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은준은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야가 세탁해놓은 외출복을 챙겨 입었다. 오늘 같은날 절대 작업복을 입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까만 건설 노동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고개를 좌우로 비틀며 턱수염이 거슬리진 않는지 문질러보았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사냥용 라이플을 등 뒤에 갈로질러 매고는 방 문을 나섰다.
그가 가려는 곳은 한국에서 온 의료 봉사단들이 있는 마을 서쪽.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을테지만, 사냥용 라이플을 가져가는건 일종의 허세였다.
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던 은준은 마침 저택 현관문을 열고 까르르 웃으며 들어오는 두 여학생과 마주쳤다.
"앗,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들은 은준과 마주칠것이라 생각지 못했는지 살짝 놀라는가 싶더니 먼저 고개를 꾸뻑 숙이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잘들 잤어요?"
"네에-."
은준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고는 슬쩍 옆으로 몸을 비키자, 여학생 둘은 한번 더 꾸뻑 하고는 옆으로 돌아 1층의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뒤를 은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멈춘곳은 여학생들의 뒷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흙덩어리였다. 그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집혔다.
"끙!"
그 모습에 부엌에 있던 야가 얼른 달려와 빗자루와 쓰레받이로 떨어져있는 흙을 깨끗이 치워냈다. 은준은 한 번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곤 긴 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 진짜 개념들 없네. 발에 흙이 묻었으면 털고 들어오던가, 자기네 집도 아니면서. 저거 저러고 들어갔으면 화장실도 전부 흙자국 남는거 아냐?'
은준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저택 벤시몽은, 예전 프랑스인 노신사가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벤시몽은 현대적인 인테리어보다는 엔틱풍의 가구나 구조를 따르고 있었는데, 은준은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유럽식의 고풍스러움을 무척 아끼는 편이었다. 그동안은 야가 워낙 잘 관리를 하니 신경쓰지 않아도 항상 깨끗함을 유지했지만, 이처럼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지자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리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설마 막 깨트리고, 예뻐보인다고 슬쩍 가져가는건 아니겠지?"
은준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제 막 스무살쯤 되는 요즘 애들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야에게 말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밭을 돌아보며 슬슬 걸어서 도착한 봉사단 캠프는 벌써부터 줄을 서 있는 주민들을 상대하느라 분주했다.
그는 오랜만에 한국말로 한국인들과 인사도 하고 짧게 이야기도 나누면서 곳곳을 살피며 다녔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총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전부 남학생들 뿐이었다.
은준이 일찍부터 이렇게 부지런히 마실을 나온 이유는 아이쇼핑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쇼핑이라면 물건을 사지 않고 눈으로만 즐기는 일일진데, 무엇을 구경하겠느냐 할지도 모르겠으나, 은준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좋군. 좋아!"
그의 시선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다르게 하얗고 고운 피부를 한 여학생들을 향하고 있었다. 매일 까맣고 코평수 넓은 이쪽 여자들만 보다가 한국에서 온 여학생들을 보니 그 어느 누구도 예뻐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물론 내 집에 흙발로 들어올때는 빼고!'
잠시 최호규 교수가 은준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일도 있었지만, 모두들 워낙 바쁜 와중이라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은준도 그런걸 바란적도 없었지만. 대신 그는 다른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아... 어떻게 한명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지난번 이곳에 머물다 간 얌과 다르게 저들은 전부 성인들. 서로간에 마음만 맞는다면 남녀간의 일이 있어도 문제될것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저들중 하나를 꼬시냐 하는 것이었다.
"이제 3일인가? 그동안에 무슨 수로 꼬시지? 게다가 일(?)을 치르려면 그 전에 쌀이 익게 둬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아. 게다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고. 음, 나의 남자다움을 보여줘?"
은준은 방법을 연구했다.
'트랙터나 트럭으로 드리프트를 하면서 남성미를 뽐내? 웃통을 벗고 근육을 움찔대며 괭이질을? 아니면 사냥을 해서 어깨에 짊어지고 와볼까?'
그는 이곳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여자들에게 자신의 남성미를 뽑낼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아무리봐도 한국에서 온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한 것을 좀처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원래 여자들은 아무리 비싸도 트럭이면 그냥 트럭일뿐이지. 예전에 그 누구야, 어떤 사람이 소개팅에 F-450인가? 그걸 타고 갔는데, 트럭 타고 다닌다고 뭐라 했다지? 하물며 내 용달차쯤이야... 또 총 맞아서 구멍이 뻥 뚫려 피 뚝뚝 흘리는 동물을 짊어지고 오면 어떻겠어. 야만인 소리 들으면서 고기보고 불쌍하다며 나만 마이너스 되는거 아닌가몰라.'
은준은 차라리 시간이라도 좀 더 있었으면 하고 소원했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편안한 오빠 스타일로 천천히 접근이라도 해보게 말이다. 그렇지만 저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삼일 후엔 한국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렇다고 강제로 했다간 병신 인증이지.'
좀처럼 방법이 보이지 않자 은준은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픽업아티스트도 아니고. 게다가 모처럼 가장 나은 옷이라고 입고 나온 옷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색상이나 디자인이 옆에 있는 원주민 아저씨가 입은것과 별반 달라보이지도 않았다. 큼지막한 셔츠에 통이 넓은 바람 잘 통하는 면바지. 색도 저들이 입고 있는 파란 조끼에 비하면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에잇, 기다렸다가 야나 꼬셔야지. 그래. 괜히 하룻밤 여자 불러들였다가 야한테 들키면 호감도에 마이너스야!'
그렇게 마음을 먹자 어느정도 마음이 편해지는 은준이었다. 삼일 안에, 가 아니라, 삼일만 지나면, 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한편으론 그런 쪽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운 생각도 드는 은준이었다.
'내가 너무 굶주렸나? 내가 생각해도 요즘엔 맨 그쪽으로만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뿐이잖아? 한국에 있을땐 안그랬는데. 문명에서 멀어지니 유일한 오락이라 할 수 있는 성욕만 커지는건 아닌가 몰라.'
그렇게 순식간에 삼일이 흘렀다. 야와 함께 은준도 아프리카에서 반년 넘게 살았기 때문에 그도 몇 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떠나기 전날 결과가 나와 그것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의료 봉사단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물은 꼭 끓여드시고요, 손을 깨끗이 씻으셔야해요. 아시겠죠?"
한 사람이 나서서 주의사항을 설명하면, 옆에서 가이드로 따라온 이가 통역을 해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줬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이도 있었다.
"이건 기생충약이에요. 물을 끓이지 않고 마셔서 모두 뱃속에 기생충이 있어요. 이걸 드시고, 앞으로 물은 항상 끓여드시면 괜찮을거에요."
하며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가져온 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저, 음... 선생님도."
은준의 앞으로 다가온 남학생이 날 뭐라고 불러야하나 주저하다 선생님으로 부르기로 했는지 뻘쭘해하며 약을 내밀었다. 그러자 은준은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에?"
"기생충 약입니다. 알약이니까 물과 함께 삼키시면 되세요. 그럼."
은준은 손에 들린 약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 자신은 초등학생때에도 기생충이라곤 모르고 자랐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 기생충약을 먹으라며 열살은 어려보이는 학생에게 기생충약을 받은 것이다.
'내가 기생충이라니! 아니, 내게 기생충이라니! 이 나이에 기생충이라니!'
============================ 작품 후기 ============================
음.. 주인공이 많이 찌질해보이나요?
보통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면 대단한 능력도 많고, 자기개발과 자기계발에 분초 단위로 노력하기는 하죠. 질리지도 않고;; 그런데 그런 쥔공은 너무 흔하잖아요?
그래서 제 글에선 조금 평범한, 주변에서 볼 수 있을법한 그런 인물을 가져오고 싶어합니다. 예를들어 연초에 운동이나 금연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우지만, 쥔공처럼 얼마 못가 흐지부지 한다거나... 남들 앞에선 있는척 하기도 하고, 마구 주변에 퍼주지도 않고, 이상한데서 까탈스럽기도 한.
그런걸 찌질하다고 표현한다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찌질함이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런게 평범한 인간군상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서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