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벤시몽에 한바탕 훈풍이 몰아쳤다 사라지자 목이 탄 은준은 난리통에도 용케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찻잔을 들어 이미 식은지 오래된 밀크티를 단숨에 들이켰다. 겨우 속옷을 찾아 입고 옷매무새를 고친 야도 대낮의 정사에 진이 빠졌는지 은준의 가슴에 기대어 거칠어진 숨을 달랬다.
“기부요?”
좀 전의 이야기를 마저 이어 하던 야는 은준의 이야기에 조금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은준은 그런 야의 속눈썹이 무척 길다고 생각하며 그가 했던 고민을 간단히 이야기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야는 잠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킴, 그럼 고아들을 도와주는건 어때요?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하지만 기부금으로 들어오는 돈이 적어서 고아원을 꾸려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았거든요.”
“...그거 설마 나눔자리 성당 이야기를 하는거야?”
은준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되물었고, 야는 은준이 자신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리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주억였다.
“나눔자리 성당이라... 성당...”
그는 야의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 전쟁이란 아마도 내전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와중에 고아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고, 분명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게다가 귀찮은걸 몹시 싫어하는 은준으로서도 직접 고아원을 꾸린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이미 기존에 있는 고아원에 재정적으로만 도움을 주는 것은 굉장히 편해보이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어느 단체에 기부를 해도 자신의 돈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반면, 가까이에 있는 고아원에서 사용되는 돈이라면 자신도 그 쓰임새를 알 수 있으니 허투루 쓰는지 착복하지는 않는지 감사도 가능할 듯 싶었다. 또한 이것은 어느 게시글에 달린 댓글에서 본 것과 같이 먼 곳이 아닌 자기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고아원이 바로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은준 그 자신이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었고, 한국에 있을때부터 이리저리 안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던 데다가, 다시 이번에 알아보면서 일부겠지만 그들의 행태를 본 터라 꺼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야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했던 적이 없었다는것에 생각이 미친 은준. 자신이 죽으면 전 재산을 나눔자리 성당에 기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처갓집 같은 곳이고 아직 얌도 그곳에 있으니 얌을 위해서라도 시험삼아 얼마쯤 기부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후원을 중단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래서 역사에서도 베갯머리 송사가 잘 쓰였던거구나!’
부인이 예쁘면 처갓집 기둥에다가도 절을 한댔다고, 또, 자기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치맛자락만 꼬집거리고 있는 야를 보니 혼난 강아지마냥 귀엽기는 해도 어서 달래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결국 은준은 야의 조언에 따라 그녀를 보살펴 주었던 나눔자리 성당에 가장 먼저 기부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금액은 어차피 크지 않은 성당 고아원이었고, 은준도 처음부터 큰 금액을 덥석 안겨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봉투엔 100달러 정도가 담겨졌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의 물가라면 아이들에게 충분히 먹을 것을 굶기지 않고 줄 수 있을 터였다.
야와 얌의 얼굴을 봐서 기부를 하는 것이니 은준도 직접 나눔자리 성당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에도 주말마다 야와 얌 때문에 들르긴 했으나, 그가 워낙 종교적인 행사를 꺼려한 터라 그 앞에서 차를 내려주거나 태웠을뿐 직접 입구 안으로 들어간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이번이 첫 방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은준은 단순히 성당 고아원에 금일봉을 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첫 방문인데 아이들에게 빈 손으로 가면 조금 그렇겠지?”
그도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고아원에 방문하는 봉사자들이 옷이나 먹을 것 등 이런 저런 선물을 사들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뭐가 좋을까? 그러고보니 야도 거기서 중등 학교까지 다녔고, 얌도 다니고 있지! 이게 아프리카 치고는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신부라는 분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쓴 다는 이야기인데... 아! 확실히 유니세프 사이트에서 문구류도 팔고 있었지. 그걸 주문해서 선물로 나눠주면 고아원 아이들에게도 선물이 되고, 또 유니세프를 통한 기부도 될 수 있겠네?”
은준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야에게 성당 고아원에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는지 물어 몇가지 학용품을 그 숫자 만큼 주문을 하였다.
필기도구세트, 색연필, 거기에 필기도구세트에 들어있는 연필의 숫자가 부족한 것 같아 문구세트를 추가로 더하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축구공과 엄마와 아기곰이 함께 있는 곰인형도 두 세트씩 주문을 했다.
그렇게 상품을 검색하다보니 그에게도 쓸만해 보이는 물건들이 보이는 터라, 캡모자와 휴대용 물병을 하나씩 추가하고 나니 그 금액이 무려 90만원을 훌쩍 넘기게 되었다.
“자,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기부금은 100달러인데, 애들 선물이 90만원이야? 선물 값이 아홉배나 더 많잖아!”
다시 생각해봐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은준은 마지막 결제 창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러고는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이 사이트에서 구입하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 같아. 주소에 이쪽 주소를 써도 제대로 배송이 될지도 모르겠고.”
은준이 보고 있던 사이트는 어디까지나 한국 유니세프의 주소로, 상품 구입시 청구되던 금액에 나와있는 ‘배송비 2,500원’은 그 배송비로 아프리까까지 보내줄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어쩌면 전화 한 통화로 확인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 ‘선물값’이 부담스러웠던게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유니세프에서의 물건 구입을 취소한 은준은 전략을 달리 하기로 했다.
“아까 보니까 학용품이 쓸데없이 비싸더라고. 연필도 몇 자루 안들은 것이 자랑 조그만 연필깎이 들었다고 2만원이나 하고 말이지. 그것도 재생연필이 말이야. 여기 뉴카파에 나가서 사도 그것보다 싸겠다. 어차피 그 동네 애들은 다 그쪽에서 파는거 쓸텐데. 애들도 그게 얼마짜리인지 알면 공을 차는게 아니라 성당 안에 모셔둘지도 모르지.”
자기가 말하고도 설마 그럴까 싶기도 했지만, 한국돈으로 17,000원 짜리 축구공을 리소테 랜드로 환산하면 정말 축구공을 발로 차는게 아니라 머리에 신주단지 모시듯 이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은준은 야와 함께 뉴카파에 가는날 조금 일찍 나와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직접 구입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학용품에 간식 선물을 추가해도 훨씬 남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주말이 오기까지 은준은 매일 매일이 설레였다. 비록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들이지만, 자신이 나눠줄 선물을 받고 좋아할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아, 이래서 선물은 받는 사람도 기분 좋고 주는 사람은 더 즐거운 거라고 하나보구나!”
그때, 그렇게 들떠 있던 은준에게 낯선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은준은 모르는 번호에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곳 아프리카에 아는 번호는 있겠냐 싶은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보스, 저 퉁야입니다!”
전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가족을 데릴러 짐바브웨로 떠나 한동안 보지 못했던 퉁야의 것이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무척 활기차 보였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12시 자정 넘었으니 오늘은 6일 수요일 입니다.
수능 잘 보시라고 연참 했는데, 생각해보니 연참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거 볼 시간이 어딨어요! 한 자라도 복습해야지!!!
낼 수능보는 분들, 어여 컴터 끄고 일찍 자고 컨디션 조절하세요 ㅋㅋ아.. 좀비림도 올려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