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옥수수라는 작물은 3개월이면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벤시몽 농장의 옥수수도 마찬가지인 터라, 하루가 다르게 질기고 거친 잎줄기의 사이에서 솟아난 작은 옥수수는 얼마 안 있어 수확을 기대해도 될 만큼 커졌다.
"한 2주 뒤엔 수확 할 수 있겠지?"
"그때쯤이면 충분할겁니다. 오히려 너무 늦으면 딱딱해서 별로..."
"그럼 다행히 한창 바쁠때 와서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네."
은준은 퉁야, 쉬사네와 함께 옥수수 농장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얼마전 현지 가이드라는 사람이 벤시몽 농장을 방문했었다. 사전 조사의 명목이었는데, 삼일을 머물다 돌아갔다. 은준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차 안에서 숙식을 전부 해결했다.
다만 마지막 날 벤시몽을 떠나며, 그래도 배웅을 나온 은준에게 한 한마디에 한동안 그의 기분은 저기압 언저리를 맴돌았다.
'뭐, 딱히 볼만한게 있지는 않군요. 하루면 다 돌아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아니, 누가 오랬나? 왜 사람 성질을 건들고 그래? 아오 진짜!"
그때 일만 생각하면 얼굴에 열이 오르는 은준. 차라리 그가 초대를 하고 언제 한번 자랑이라도 했었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전부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꾹꾹 눌러 참았을 뿐이다.
그래서 은준도 이번에 한국에서 오는 방문객들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최호규 교수나 차호중 의사선생님 두 분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닌데 뭐. 알아서 잘 놀다 가겠지."
그렇게 해서 베이스 캠프가 될 터는, 그동안 새로 지은 집이며 발전기, 지하수 공사를 하면서 트럭이나 각종 자재들이 쌓여있었던 공터가 선정되었다. 발을 한 번 뗄 때마다 흙먼지가 풀썩풀썩 피어오르는 곳에.
집이 완성되자 퉁야는 곧장 방을 옮겼다. 특별히 옮겨야 할 것이 많지가 않아, 그가 가진 옷가지등을 가방에 싸서 두 번 왕복하는 것 만으로 끝이 났다.
그동안 그가 사용한 방의 가구들은 전부 저택에 원래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는 그곳에서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 마련해애 할 것이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곧 있을 휴가때 가족을 데려올 때까지 식사만은 지금과 같이 벤시몽 저택에서 은준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다.
"기러기 아빠보고 갑자기 혼자 밥 해먹으라고 하는건 너무 불쌍하잖아?"
아아. 이 시대의 불쌍한 가장 들이여!
발전기의 설치가 끝나자 벤시몽은 더이상 전기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전에는 혹시나 냉장고 전원이 나갈까, 전등도 거의 끈채로 생활했고, 밤이면 주로 스탠드를 사용했다. 그때 은준은 깨달았다.
"미국 영화에서 보면 이상하게 다들 불 끄고 살더니만, 그게 다 이유가 있던 거였어."
한국에 있을땐 은준은 영화에서 항상 집 안을 어둡게 하고 사는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거실이며 부엌이며 안방 작은방 까지 전부 환하게 하고 사는 것이 일상인 것과 반대로, 방 안에 있을때조차 침침한 스탠드 조명 하나에 의지해 책을 읽는 모습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였다.
하지만 벤시몽에서 살면서 그것이 비싼 전기요금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전기를 줘도 쓰지 못하니, 아예 전기가 없는 것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또 한가지 이유는 굳이 저택 안의 불을 전부 켜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집이야 단층이고 거실이며 방이 전부 연결되어 있으니, 그중 하나라도 꺼져있으면 어두워보였지만, 복층에 집 안에 복도까지 있다보니 모든 전깃불을 켜놓는게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잘때 끄러 다니는 것도 일이고 말이야."
말 그대로 매번 불을 켜고 끄려고 '방방곳곳'을 다니는 것도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들어 카용은 은준을 제법 따르게 되었다. 포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길들여진 것인지 은준이나 야를 볼 때면 더이상 경계하며 짖지 않았다.
"컹! 컹!"
물론 아예 짖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이렇듯 은준이 먹을것을 들고 나오는 때면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쉿! 쉿!"
은준은 손에 큼지막한 고깃조각 하나를 들고 펄펄 뛰는 카용을 다른 손으로 진정시켰다.
"카용, 기다려! 기다려!"
은준이 명령을 내리자 카용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혀를 길게 내밀고 '헥헥'거리며 꼬리와 엉덩이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야말로 허리를 기준으로 앞과 뒤가 서로 별개인 생물처럼 앞은 명령대로 가만히 있는데, 뒤는 안절부절 못하고 쉴새없이 발을 구르며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은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앉아', '엎드려' 따위의 단순한 명령 몇 가지를 시험하고 되새겨준 뒤에야 먹이를 받게 된 카용은 허겁지겁 고개를 그릇에 처박았고, 곧 그릇은 뒤집혀 쏟아졌지만 카용은 개의치 않고 그것을 줏어먹었다.
순식간에 그릇이 비고 더달라는듯 은준을 올려다보았지만, 은준이 준비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자, 오늘은 산책을 한번 나가보자. 할 수 있겠지?"
아직은 조심스러운 은준이 준비한 목줄을 채우자, 카용은 바뀐 목줄이 낯설은듯 앞다리와 뒷다리를 번갈아가며 목줄을 할퀴었지만, 튼튼한 가죽으로 된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 은준이 목줄과 연결된 쇠사슬을 당기자 카용은 주저앉아 목줄을 긁던 것을 멈추고 은준의 뒤를 따라 발을 놀렸다.
"옳지! 잘한다!"
한동안 야생성을 억누르기 위해 마당에만 묶어 두었던 카용이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왔을 때의 반응이 걱정이었던 은준은 카용이 제법 그의 뒤를 잘 따라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때때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주변의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은준이 목줄을 한 번 당기면 관심을 거뒀다.
은준과 카용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점심때가 될 무렵이었다. 이것은 은준의 일과중 하나였는데, 바로 그의 옥수수 농장을 한바퀴 걸어서 돌아보고 오는 것이었다.
농장의 크기만큼이나 그 시간도 오래걸려, 빠른 걸음으로 다른데 신경쓰지 않고 걷기만 해도 2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덕분에 은준의 몸매는 제법 살이 빠져 한국에서 책상 앞에서만 있었을때와 달리 뱃살도 빠져 있었고, 활을 가지고 놀은 덕분인지 그의 근육은 우락부락하진 않아도 탱탱하게 당겨져있었다. 활은 양 팔로만 당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론 전신 운동이었다.
영양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건전한 성생활까지. 은준은 태어난 이후로 인생에서의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야..."
점심 식사를 마친 퉁야가 농장을 돌보러 밖으로 나간것과 달리, 한 잔의 밀크티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있던 은준은 돌아서서 설겆이를 하고 있는 야의 뒤로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키스들.
"야는 뭔가 하고 싶은건 없어?"
야의 등에 기댄 은준이 감싸안은 두 손을 빼지 않은채 그녀에게 속삭였다. 야의 동생인 얌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들었지만, 막상 야의 꿈은 들어본적이 없었다. 동생을 위한 언니의 희생인지 17살에 자신에게 고용되어 가정부가 되었고, 그러다 어느샌가 그와 이렇게 살을 섞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은준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욕심이었긴 했지만, 이제 막 18살이 된 여자아이를 평생 집 안에서만 살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와 은준이 자란 환경, 살아온 세계가 달랐고, 야에게는 지금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었다.
"제가 바라는건 당신과 얌 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은준은 싶은 곳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어느 남자가 자신에게 안겨있는 여자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냉정할 수 있을까.
"숙여봐!"
"꺅! 여, 여기서요? 여긴 주방인데...!"
"퉁야는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을거야..."
은준은 부끄러워하는 야에게 나지막이 속삭였고, 곧이어 벤시몽엔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 작품 후기 ============================
은준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독자 : 야메로! 모 야메룽다!
읽어주신분들, 추천해주신 분들, 쿠폰 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컴퓨터는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좀 더 두고봐야겠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