 지기로 했다. 하루만이라도 그녀에게 오빠가 아닌 한 남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수영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그녀는 지혜로운 여자다. 아마 자신의 마음을 그녀도 알 것이다.

수혼은 수영은 안아주었다. 수영의 팔도 수혼의 목을 감고 매달린다. 수혼의 입술이 내려와 수영의 입술을 덮는다. 수영은 눈을 감고 수혼의 입술을 받아들인다. 수혼의 입술은 감미롭다. 그의 입술은 자신의 입술을 강하게 빨아준다. 숨이 막힌다. 입을 조금 벌려본다. 그의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잇몸을 핥다준다. 수영은 자신의 혀를 내밀어 수혼의 혀를 맞이한다.

수혼의 혀는 수영의 혀를 꼭꼭 찌르더니 이내 두개의 혀가 수영의 입속에서 엉킨다. 수혼은 그녀를 등을 쓸어준다.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밑으로 내려가던 수혼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서 멈춘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내려가면 서로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밤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가슴으로..........마음만으로 사랑해 주어야 한다. 처음 이곳으로 그녀를 대려 왔을 때는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눈을 보고 욕정이 용솟음 친 것도 사실이다. 코스모스 꽃밭에서 그녀의 하얀 속살을 보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 그건 사랑하는 수영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수혼은 떨리던 손이 다시 그녀의 어깨로 올라온다.

수영의 두 팔이 풀린다. 수혼도 입술을 거두고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준다.

“우리 산책하자.”

“좋아. 이곳 정말 좋다. 공기도 맑고 바람도 상쾌한 것 같아.”

“이곳이 마음에 들어. 그럼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

“생각해 볼게. 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 수혼씨가 다른 여자들이란 함께 있는 걸 보면 질투가 나서 말이야.”

“하하하~ 수영씨도 질투할 줄 알아. 수영씨처럼 똑똑한 여자도 질투해.”

“치~ 난 여자 아닌가? 사랑 앞에서 똑똑하고 멍청하고 무슨 상관이야. 여자는 다 똑같아. 아니다. 이 남자가 지금 보니까 편견을 가지고 있네. 사람은 다 똑같단 말이야. 수혼씨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만나고 있으면 질투 안나.”

“물론 질투나지.”

“그것 봐~ 사람은 다 똑 같아. 여자 남자가 무슨 상관이야.”

“참~~ 알았어. 자~ 팔짱~”

수영은 수혼이 내미는 팔에 팔짱을 낀다. 수혼은 그녀와 함께 꽃밭을 빠져나와 작은 오솔길 걸었다. 코스모스 꽃밭이 끝나고 해바라기 꽃밭이 나타났다. 수영은 해바라기들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녀가 해바라기를 가리키자 수혼이 큼직한 해바라기 꽃 하나를 꺾었다. 그는 해바라기를 반으로 쪼개서 해바라기 씨를 빼내 수영에게 내밀었다.

“수혼씨 주인에게 들키면 혼나지 않을까?”

“하하하~ 요코에게는 내가 말할게. 코스모스하고 해바라기 꽃밭은 요코가 가꾸는 꽃밭이거든.”

“아~ 요코씨...........수혼씨 난 모르는 일이다. 알았지.”

“하하하~ 알았어. 먹어봐~ 단단하게 씨가 잘 여물었다.”

두 사람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오솔길을 걸었다. 수영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해바라기를 까먹는 걸 즐긴다. 사실 별 맛도 없는데 말이다. 수혼은 밝게 웃는 수영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그렇게 웃는 거야. 네가 너의 여인이 될 순 없지만 언제나 든든한 오빠로써 네 곁을 지켜 줄게. 수영아 사랑한다.) 수혼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진 못했다. 지금 그녀는 행복한 모양이다. 그 행복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 두 사람이 다시 건물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다시 정원을 산책한다.

그때 멀리서 지나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나는 수혼이 회의장을 빠져나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수혼을 찾으려 나온 것이다. 지나는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수혼과 수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빙긋 웃고는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눈길이 있었다. 란이다. 그녀도 수혼과 수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건물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녀는 건물 앞에 서 있던 지나도 보았다. 지나가 건물 속으로 돌아가자 란도 어둠 속에서 빠져왔다. 휴~~ 한숨이 나온다.

“뭐해~”

등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란은 깜짝 놀라 돌아본다.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호식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그냥 답답해서........그런데 호식씨는 웬일이야.”

“수지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계속 찾고 있었어.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

“왜~ 무슨 할말 있어.”

“저..........딴 건 아니고..........갈치파 소식 들었어. 갈치파에서 쫓겨났다고........아니다.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지. 갈치파가 수지씨를 배신했다는 소릴 들었어.”

“날 배신한 것이 아니라. 원예님과 대사부님을 배신 한 거야. 난 원예님을 따라 온 거고”

“아이~ 복잡하네. 하여튼 수지씨가 더 이상 적(敵)이 아니라는 말 아니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우리 사귀자.”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씨~ 멍청한 새끼.........멍청한 새끼.........하 참~ 이상하네. 딴 여자들 앞에서는 말이 청산유수인데............왜~ 수지씨 앞에서는 멍청이가 되는 거지. 휴~ 바보새끼.”

호식은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쥐어박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흔든다. 수지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버린다.

“호식씨. 나 좋아해.”

“응~ 그러니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했어. 수지씨라면 딴 여자에게 눈 돌리지 않고 평생 수지씨만 바라보고 살 자신 있어. 그리고 말이야. 수지씨만 OK하면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치마들 모두 정리할게. 대신 수지씨가 내 마음 받아주지 않음 미쳐버릴 거야.”

“푸~~~ 호식씨 지금 그걸 뭐라고 하는 거야. 고백이야. 협박이야. 꼭 협박처럼 들린다.”

“하이 참~ 입이 방정이네........예라! 모르겠다. 그래 협박이다. 수지씨 나랑 사귀자. 수지씨가 싫다고 하면 난 꽉 뒤져버릴 거야. 그러니까 불쌍한 놈 살려주는 셈치고 우리 사귀자 응!”

“호호호. 정말 웃겨.........호식씨 그만 웃겨. 아~ 눈물이 다 나오네.”

“농담 아니야. 정말이란 말이야. 저기 나무 있지. 수지씨가 싫다고 하면 바로 나무에 대가리 박고 죽어버릴 거야.”

“호호호~ 해봐. 호식씨 농담도.........”

“쾅~~~~”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부르르 떨린다. 호식의 단단한 머리가 나무를 박아버린 것이다. 수지는 할말이 읽고 멍하니 호식을 바라본다.

“아~ 십팔 왜 안 죽는 거야. 나무가 너무 약한가? 예라~ 벽에다 박아버려야겠네.”

호식은 정말로 벽을 향해 돌진했다. 멍하니 있던 수지의 몸이 날아올라 호식의 앞에 떨어진다. 호식은 달려오던 속도를 멈추지 못하고 수지의 몸에 부디 치며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땅바닥을 구르다 멈추었다. 호식은 수지의 몸 위에 있었다. 수지의 얼굴로 호식의 이마에서 피가 떨어진다.

“바보야. 정말 죽으려고 하는 거야.”

“수지씨가 내 말을 믿지 주지 않으니까 죽어버려 야지.”

“일어나봐~ 피부터 지혈시켜야겠다.”

“싫어. 죽을 놈인데 지혈은 시켜서 뭐해.”

“저..........정말이니. 정말 나랑 사귀자는 거야.”

“정말이지. 머리털 나고 여자에게 이런 말하는 건 처음이야. 내말 아직도 못 믿는 거야.”

“믿어. 믿을게. 그러니까 일어나. 무겁단 말이야.”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대답할 때까지 못 일어나.”

“이런 고집불통..........바보야. 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란 말이야.”

“사랑하지 마. 사랑은 내가 할게. 수지씨는 내 사랑을 받아주기만 하면 돼.”

“이..........이 벽창호~ 내 마음속에는 새카만 재밖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거 몰라. 내가 수혼씨 사랑했던 거 알잖아.”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해. 내가 다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들 거야. 수지씨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내가 해. 그러니까 수지씨는 내 곁에만 있어.”

“휴~ 정말 바보구나. 네가 졌다. 알았어. 내 곁에 있을게. 그러니까 일어나자.”

“정말이지. 내 곁에 있어주는 거지.”

“알았다니까? 일어나 누가 보면 어떻게........어서.”

“수지씨.”

“읍~~ 음~~”

수지의 입술을 호식이 입술을 덮어버린다. 수지는 갑작스런 공격에 반항도 못하고 호식의 등만 토닥거린다. 이 밤........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ps : 호식과 란(수지)의 사랑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지만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사라진 1천화랑 편이 계속되겠습니다.(“사라진 1천화랑” 쩝~ 이제 별짓을 다하는 구나. 부제까지 붙이고.......안하던 짓하면 죽을 때가 됐다는데.........)

제  목: 낭만을 꿈꾸는 늑대 (115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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