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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카파로 가자-75화 (75/107)

75화

늦은 저녁. 해가 저물어 밖은 이미 어둑어둑 해졌고, 베란다의 블라인드는 내려져 바깥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에 있는 은준은 아주 오래간만에 한국의 방송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창밖에까지 신경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추석 상차림 준비에 낮 동안 무척 바쁘셨던 은준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지 고개가 앞으로 수그러졌고,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린 은준은 70여개가 넘는 채널을 하나씩 돌려보며 신기해했다. 비록 2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텔레비전 속 세상은 너무나 바뀌어 있었다.

삑삑삑삑!

그때 갑자기 현관문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은준은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거기에 맞춰 전자자물쇠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오셨어요!"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

"허허, 우리 아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은준의 아버지도 은준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으며 먼저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다 은준이 두 팔을 벌려 자신을 껴안자 마주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2년여만에 만난 사람들 치고는 심심한 인사였지만, 부자의 재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엄마는? 몇 시인데 벌써 자?"

들어서면서부터 양복 상의를 벗어 쇼파에 내려놓고, 넥타이를 풀러 와이셔츠 단추를 풀던 은준의 아버지는 쇼파에 기대어 졸다 막 일어난 은준의 어머니를 보며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계속 반찬 만드느라 이제 좀 엉덩이 붙인겁니다. 저녁은?"

"직원들하고 먹었지. 당신은?"

"잘 했어. 우리도 아까 먹었지."

어머니가 아버지의 양복 바지를 받아들며 집에서 입는 체육복 바지를 건네줄때 은준은 쇼파에 걸쳐있는 양복 상의와 셔츠를 들고 현관에 나가 솔로 싹싹 털어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도."

뒤돌아서니 양복 바지를 들고 있는 그의 어머니. 은준은 들고있던 것을 주고 양복 바지를 받아 다시 솔로 털어 거꾸로 뒤집어들고는 바지 걸이의 집게로 찝어 옷걸이에 걸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당장 어제 했던 일 처럼 익숙했다. 은준 자신은 이곳을 떠나있었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변함없이, 그의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어땠어. 잘 다녀왔어?"

런닝 바람으로 쇼파에 걸터앉으며 은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씻고! 씻고 앉아. 그러다 그냥 잠들지말고."

그 모습에 은준의 어머니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한 말씀 하신다.

"네. 별 일 없었어요. 일도 잘 풀리고."

"또 가나?"

"가야죠. 제 땅이 거기에 있는걸요."

"...그래. 언제 갈건데?"

"여기서 한 보름쯤 머물거에요. 너무 오래 비워둘수는 없거든요."

은준은 벤시몽을 떠올렸다. 쉬사네가 어련히 잘 해주겠지만, 퉁야도 가족을 데릴러 떠난 상황에서 야 혼자 벤시몽을 지키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다음 옥수수 농사를 위해서 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비록 올해는 첫 농사라 이모작에도 작황이 좋게 나왔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옥수수대 갈은 것과 함께 땅을 뒤엎어놓긴 했지만, 비료도 뿌려야 할 것이고 적어도 퇴비라도 뿌려놔야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소 똥을 모아 거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지만, 큰 옥수수 농장에 뿌릴 퇴비로는 한참 모잘랐다.

"그래. 알아서 잘 하겠지."

은준의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버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하고. 얼마전에 뉴스에 나오는데 콩고는 내전중이라던데, 그쪽은 괜찮고?"

"콩고요? 거긴 완전 반대편이에요. 저랑은 상관 없어요. 제가 있는 곳은 남아공 북동부 쪽에 있는 리소테라는 왕국인데, 이쪽은 아프리카 동쪽이잖아요. 콩고는 서쪽이고."

"그래도 혹시 모른다? 반군들이 그렇게 잔인하다더라. 애들을 납치해다가 소년병으로 키우고, 얼마전엔 아홉명이서 1살 짜리 여아를 성폭행 했다더라."

"끔찍해, 끔찍해."

마침 사과를 깎아온 은준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접시를 쇼파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못 올거에요. 아프리카가 워낙 넓어야죠. 동쪽 하고 서쪽이 우리나라 동해 서해 이런 수준이 아니에요. 개네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을 텐데 어떻게 올 수 있겠어요. 여기요."

은준은 포크로 사과 하나를 찍어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고는 자신도 사과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렇지. 아프리카가 크긴 크다더라. 세계지도에 나오는건 실제 크기랑 다르다지?"

"네. 아프리카가 사실은 미국이랑 중국이랑 유럽 합쳐놓은 것만큼 커요. 저도 제 농장 한바퀴 돌려면 몇 시간씩 걸린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그래? 그렇게 밭이 크니? 네가 고생하겠구나. 농사는 땅이 좋아야 하는데, 거긴 땅이 메말라서..."

순간적으로 입단속을 못했던 은준은 어머니의 말씀에 속으로 뜨끔했지만,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그, 그렇긴 하죠. 그래도 중고로 농기계를 사서 할만해요. 사람도 쓰고요. 원주민들이 인건비가 싸거든요."

"그래, 농사가 원래 기계도 쓰고 해야해서 돈이 들어가는거야.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땅에 심으면 돈이 열리는줄 알지만, 그러면 농가빚이 왜 있겠니. 기름값 농약값 비료값 종자값, 다 돈이고 빚이야 그게."

"그렇죠. 그래도 전 꽤 이익이 남는 편이에요. 원래 옥수수가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잖아요. 게다가 판매처도 확실하고. 심어서 따기만 하면 파는건 문제 없으니까."

"그래, 일이 잘 풀린다니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은준의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은준이 얼핏 눈치를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듯 해보였다.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고? 아예 거기에 정착할 생각이니?"

"네? 아, 네, 뭐... 이제 막 시작한 참인데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돌아와봤자 할게 뭐 있겠어요."

"그래도 그 먼 곳까지 가서 네가 고생하니까 그렇지. 먹을건 잘 챙격먹는지도 걱정되고."

"하하하, 그건 걱정 마세요. 맨날 소고기를 먹어서 소고기가 질릴 지경이에요."

은준은 정말로 자신이 가장 당당할 만한 문제가 나와서 인지 크게 웃곤 대답했다. 아닌게 아니라 김치와 같은 한국음식이 없는 것만 빼면 한국에서 먹던것 보다 더 잘 먹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매일같이 먹어대는 소고기를 한국에서 먹으려 했다면 그 값이 얼마였을까!

"그렇다고 너무 고기만 먹지 말고! 푸른 채소를 먹어야지. 안그러면 젋었을때 부터 관리 안하면 너 혈관에 지방 끼고 나이들어서 고혈압 때문에 고생한다? 내장 지방도 큰 문제야. 운동은 좀 하고? 일하는거랑 운동하는거는 또 달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거야."

"아이고, 어머니. 저 하루에 두세시깐씩 걸어다녀요. 걱정은 하덜덜 마세요."

"걷기만 하지 말고 뛰기도 해야지."

"뛰기도 해요! 뛰다 걷다, 뛰다 걷다."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이 걱정스러운지 은준 어머지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은준도 그것이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애교로 입막음을 할 심산으로 어머니를 껴안으며 더이상의 잔소리를 봉쇄했다.

"이게 다 커서 왜이래? 이렇게 어리광 부려서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결혼이야 인연이 있으면 하겠지 뭐."

하지만 은준의 이런 대답은 어머니의 속에 염장을 지르는 말이란걸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인연? 아프리카에 있는애 한테 인연이 어떻게 알아서 굴러들어간다니? 잘됐다. 집에 온김에 이야기좀 하자. 너도 이제 서른살 넘었고 좀 있으면 마흔이야. 요즘 농촌 총각들 결혼 못해서 동남아에서 여자 데려와 사는거 몰라?"

쌜죽해진 은준의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돌아앉아서는 쏘아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노총각 노처녀에게 가장 히스테리는 역시 결혼문제...

그 꿀 선물에 가격표 떼는 것은 특별히 가격이 비싸서가 아니라(뭐 그것도 이유가 아닌건 아니지만) 보통 선물을 할 때는 가격표 떼지 않나요? 싼 것이든 비싼 것이든. 전 그렇게 하는거라고 알고 있거든요 ㅇㅅ..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결혼 이야기 나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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