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며칠 지나지 않아 은준은 쉬사네로부터 새것인 활과 화살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흰색에 가까운 나무로 만든 길이가 1.2m 쯤 되는 그런 활이었는데, 화살은 열 대를 함께 보내왔다. 그것을 받은 은준은 새로운 장난감을 받아든 아이처럼 희히낙락하여 곧장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가 활과 화살을 살펴보니 역시나 화살촉은 살대 끝을 그대로 뾰족하게 깎은 것에 불과해, 아무곳에다 쏘았다가는 몇 번 쏴보지도 못하고 촉이 뭉개지거나, 어쩌면 화살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고민을 하던 그는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활을 어깨에 가로질러 매고는 창고로 달려가 남아있던 건초를 한 짐 꺼내와서는 마당 한쪽편에 착착 쌓아 표적을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을 해낸 스스로가 대견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그 앞에 섰던 그는 무언가 아쉬웠는지 잠깐 탄성을 내뱉곤 부리나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찾아 사방을 뒤지고 다녔다.
"엣! 에엣? 뭐라도 찾으세요? 도와드려요?"
그 바람에 털이개를 들고 구석을 돌아나오던 야가 깜짝 놀랐다가 은준에게 물었다.
"어, 그래. 혹시 큰 종이같은게 있을까? 그냥 큰 종이 말고, 한 이정도 되는걸로."
좀처럼 찾는게 보이지 않던차에 집안일을 담당하는 야가 도와준다고 하자 불감청고소원이 되어 자신의 몸뚱이 만큼 팔을 벌려보이며 물었다.
"그렇...게 큰 종이는 저도 보지 못한걸요?"
"역시 그런가."
은준이 생각하는 것은 2절지 정도되는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 몇 겹의 동심원을 그려 일종의 표적지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평소에 2절지 짜리 종이를 집에 비치해놓는 집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벤시몽도 다르지 않았다.
"아, 달력!"
잠시 풀이죽었던 그는 몸을 돌려 나오려다 벽에 걸려있던 달력을 발견하고는 유레카를 외치며 달력을 내렸다. 다행히 달력은 달이 바뀌면 찢어 버리는 모양이 아니라 뒤로 넘기는 형태였기 때문에 겉장을 포함해 몇 장쯤 뜯어내도 달력을 보는데 문제는 없게 되어있었다.
표적을 완성한 은준은 겨우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활을 들고 섰다.
"잘 맞으면 조금씩 뒤에가서 쏴야지!"
그렇게 은준의 활 수련이 시작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은준은 아예 악어가죽으로 만든 골무까지 끼고 활을 쐈다. 원래 이곳 사람들은 골무나 깍지를 쓰지 않고 활을 당겼기 때문에 그런것이 없었지만, 손가락이 아파 은준이 야에게 부탁해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골무는 순전히 장갑의 손가락 부분만 잘라 낀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활에 대한 연습은 제법 오래갔다. 실력도 처음보다 훨씬 좋아져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표적을 맞출 정도였는데, 다만 표적을 맞출 뿐이지 정중앙에 들어가는건 열에 하나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밀크티에 대한 사랑도 계속되었다. 어쩌면 이 밀크티를 마시겠다는 애착이 활을 놓지 못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활을 쏘는게 그렇게 운동이 된다지? 이게 전신운동이래잖아. 나는 지금 충분히 칼로리를 소모하고 있는 거라고."
화살을 한대 쏘고는 그렇게 다시 달달한 밀크티를 한모금 마셨다.
사실 그렇게 꿀을 듬뿍 넣은 밀크티를 마시면서 살이 찌는게 싫었다면 차라리 뜀박질을 하는게 나았겠지만, 은준도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으험, 으험! 원래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 법이지. 우리 집안에 옜날엔..."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 양반 아니고 왕족 아닌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만은, 어쨌든 그의 핑계도 나름의 이유(?)는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은준을 좋게 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야 였다.
사실 한국에서 젊은 남자가 이런 대낮에 직장에도 안 나가고 활을 들고 활터에 나가서 화살 한 대 쏘고 차 한잔 마시고를 반복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달랐다.
한국에서 활을 쏜다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취미, 또 하나는 직업. 특히 직업적인 이유로 활을 쏜다면 그것은 또 양궁을 하는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아프리카에서 활을 쏜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사냥이다.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발전된 도시에서라면 활을 쏴서 사냥을 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벤시몽. 바로 얼마전만해도 활과 창으로 악어를 사냥해와 가족들을 부양하는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사는 곳인 것이다.
즉, 은준의 이런 한량같은 생활이 여기서는 생계수단을 연마하는 모습으로도 비출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농사철이 아니라고 빈둥대는 모습만 보던 야로서는 이렇게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야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은준은 속으로 꽤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냐, 아냐. 이게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부족하단 말씀이야. 원래 활의 위력이 이것밖에 안되나? 아니면 내가 실력이 모자란건가?"
은준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활의 위력이었다. 비록 그가 활을 수련한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음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사냥을 할 때에는 활 보다는 창을 더 선호했고, 활을 쏴서 사냥감을 맞추는 것은 나무 위에 앉은 새를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 쏘아 맞춰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은준이 생각하는 것은 100m, 200m 밖에서 활을 쏴 사냥감을 잡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가 만족을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나무촉으로 동물들의 가죽을 뚫는것도 쉬운 일이 아닐테지. 게다가 보통 활로 사냥할 때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쐈었잖아?"
그는 마을 사람들이 악어에게 활을 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멀리서 활을 쏴 악어를 잡는게 아니라, 가까이 유인한 다음 창으로 찌르고 코 앞에 화살을 대고 쏘아 맞추는 식이었었다. 그 모습은 활을 쏴 사냥을 한다기 보다는, 나무의 탄성을 이용해 뾰족하고 얇은 화살로 사냥감을 찌른다는 느낌이었다.
"역시 활이 문제야. 이건 뭐 그냥 긴 장대에 끈만 달아서 쏘는거지 뭐 있어? 활이라면 복합궁 정도는 되어줘야지! 활은 국궁이 최고야!"
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얼마 없는 은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것을 지적해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그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납득해버렸다.
"그래. 다음에 한국에 들어가게되면 한번 제대로 배워와보자. 여기 사람들은 그냥 당겼다 놓으라고만 하지 원... 그런데 활을 가져오게되면 비행기에서 통과할수는 있을까? 화살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것 같은데..."
시위를 풀면 반대쪽으로 동그랗게 말린다는 국궁에 생각이 미친 은준은 거기에 혹해 들고 있던 막대기같은 활이 성에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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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화살은 기내 말고 화물로 짐칸에 넣으면 통과된다고 하던데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