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이지만...끵 106화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가 되는거고, 아직 대학교 다니는 양갓집 규수랑 선을 봐서 결혼해 한국에서 살아라, 이 말씀이죠?”
“그래. 너도 그게 좋잖니. 살기 힘들고 위험한데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니? 처음에야 네가 뭐라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해서 걱정 하면서도 보내주긴 했다만, 이제 그러지 말고 가족들도 다 있는 한국에 와서 살면 얼마나 좋니?”
“하지만 거기엔...”
은준은 완전히 한국에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자 순간 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 들어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게 되면 일 년에 벤시몽에는 며칠이나 있을까? 정말 사업이라도 하게되면 아프리카에 들어가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느순간 잊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얌은? 사범대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마을 학교에 선생님 시켜준다고 했는데.’
은준은 생각을 해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준비했던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뜻밖의 공격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늦은 밤 잠시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나는 정말 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싫다고 하는 걸까? 단순히 벤시몽의 옥수수 농장 때문에? 아니면 그저 선을 봐 결혼하는게 싫은걸까? 한국녀 혐오증?’
지구상에 이렇게 서로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의 한국남과 한국여의 상대방 까내리기는 극에 달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사례들은 금방 인터넷상에 퍼졌고, 된장, 김치 같은 단어와의 합성어가 붙여졌다. 그런 글들을 보다보면 마치 한국에는 전부 사이코 같은 사람들만 사는 것 같을 정도였다.
은준도 젊은이답게 인터넷을 자주 활용하였고, 자주 접속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도 있을 정도였다. 그곳은 평소에는 재미있고 웃음을 주는 글과 자료가 많이 올라왔지만, 이따금 한국 여성을 까는 자료들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주로 남자들이 많은 사이트였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도 한 이유일지 모르겠군.’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한국 여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부류의 여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은준이 선을 보기 싫어하는 이유중에 그런 여자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있기 때문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툭!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은준의 어깨를 누군가가 부딪혀 지나갔다. 어깨가 훌쩍 밀렸던 은준은 부딪힌 사람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속이 부글 끓어왔다. 하지만 서로 바쁘게 스쳐 지나간 뒤라 이미 둘 사이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짜증나게...”
안그래도 복잡한 머리, 방금전 보았던 표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라 그를 자극했다. 생각이 멈추자 갑자기 주변의 소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빵빵! 드르륵득! 부우웅, 부웅! 빠아앙-!
길가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우렁찬 엔진음, 길가 곳곳의 오디오에서 울려퍼지는 뒤섞인 노랫소리, 쉴새없이 통화하는 이들과 끊이질 않는 전화벨.
“짜증나... 시끄러워...”
‘짜증이라... 이렇게 스트레스 받아본게 언제였지? 공항에서, 기차에서... 그 전에는? ...기억 안나...’
은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하얀 구름, 파아란 하늘, 맑은 공기, 부드러운 바람.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에 마시는 달달한 밀크티. 뽀송하게 잘 말라 좋은 햇빛 냄새가 나는 이불. 바람이 불면 ‘솨사사’ 우는 옥수수대. 툭툭 떨어지다 이내 우수수 쏟아지는 장맛비. 붉고 노란 노을과 하늘에 박혀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
‘여기는?’
은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높이 솟은 빌딩숲 사이로 보이는 깜깜한 밤하늘. 그곳에 반짝이는 불빛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항법등이 전부다. 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빌딩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형광등 불빛만이 눈을 부시게 하는 전부였다.
실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은준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살며시 귀를 막아 보아도 어김없이 비집고 들어와 머리를 울리는 고약한 소음들.
‘현대인이 삭막하고 싸움이 잦은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벤시몽의 원주민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은준은 기억속에 묻혀있는 그네들의 얼굴을 끄집어냈다.
‘야는 어땠지? 얌은?’
은준의 살며시 감은 눈 안쪽으로 밝게 웃고 있는 야와 얌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눈을 뜨자 사라진다.
‘보고싶은걸까?’
은준은 그가 떠올렸던 벤시몽에서의 기억 속 어디에서나 야가 함께 있음을 알게되었다. 동시에 그의 옆자리에 아무도 없음이 그를 우울하고 기운없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에게 야는 어떤 존재지?’
은준과 야의 첫 만남은 은준이 가정부를 고용하기 위한 면접 자리에서였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이었던 17살의 혼혈 아프리카 소녀. 선생님이 꿈인 동생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한국에서라면 고등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어야 할 나이임에도, 멀리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김은준이란 사람에게 고용되어 그의 가정부로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둘 다 술을 마신날 첫 날을 보내게 되었지. 그게 잘 한 짓이었을까?’
봉사활동을 나온 의대생들의 마지막 날 밤 축제같은 분위기에서 술을 나눠마신 은준과 야는 술김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은준은 일찌감치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날밤이 그의 목적을 이룬 날이긴 했지만, 과연 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애초에 그런 날이 올 줄 알고있었을 수도... 야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야는 은준이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쫒아내는 것을 두려워했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앞에서 보인 미소와 살가움은 그저 고용인과 고용주간의 관계에서 보여준 것일까. 아니면 그녀 또한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은준은 뒤늦게 이런 고민 때문에 마음을 끓이게 될 줄은 몰랐던 탓에 이미 선에 관한 문제는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착각의 동물이라던데, 나도 결국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걸지도.’
이성의 아무 의미 없는 행동에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해버린다고 붙여진 이름, 착각의 동물.
은준은 야의 행동 역시 그저 상냥하고 사려깊은 고용인의 모습이었을뿐, 어쩌면 자신 혼자 착각하고 행동하여 지금껏 야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슬프고 우울하지?”
‘야가 나에게 아무 감정 없다고 생각하게 싫은건가? 왜? 나에게 야는 뭐길래?’
은준은 분명 야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는 그것을 야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야라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사이가 좋았으니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이제와서 그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은준의 어머니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들이시군요. ㅇㅅㅇa 제 글솜씨가 부족해 제가 의도한 바 대로 전해지지 않은걸까요..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