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벤시몽으로 가자!”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던 은준은 홀로 자신만 고민을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카파로, 벤시몽으로 돌아가 야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러면 자신의 이 알 수 없는 마음도 명확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겠다는 은준의 발언에 그의 두 부모님은 그의 농장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스러워 하였지만, 은준은 고개를 저으며 중요한 일이라고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무언가 알고 있음인가, 아니면 은준의 표정에서 어떤 결심을 읽었던 것일까 두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와, 얼굴 본지 며칠만에 또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버리겠다는 아들에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는 은준의 어머니.
“벌써 가서 어떻게한다니. 맛있는거라도 해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충분히 먹었어요. 매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반찬만 해주셨으면서 뭘요.”
그럼에도 역시 그의 어머니도 그를 막지는 않았다. 다만 아들 자식에게 무언가 더 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 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 은준도 ‘곧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며 안심시켜드리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벤시몽에 가 봐야 확실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 * *
곧장 비행기표를 예매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탄 은준은 처음 아프리카에 왔을때와 마찬가지로 요하네스버그의 국제공항에 몸을 내렸다. 공항은 여전히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비행기를 기다리거나 짐을 찾아 빠져나가며 복잡했다.
가볍게 갔다 가볍게 돌아온 길이라 가진 짐이라곤 등에 맨 가방이 전부였던 은준은 따로 짐을 찾는 절차 없이 좌석 위의 짐칸에서 가방을 내려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처음 설레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공항에 내렸을때와는 다르게 더 이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이드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돌아온 터라 마중나온 사람도 역시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벌써 몇 번째 이 공항을 나와 지나쳤던 은준은 공항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로보스 레일을 탄 은준은 팔라보르와에서 내려 맡겨놓은 자신의 차량에 올라탔다.
“처음 로보스 레일을 탔을땐 정말 깜짝 놀랐었지. 총격전에 사람도...”
은준은 처음 탔던 로보스 레일에서 마주친 대낮의 대범한 총격전과 그 총알에 맞아 피를 흘리던 사람을 떠올렸다. 그 당시엔 정말 두렵고 돌아가고 싶어했던 은준이었으나, 그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았다.
팔라보르와에서 뉴-카파를 거쳐 벤시몽으로 가는 것은 긴 여정이었다. 차를 타고 지나는 이동 시간만 따져도 13시간이 넘는 장거리. 은준은 황량한 무인지대를 따라 달리기도 했고, 이따금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간 벤시몽에서의 일들을 회상하며 어설펐던 자신에 쑥쓰러워했다가 때론 웃음짓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큰 땅을 아주 싼 값에 불하받은 것이겠지.”
그 땅을 은준 자신이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여전히 손바닥 만한 땅을 일구며 조금씩 조금씩 모아 큰 농장을 운영하는 꿈을 꾸고 있었을 터였다. 퉁야와 야, 쉬사네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얌 도 모르는 체로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한데?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서둘러야지.”
은준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벤시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점점 벤시몽에 가까워질수록 은준의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운전대를 잡은 손은 땀이 베어나와 끈적이게 만들고 있었다.
“후, 긴장되는군.”
은준은 벤시몽에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곳에 도착하면 야에게 물어보리라 생각해온 질문의 대답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두려움과 궁금함 때문에 자꾸만 자동차의 속도가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했다.
‘야는 어떤 대답을 할까? 그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그녀는 날 떠나갈까? 아니라면 앞으로 얼굴은 어떻게 봐야지?’
속으로 어떤 답변이 나올지 생각할수록 점점 좋지 않은 쪽으로만 결론이 나오는 것 같자, 은준은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똑바로 했다. 좋지 않은 생각만 하다가는 막상 야 앞에 도착할 때쯤에는 묻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침내 은준이 벤시몽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어슴프레하게 어둠이 깔릴 때쯤이었다. 갑작스런 귀환에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던 퉁야가 밖으로 나와 그를 맞았지만, 은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인사만 하고는 곧장 야가 있을 저택으로 들어갔다.
자동차 소리에 누가 왔나 싶어 밖으로 나오려던 야는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은준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갑작스런 귀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묻고 싶었지만,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다녀오셨어요?”
하지만 그런 야의 인사에 은준은 대답 대신 굳게 닫힌 입으로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알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 바로 묻지 않으면 언제 말을 꺼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는 야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정말 좋아하느냐고.
“내가 하는 이야기,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 그... 그러니까...”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세요? 혹시...!”
야는 은준이 말을 못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한 번 한국에 들어가면 일주일 이상씩 머물다 돌아왔던 것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것도 이상한 일이였다. 그런데 마치 큰 결심을 한 듯 딱딱히 굳은 표정을 보니 퍼뜩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야도 은준에게 고용되기전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언뜻언뜻 주어들은게 있기도 했다. 사업차, 혹은 회사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장기간 아프리카에 체류하게된 외국인 남성들이 애인을 사귀다가 현지에서의 일이 끝나고 훌쩍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따금 남겨진 여성과 혼혈 아이들이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를.
야의 얼굴은 순간 절망과 안타까움 등이 한데 섞인 그런 얼굴로 일그러졌다가 곧 펴졌다. 하지만 붉어진 눈과 눈가에 맺힌 일렁이는 물방울은 그녀의 마음대로 숨겨지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구차하게 다투다 안좋은 기억으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킴, ...그동안 ...그동안...”
은준의 질문에서 이별을 떠올린 야는 결국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은준도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마치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 같은 야에, 그녀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네가, 당신이... 이런 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사랑해.”
야의 눈물을 본 순간 은준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았다. 답을 구할 상대는 야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껏 한 번도 은준이 입 밖으로 내어본 적 없는 말. ‘사랑’. 매일밤 야를 안으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은 할 지언정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은준은 알지 못했으나 야는 알고 있었다.
야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은 작별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 되었고, 경련이 일어날 것처럼 억지로 애써 피려던 얼굴은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제 대답은... 예전에 이미 했었는데 잊어버리셨군요? 얌과 제가 받은 그 소들, 벌써 새끼를 낳았다고요.”
그 순간 은준은 언제부터 이고 있었는지 모를 무거운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 같이 두 어깨가 가벼워짐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던 발을 한 걸음씩 옮겨 앞으로 다가가 야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크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 End -
============================ 작품 후기 ============================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편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완결도 선사합니다~여운이 좀 남았으면 싶어서 이렇게 끝내봤습니다. 이정도면 해피엔딩이죠? ㅎㅎ 그동안 [뉴-카파로 가자!]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뉴-카파로 가자!]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완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년 정도의 연재였습니다. 애초에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 연휴때 심심해서 써 올렸던 글인데 많은 관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 갑작스럽게 늘어난 선작해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선작한지 얼마 안되서 완결이라니..!!!
하지만 올해 안에, 100편 내외로 완결을 지을 생각을 쭉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준과 야를 확실히 매듭지으려고 최근 몇 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써넣었다가 괜히 은준 어머님이 욕을 처드셨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까실줄은 몰랐던 터라 어머님 캐릭에 미안한 마음이;;;;
혹시 요 몇 편 폭풍까임을 당하는 바람에 조기종결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워낙 그런 쪽으론 한귀로 휭~ 하는 스타일이라 그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제 멘탈에 흠집이 날 때는 써놓은 글이 날아갈때 뿐이죠 ㅜㅜ 그건 정말 힘듭니다 으컹으컹!
거꾸로 독자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별개로 제가 쓰려는 이야기를 쓴다는 말일 뿐입니다. 독자분의 반응이나 취향을 반영하는건 좋지만, 휘둘리는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죠.
어째껀 끝날쯤에 끝났다는 이야깁니다.
중간에 쓰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었고, 구질구질 늘어진 부분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또 한편을 완결낸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후기가 길어지네요비록 [뉴-카파로 가자!]는 끝났지만, 현재 연재중인 글이 두 개 더 있으니 제 글이 보고싶으신 분은
[폴라이트 테일즈]
[좀비림]
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ㅎㅎ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