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도 성북동 저택도 아니지만, 근 2년여만에 집에 돌아온 은준은 비록 벤시몽의 저택에 비하면 복층도 아닌 단층에 고개 한번 돌려보면 집 전체가 다 보이는 작은 집이라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벤시몽에서의 생활이라고 신경이 곤두서서 불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30여년을 평생 작은 공간에서 가족들과 부댓기며 옹기종기 모여 살아왔던 그로서는 2년여만의 귀향일 지라도 이 집이 벤시몽보다 더 내집 같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아들...!"
추석 명절때 친척이나 친지들과 함께 먹을 음식과 반찬 준비에 한참이던 은준의 어머니는 벨소리가 울리자 손에 끼고 있던 비닐 장갑을 낀 채로 현관으로 마중 나왔고 오랜만에 보는 둘째 아들을 껴안고 장갑이 닿지 않는 손목으로나마 은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새삼스러워,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은준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지 못하는 것 처럼 부엌을 기웃거렸다.
"배고프지? 뭐좀 먹고왔어? 뭐라도 좀 먹을래? 엄마가 지금 명절 반찬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네."
은준의 친척과 가족은 다른 대부분의 가족들처럼 명절이 되면 한 곳에 모인다. 그럴때면 집집마다 각자 반찬을 해오는게 보통이었는데, 마침 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준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기를 재고 있었는지 이리저리 양념통이 밖에 나와 있었다.
"아냐, 공항에서 먹고 왔어요. 있다가 아빠 오시면 같이 저녁 먹으면 돼지. 번거롭게 그러지 마요. 뭐라도 좀 도와드려요?"
"아니다. 오느라 고생했을텐데 가서 씻고 그러고선 고구마라도 먹어. 엄마가 데워놓을께."
"고구마? 아, 그럼 그냥 줘요. 데우지 말고."
은준은 따듯한 고구마도 좋아했지만, 식은 고구마를 더 좋아했다. 그걸 모를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데운걸 먹이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딸칵.
욕실도 오랜만이었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불을 키고 슬리퍼를 신고, 거울을 한 번 보았다가 훌렁훌렁 옷을 벗어 문 밖에 놔뒀다.
쏴아아!
잠깐 차가운 물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따듯한 물이 샤워기를 통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하아..."
15시간에 가까운 비행기에, 벤시몽에서 공항, 공항에서 집으로 오고가는 차 안에서 보낸 시간까지 합치면 24시간이 훌쩍 넘는 긴 여정이었다. 특히 공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제법 긴장을 했었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맞으며 몸을 주무르자 은준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욕실을 나오자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문 앞엔 예전에 집에서 입었던 웃옷과 바지가 놓여져 있었기에 그것으로 갈아입곤 식탁에 가 앉아 접시에 놓인 고구마 하나를 집어들어 껍질을 깠다.
"깨끗이 씻어서 찐거니까 껍질채 먹어도 돼. 껍질에 좋은 성분이 다 있다더라."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앞에 내려놓으며 그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별 말 없이 껍질을 까던 손을 내리곤 그대로 입에 가져가 한 입 베어물자 속이 노랗다 못해 주황빛까지 나는 속살을 드러내었고, 입 안에는 설탕과는 또 다른 고구마 특유의 진한 달달한 맛이 입안을 맴돌며 은준을 만족시켰다.
이어 빨간 배추김치를 한 젓가락 집어 넣으니 빨간 양념과 다르게 그리 맵지 않고 아삭한 배추의 식감과 함께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겆절이네?"
"추석때 먹으려고 새로 담근거야. 아직 간이 덜 베였지?"
"아냐, 엄마. 맛있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려는듯, 은준은 배추김치를 연달아 몇 번이나 집어먹고서야 다시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은준에겐 이 김치 또한 오랜만에 먹는 고향 음식중 하나였다. 사실 처음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향할 때에는 모든것이 불확실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벤시몽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곡괭이 하나를 들고 혼자서 밭을 개간해가며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을지도 모를일. 그런 상황이니 그 역시도 한국을 떠날때 김치와 같은 한국 음식을 전혀 가져가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의 기후를 봐서는 냉장 보관을 하지 않으면 보관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 당시엔 냉장고도 없이 텔레비젼에 나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 처럼 처마나 천장에 자루를 매달아놓고 거기에 식재료를 보관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은준에게 있어서 벤시몽 땅과 저택을 살 수 있었던것은 정말이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며칠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들 처럼 밑반찬을 가져가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하루라도 더 빨리 현지에 적응하겠다는 결심으로 맨몸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 뒤로는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일 년에 몇 번 구경도 못했던 소고기를 매일 같이 두툼한 스테이크니 뭐니 해가며 잘도 먹었기 때문에 한국 음식에 대해 그다지 간절해하지 않았었다.
사실 타지 가면 음식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 고생한다는 것은 낯선 향신료 때문도 있기는 하지만, 은준처럼 먹는다면 굳이 한국 음식에 목 메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 음식이 맛없어졌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은준은 이처럼 오랜만에 먹는 한국 음식에 감격하고 또 감동했다.
손바닥만한 고구마 두개에 김치만 한 접시를 동 내고선 은준은 슬금슬금 그의 어머니 뒤를 따라다니며 기웃거렸다.
"뭐 도와드려요?"
"아냐, 그냥 앉아있어!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그냥 앉아서 쉬어."
"에이, 아냐 엄마. 그냥 쭉 앉아서 오는건데 뭐가 힘들어. 도와드릴께요. 나 뭐 할까?"
"... 그럼 거기 배좀 강판에 갈아봐. 손 없어서 믹서에 갈랬는데. 그거 갈고나선 짜야하니까 다 갈고 말하고."
"네, 엄마."
은준과 그의 어머니는 함께 요리를 하며 그의 아프리카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때때로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던 이들이지만, 짧게 전화상으로 하는 이야기와 얼굴을 맞대고 길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같을 수 없었다.
물론 그도 아프리카에서의 첫날부터 있었던 기차 안에서의 총격전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카용을 기르게 된 일이나 카용이 자신을 잘 따른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퉁야와 야, 그리고 야의 동생 얌의 이야기. 이주해온 마을 원주민들과 그들을 위해(물론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의료 검진을 위촉한 일. 비록 수확량을 속일땐 속으로 뜨끔했지만, 그래도 이모작을 통해 어지간한 회사 연봉 만큼은 벌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
"아! 아프리카서 가져온거 있는데. 잠깐만!"
은준은 깜빡 잊고 있었던지 부리나케 방 안으로 달려가 캐리어를 들고 나왔다. 그리곤 그 안에서 유리로 된 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 진해 검은빛 까지 도는 호박빛의 끈적한 액체는 기울어지는 병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 위엔 하얀 어떤 것이 덮혀 있었다.
"꿀이야. 위에 있는건 로얄제리. 엄마랑 아빠랑 매일 한숫갈씩 드세요. 이건 할머니 할아버지것. 형것 하고..."
은준은 캐리어에서 꿀이 든 병을 수두룩하게 꺼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뭘 선물로 사올까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정한 것이 바로 이 꿀이었다.
그도 매일 밀크티에 타서 먹고 있는 꿀로, 맛과 향이 무척 좋아 관광객들도 많이 사가는 상품이었다. 물론 이것 말고도 남자들은 녹용 같은 것도 많이 사가는듯 싶었지만, 공항에서 단속에 걸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은준 자신도 녹용은 먹어본 적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꿀 중에서도 가장 좋다는 걸로 골라 사가지고 왔던 것이다.
"뭘 이런걸 다. 엄마 아빠가 잘 먹을께."
은준의 어머니는 꿀단지를 받아 이리저리 살피며 고마워했다. 한국에서도 꿀은 있지만, 아들이 아프리카에서 사왔다니 더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꿀단지의 가격을 알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가 사온 것은 터치 천연 벌꿀로 어른 주먹 세개를 붙여놓은 크기에 무려 120만원이나 하는 비싼 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담스러워 할 까봐 가격표는 미리 떼어 놓았던 은준이었다.
============================ 작품 후기 ============================
새벽엔 비가 갑자기 왕창! 이제 정말 날이 선선해질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