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다섯개의 옥수수 밭에 옥수수를 모두 심고 며칠이 지나자 가장 먼저 옥수수를 심었던 1번밭에서부터 차례대로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밭 하나에 이틀 정도씩 걸렸으니 며칠 더 지난걸 생각하면 한 보름만에 난건가?"
은준은 그정도면 제때 난 것이라며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드문드문 싹이 나지 않아 비어버린 곳도 있었지만, 가로 세로 1km에 달하는 100헥타르의 거대한 옥수수밭에 그정도 구멍은 큰 손실도 아니었다.
"모종을 키워 심은게 아니라면 싹이 안나는 것도 있는게 당연한거지."
집에서 작은 화단을 만들어 고추나 상추같은 간단한 채소를 길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다는 것은 씨앗을 심은 깊이, 물 그리고 종자의 상태 등 여러가지 조건이 맞물리지 않는다면 끝내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게다가 모두가 똑같은 시기에 싹을 틔우는 것도 아니라서 종종 좀 더 일찍 나거나 뒤늦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다시금 열흘쯤 시간이 지나면서 마지막 다섯번째 옥수수밭에도 싹이 움트자 그때쯤엔 벌써 처음 심었던 밭은 옥수수대가 손가락 하나 길이 만큼은 솟아올라왔다.
"이야, 정말 잘 자라네!"
은준은 은근히 감격스러워짐을 느꼈다.
"저게 전부 돈이란 말이지?"
물론 그것은 농작물을 자식처럼 돌보는 농부의 마음과는 조금 달랐지만, 옥수수들(?)은 그러한 세세한 사정까지는 몰랐고 그저 물을 주는대로 빨아드리며 매일매일 조금씩 덩치를 불려나갔다.
그렇지만 모든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훼이! 저건 뭐야. 훼이, 저리가!"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자 그것을 노린 초식동물들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은준은 밭을 돌아보던중에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들고있던 화살을 쏘아내고 활을 크게 흔들며 큰 소리를 내어봤지만, 사슴의 몸에 염소의 뿔 같은 것을 단 것 같이 생긴 그것들은 우두두! 하고 멀찍이 물러나 주변의 잡풀을 뜯는 것 같으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듯 옥수수밭을 종종 주시하였다. 그 바람에 은준은 그곳을 떠나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녀석들을 경계해야만 했다.
"어휴, 이 발자국들좀 봐. 죄다 밟아놨네!"
은준이 돌아오지 않자 쉬사네가 그를 찾아왔다.
"저건 스프링벅이군요."
"스프링벅?"
"예. 흔히 볼 수 있는 초식동물입니다. 음, 어쩌면 흔치 않을지도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제가 듣기론 멸종 위기종 중에 경미한 위기종 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잡으면 안된다는 소린가?"
"글쎄요.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경미하다니까 조금은 잡아도 되지 않을까요?"
사실상 많은 동식물에는 멸종 위기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눠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곳처럼 동떨어져 사는 원주민들에겐 그다지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식량이나 가죽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면 상관하지 않고 잡았고, 필요가 없으면 굳이 사냥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마을마다 감시를 할 사람을 붙일수도 없었기에 이러 멸종위기 등급은 전문적인 사냥꾼이나 사냥 여행을 온 사람들 혹은 자연보호협회와 같은 곳에서 온 이들에게나 관심이 있는 문제였다.
"울타리라도 쳐놓으면 좋겠는데."
은준이 생각하는 것은 군대에서 보았던 윤형철조망이었다.
"그런데 돈이 없군. 쩝."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옥수수 농장을 크게 개간하는 바람에 돈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또 사람들을 데려다 써야 하나."
둘은 크게 스피링벅 무리들을 휘저어 멀리 쫒아내고는 마을로 향했다.
"에구. 여기도 그러네. 이건 소 발자국인가? 소똥이 있네."
마을에 가까워지는 쪽의 밭도 비슷하게 발자국이 많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한 은준은, 그것이 소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소를 키우는 이는 마을 사람들 밖에 없으니 그들이 범인일 터였다. 옆에선 쉬사네가 무안한듯 변명을 했다.
"소란 동물이 뜻대로만 움직이는게 아니라서..."
"험!"
은준도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아쉬운 소리를 하는건 대부분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비록 임금을 지불하고는 있긴 하지만, 큰 일이 아니라면 굳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었다.
마침 마을에는 남정네들이 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쪽 밭에선 여자들이 그네들의 밭을 일구고 있었지만, 밭일을 하는건 여자들의 몫이었다.
밭을 순찰하는 것도 적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은 남쪽으로만 발견되었지만, 언제 어느쪽에 무엇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 농장의 외곽 둘레는 총 9km. 중간에 마을 서쪽으론 1km쯤 비어있지만, 그쪽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 야생동물들이 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1km를 순찰할 필요가 없다고 그만큼 사람이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순찰은 계속 끊어지지 않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1km분의 인력도 역시 필요했다.
"그러지 말고, 한 사람마다 구역을 나눠주고 알아서 돌보게 하시죠? 뭔가 이상이 있으면 가보면 되고, 굳이 계속 돌아다닐 필요까진 없을텐데요."
"으엉?"
은준은 이마를 탁! 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차차!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벌써 머리가 굳었나?"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순찰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시작이 밭 테두리에 철조망을 치자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철조망을 따라 순찰하는 것이 마치 GP에서의 군인들이 간격을 두고 감시하는 것에 미쳤고, 그대로 따라하려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방이 뻥 뚫린 이곳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날씨는 좋았고, 시야는 확 트여있었다. 스프링벅들은 그들을 감시하는 인간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냥감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인간들에게 몇 마리가 잡혀가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간 시일이 더 지났을때, 은준을 찾는 전화가 울렸다.
"누구지? ...아! 차호중 선생님!"
은준은 전화기에 뜬 발신자 표시를 보고는 전화를 한 이가 처음 이곳에 왔을때 자신을 도와줬던 의사 선생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 혹시 전에 내가 말했던 그것 때문인가? 아하, 그러고보니 한국은 여름방학을 시작할 때쯤이구나!"
은준은 전화를 받으며 생각했다.
'이제 음성 반응만 나오면 안심하고 작업을 해봐야지. 설마 양성으로 나오진 않겠지?'
평소 야의 성격이나 생활 태도등을 보아왔던 은준으로서는 야가 에이즈에 걸렸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이즈라는 것이 단순히 성의 접촉뿐만 아니라, 운이 좋지 않으면 다양한 경로로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재수가 없어서 에이즈 환자가 세상에 불만을 품고 택시 의자에 자신의 피가 들어간 주사를 숨겨놓았다가 다음 승객에 거기에 찔려 에이즈에 걸리는 일도 있는 세상인 터였다.
"예, 선생님. 하하, 별일 없으셨구요?"
은준은 반갑게 전화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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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요. 금요일이네요.
말은 안하지만 항상 여러 독자분들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 맘 아시죠?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