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카파로 가자-103화 (103/107)

103화

촬영이 끝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촬영중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하여 철수한 것이 아니었고, 촬영 자체가 겨우 이틀 만에 완료되었던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었던 은준으로서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대사가 있는 드라마나 영화도 아니고 헐벗은 모델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뒹굴거리거나 혹은 물속에 들어갔나 나오거나 하는 것이 전부인 IV는 촬영조차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 실내, 실외 촬영이 나뉘어있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하루만에 끝났을지도 몰랐다.

촬영 자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금은 기대했던 은준의 바램과도 다르게 갑자기 우연처럼 야생동물이 튀어나와 그가 활약할 순간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감독은 동물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못 찍었다고 아쉬워할 정도였다.

다만 수영복 장면을 찍어야 한다며 강에 들어가는 장면을 찍으려 해서 은준을 화들짝 놀라게 했었는데, 다행히 직접 강을 본 감독이 물이 너무 탁하다는 이유로 제 2안을 택해 벤시몽 뒷마당에 있는 작은 수영장에서의 촬영을 진행함으로서 은준의 눈을 흐믓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틀간의 촬영 일정에도 불구하고 은준과 아이가 이야기를 나눈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 집 안에서 마주칠 때 외에는 대체로 주변에 스탭들을 대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쉬는 시간도 바쁜 촬영 일정탓에 지쳐보여 그 상황에서 참견을 할 정도로 경우 없는 인물은 아니었던 은준은 그저 주변만 어슬렁 거린게 전부였다.

그래도 유일하게 은준의 뜻대로 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은준의 방 침대에서의 촬영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은준이 영상으로만 봤던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겠다며, 쿠라시나 아이가 뒹군 침대 위에서 뒹굴어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차올랐었는데, 촬영 장면은 방 안에 촬영 장비와 스탭들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가득 차 은준은 방 밖에서 들어올 수 조차 없었고, 기존의 침대 시트는 영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들이 준비해온 것으로 깔고 촬영한 뒤 바로 수거해간 터라 쿠라시나 아이의 흔적은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쿠라시나 아이가 벤시몽에 온지 나흘째 되는날, 그들은 장비를 철수하고 누군가 왔던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아침 일찍 벤시몽을 떠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얼굴이라도 몇 번 더 볼까 싶어 관광이라도 하고 갔으면 싶었던 은준으로서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진 촬영팀이었다.

하지만 은준의 바램과는 별개로 그들의 사정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이 호텔에서 묵었던 것도 아니고 쿠라시나 아이를 제외한 스탭들은 좁은 캠핑카에서 생활하며 열악한 환경에서의 사흘이었으니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 떠나버린, 앞으론 다신 볼 수 없을 쿠라시나 아이의 생각에 은준은 허탈한 마음에 그들이 사라진 동쪽을 하염없이 지켜보았으나 그런다고 그들이 다시 돌아올리는 없었다. 은준 혼자의 일방통행이었을뿐, 쿠라시나 아이에게 은준은 그저 촬영 현지에서 만난 주인 아저씨였으니까. 아무 감정 없는.

“역시 러브액츄얼리에서처럼 유명인과 평범남 사이의 로맨스는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일 뿐인가...”

뭔가 섬씽이 있기엔 애시당초 밤중에 남녀사이의 야릇한 소리로 유혹해보려던 은준의 파렴치한 계획부터가 문제가 많았던 것 같지만, 은준은 그저 영화가 헛된 꿈을 심어주었다고 혀를 찼다.

“그래,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니까 영화로 만드는거지. 하여간 신데렐라 스토리란...”

사적인 대화라고는 총 자랑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무슨 로맨스가 꽃폈겠냐만은 그걸 지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킴, 날도 더운데 빙수 준비할까요?”

“빙수? 음... 그럼 그럴까?”

그런 은준이라도 야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있는 은준이 걱정되었는지 팥빙수를 준비한다며 얼음을 갈아댔고, 은준은 한국에서 가져온 깡통팥이 너무 달다며 하루 빨리 팥을 수확해 덜 달은 팥으로 빙수를 해먹고 싶다고 투덜거리며 팥빙수 한 사발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아니 하루가 지나자 은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쿠라시나 아이를 오매불망 쫓아다니며 그녀가 떠난 뒤로도 마치 님이 떠나간 듯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딱 하루뿐, 야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자 언제그랬냐는 듯 은준은 이전과 똑같이 농장 생활과 야에게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은준을 보며 야는 조용한 미소와 함께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아이 같으시다니까.”

과연 은준의 변심을 야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오기 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떠있는 모습의 은준에 야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은준이 신경쓰고 있는지 아닌지 야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야로서는 은준과의 관계에서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을 쥐고 있는 은준이야 그런들 저런들일지 몰라도, 자기 몸 바치고 동생까지 쌍으로 은준을 받아들인 야로서는 혹여 나중에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준은 멀리서 온 외지인이었고,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이였으니 말이다.

안그래도 은준이 결혼한다고 고국으로 훅! 떠나지는 않을까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같은 동양인으로 보이는, 자신이 보아도 곱게 자란 티가 확연한 은준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으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이는 야가 더 어렸지만, 그녀와 쿠라시나 아이는 나이도 그리 차이나지 않았고, 오히려 연예계 활동을 하며 각종 관리를 받는게 일상인 쿠라시나 아이 쪽이 피부나 미모 면에서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물며 야는 학교도 중등 교육까지 밖에 받지 못했으니 쿠라시나 아이에 비교해 내새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던 것.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내색하지 못했다. 남자란 여자가 질투를 하면 더욱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

야는 외지인들을 신경쓰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안일에 충실하는 듯 보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은준과 아이의 움직임에 촉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아이의 주변을 맴도는 은준과 달리 쿠라시나 아이는 은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쿠라시나 아이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탓에 아주 약간쯤 은준에게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이성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고 야는 그 둘의 미묘한 차이를 여자의 감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은준과 아이, 둘 사이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벤시몽에 남겨진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은준과 야가 되었다.

물론 다음날이 되어도 은준은 쿠라시나 아이를 잊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야는 쿠라시나 아이가 벤시몽을 떠난 시점에서 이미 안도하였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은준도 이전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활쏘기도, 사냥도, 그 무엇 하나 오래 붙들고 있지 못했던 은준. 관심을 가질 때에는 반짝 하고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파고들지만 그것도 한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으면 아이가 구석에 처박아둔 인형처럼 돌보지 않는게 바로 은준이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흥미를 가졌다가 곧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가지는 애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 야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아예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라 시일이 지나면 다시금 관심을 가지고 또 다시 열성적으로 파고들고, 다시 뒤로 제쳐놨다가 후일 관심 가지기를 반복하는 은준이지만, 이번 만큼은 다음에 다시 쿠라시나 아이와 엮이고 싶어도 이번과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최후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쿠라시나 아이와 야, 둘 중 승리한 이는 바로 야 였다. 물론 한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하렘 따위! 누구 맘대로!

네, 대항해시대 에이레네 섭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주 하지는 않아요현재 연재중인 글은 조아라에선 이 글 하나 뿐이지만, 문 모 사이트에서 두 개 더 연재하고 있지요. 아이디는 똑같으니 관심 있으시면 검색해보시면 나옵니다~투베1위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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