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해 겨울>
은준의 제안이 있고 일주일여가 지나갔다. 그동안 표범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준은 밖에 나갈땐 항상 사냥용 라이플을 어깨에 거는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행군하는 현역 군인도 아니고, 매일 총을 매고 저택과 농장을 왕복하는 일이 편할리가 없었다.
"나중에 권총이라도 하나 살까?"
돈이 있으면 물건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으니, 권총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돈이지만, 봄이 되어 옥수수를 심고 그 옥수수를 판다면 권총 값이 문제는 아닐 터였다.
그러는사이 은준은 낯선 얼굴을 몇 명 발견했다. 그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왔지만, 일을 하지도 않았고, 일당을 받아가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농장 밖으로 사라졌다가 멀리서 보이기도 했고, 다시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쉬사네는 그들이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라 했는데, 은준은 그들이 일종의 조사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제안에 마을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그의 땅을 다니는걸 막지는 않았지만, 혹여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지에 대해선 항상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표범이 나타났던 이후로 다시금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은준의 마음에도 약간의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과연 마을의 이주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문제였다. 전과 같이 야생 동물이 계속적으로 출몰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조용하다면 꼭 마을을 이전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 표범은 당시 누 떼를 따라 지나가던 녀석이었을지도 몰랐고, 혹은 떠돌이나 그 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고 그가 먼저 꺼낸 제안을 며칠도 못가 스스로 철회한다면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도에 중대한 흠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럴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사나흘이 지나 은준이 마을 이전을 제안한지 열흘쯤 지난 뒤 십여명의 사람들이 쉬사네와 함께 은준을 찾아왔다. 그들 중에는 그동안 함께 일 해온 일꾼들도 보였으며, 낯설긴 하지만 전에 마을에서 보았던 것 같기도 한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두 사람은 수염이 희끗희끗했는데, 은준은 그들이 두 마을의 대표가 아닐까 생각했고, 그것은 정확했다.
"우리 둘은 두 마을의 대표로 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소토어였고, 아직 소토어를 잘 모르는 은준을 위해 중간에 쉬사네가 통역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은준 옆에는 야가 시중을 들며 함께 있었는데, 그는 미리 야에게 쉬사네가 서로간의 통역을 올바르게 하는지 지켜보도록 지시를 해 둔 상태였다.
그렇다고해서 은준이 쉬사네를 믿지 못하고, 쉬사네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혹여나 있을 서로간의 오해를 미리 방지하는 차원에서의 일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론 쉬사네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없지않아 있었는데, 견물생심이랬지만, 애초에 나쁜 마음을 먹은게 아니라면, 옆에 야와 같은 이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른 마음을 품지 못 할 터였다.
"환영합니다. 결정은 내리신 겁니까?"
"우리는 열흘전 이곳으로 일을 나갔던 이들을 통해 그 제안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그 문제를 중대하게 받아들여 마을 사람들과의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
"우리 두 마을은 제안에 따라 이곳으로 마을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두 마을과 저는 앞으로 서로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은준은 마치 어느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대답을 하고는 스스로 만족해했다. 미리 준비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너무 거창하게 '협력 관계'라고 말하지는 않았나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은준은 거대한 옥수수 농장을 소유하고 또 소유할 일종의 곡물 회사나 다름 없었고, 두 마을은 수십명의 일꾼들을 제공하는 인력 회사라고 생각하면 이들간의 거래가 B2B, 즉 기업간 거래라고 생각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은준은 이들이 좀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타부타 결론을 말할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마을 이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며 결론부터 말해오자 약간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환대했다.
이 건은 은준이 먼저 제안을 했던 것이었고, 만약 이들이 찾아왔을때라도 그가 먼저 마을 이전 문제를 무효화 했다면 모르지만, 그들이 직접적으로 마을 이전을 하겠다고 대답을 해온 상태에서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뒤로 서로 결과에 대한 합의를 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은준의 생각대로 요 며칠 모습을 보였던 낯선 이들은 두 마을에서 보냈던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은준의 제안을 들은 두 마을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비록 마을 남자의 절반이 넘는 이들이 이 곳에 와서 일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을을 옮길것을 제안 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들이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서구나 동북아와 같이 현대 문명이 발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거기에 순응해 살아가는 지혜를 가진 이들이었다.
때문에 고민끝에 사람을 보내 이곳이 마을을 옮기기에 적당한 땅인가를 살피게 하였던 것이다. 지형이나 물웅덩이와 같은 수원, 그리고 작물이 잘 자랄것인지 등등. 그러고 나서 충분히 마을이 들어서기에 괜찮은 땅이라는 생각이 든 뒤에야 이렇게 은준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 마을은 합치는 것으로 하고, 위치는 이 벤시몽 저택에서 서쪽으로 이백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을 이전하겠다는 결론은 은준이 제안하고 이들이 받아들임으로서 합의가 되었지만, 세세한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셋은 길게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몇 가지 합의를 도출해내기에 이르렀다. 은준이 선언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 두 마을이었던 곳은 서로 합쳐서 하나의 큰 마을이 되기로 하였다. 이 부분은 크게 반발이 있지는 않았다. 비록 서로 떨어져있는 두 마을이었지만, 더 멀리 떨어진 도시와도 왕래하던 이들이었다. 두 마을은 그 전부터 알았던 사이로, 사실을 알고보면 완전히 연관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마을이 아주 크지 않는 이상 시간이 흐르면 결국 마을 사람들 서로가 어떻게든 핏줄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왕래가 있던 두 마을은 서로의 처녀와 총각을 결혼시키며 피를 섞어왔고, 이 마을의 아주머니가 사실은 저 마을 누구네의 딸이라던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상황이니 마을을 합치는데 큰 반발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새로 들어올 마을을 저택으로부터 떨어트려놓은 것은 은준의 절대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또 두 마을도 꼭 벤시몽 저택과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조항이 들어간 이유는 은준 때문이었는데, 그 속에는 은준이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는 속내가 숨어있었다.
그는 처음 남아공에 도착해 기차를 탔을때 총격전에 휘말렸었는데, 그 뒤로 그의 인식속에 이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이 깊이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퉁야를 2층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 영향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은준으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남아공은 한국과 달리 무법지대라는 인식이 강했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크게 옥수수 농사를 지어 그것을 팔아 많은 돈을 벌게되면 이들이 다른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은준 한명이 죽더라도 과연 누가 알아줄 것이며, 또 누가 구해줄 것인가. 누구는 과하게 그가 소심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은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구책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을 근처에 밭을 일구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은 괜찮지만, 규격은 지켜야 하고 가축의 배설물의 처리는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은준으로서는 토지라는측면에서 두 마을이 원래 있던 자리에 있든, 이곳에 옮기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기존에 있던 장소도 은준이 구입한 땅 안에 있었고, 새로 옮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둘 다 자신의 땅이니 어느쪽이든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저쪽에 마을이 있다면 이쪽엔 옥수수밭을 만들면 되고, 이쪽에 마을이 옮겨오면 저쪽을 옥수수밭으로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먹기 위해 작물을 기를 밭은 그가 생각하기로 문제가 있었다. 전에 몇 번 이러저런 이유로 마을을 방문했었을 당시 보았던 밭은, 집 가까운 곳에 제맘대로 생겨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선 안됐다. 밭의 경계선이 삐뚤빼뚤하면 공간의 활용성이 떨어진다. 옆에 옥수수밭 하나를 경작하려고 하는데 밭 하나가 거기에 말뚝처럼 박혀있으면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괜히 도시계획이란게 있는것이 아니다. 강제로 밀어버리면 못할것도 없지만, 앞으로 쭉 좋은 관계를 지속해나가야 할 처지에서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애초에 못을 박는 것이다.
또 가축의 배설물 문제도 있었다. 기존에는 어떻게 처리해왔는지 모르지만, 은준은 걸어다니면서 변을 밟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침실에 그 냄새가 배게 할 생각도 없었다. 안되면 한데 모아 옥수수밭에 뿌릴 퇴비로 만드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은준이었다.
조율할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은준은 그것을 전부 앞의 두 사람과 상의를 하여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은준은 몇 가지 결과를 낼 수 있었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이웃해 살아가다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 때마다 내용을 추가하기로 했다.
어쨌든 큼지막한 그런 문제 말고도 자질구레한 것들도 많았는데, 그것은 물에 관한 것이나 아이들 혹은 가축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두 마을 대표는 처음엔 물은 물웅덩이에서 떠와 사용하려고 했다. 기존에도 몇 시간씩 걸어서 물웅덩이의 물을 떠왔으니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준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저택 안에 있는 샘물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때도 아프리카의 원주민 마을들이 물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를 방송으로 여러번 보아왔던 그였다. 깨끗한 흐르는 강물도 아니고, 고여있는 물웅덩이의 물을 떠다 흙탕물을 가라앉혀 쓴다는게 얼마나 비위생적일까? 그래서 은준은 자신의 마당에 있는 샘을 개방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만 그 방법은 차차로 생각하기로 했다. 직접 사람들이 저택에 들어와 물을 퍼가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며 시끄러울 터였다. 또 물을 푸러 다니다보면 애들도 같이 따라다닐텐데, 대체로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어쩌다보면 아이들이 저택 안으로 드나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게 은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저택 접근 금지와 함께 물에 관한 문제는 저택 밖에 물통이나 물탱크를 하나 설치해 거기에 물을 채우면 사람들이 그 물을 떠다 사용하거나, 나중에 마을 가까이에 다른 샘을 하나 파주는 것을 생각했다. 이곳에 지하수가 흐르면 가까이에도 그 줄기가 이어졌을 테고, 샘 하나정도 더 파는 것은 사원 복지(?) 적인 면에서 해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이정도로 하는게 한계일듯 싶군요. 선례를 찾을 수 있다면 참고를 하면 좋겠지만, 그럴것 같지는 않고. 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 이런식으로 더 내용을 추가하도록 합시다."
긴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회의가 끝나고 일행들은 각자의 자리로 해산했다.
마을 이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하기로 했는데, 봄이 오기 전에 마을을 옮기고 파종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은준도 최대한 협조를 하기로 했는데, 기름값이 꾀나 들겠다며 잠시 투덜거린게 전부였다.
============================ 작품 후기 ============================
천지패왕님, 치야님, 참좋은아침님, 마비류연마님, 중앙시장님, 비류님, 암향무님, 파블님, 남장기바둑님, 안녕하세요.
아...한번 썼다가 후기 인삿말 쓰다가 날아갔습니다. 왜 조아라는 자동저장 기능이 없는 걸까요!!!! 악!!! 짜증나!! ㅋㅋㅋㅋ(웃는게 웃는게 아닙니다)조아라는 나쁩니다. 자동저장 해주세요 ㅜㅜ다시 써서 올립니다 ㅜ 근데 처음에 썼던게 더 잘썼던것 같은데 다시 쓰려니 마음에 안드네요 쩝; 먼저 쓴 글에 적었던 내용이(자질구레한) 전부 생각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대로 다시 칠 재주는 없으니 그냥 이렇게 올립니다 ㅜㅜ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나 커서 지쳐 힘드네요시간 버리고, 퀄리티 버리고 .... 쳇쳇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