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은준이 고용하고 있는 마을 원주민들이 제안하고 야가 적극 지지하는 가운데, 고민하던 그가 마음을 정하게 된 것은 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의 어느 아침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퉁야와 쉬사네는 원주민 마을로 트럭을 타고 다녀와 일꾼들을 데려왔고, 은준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창고를 짓고 있는 공사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모여서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일꾼들은 자리에서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은준은 평소와 다른 그들의 모습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스런 마음에 그를 보며 인사하는 쉬사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를 하고는 함께 있던 퉁야에게로 다가갔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은준은 혹시나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제안을 자신이 승락하지 않아 기분이 상해 더 이상 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속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사실 지금 이들처럼 많은 인력을 싼 값에 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오던 이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아, 보스! 별 일은 아니고, 누 떼가 근처에 있답니다."
"누 떼요?"
"네. 이동중인 무리인듯 한데, 그걸 보더니 누 사냥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원래 이맘때쯤엔 이동하는 동물들을 따라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그럴겁니다."
"아하!"
은준은 퉁야의 이야기에 그도 알고 있던 기억을 머리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이야기하면 역시나 가장 유명한 것중 하나로 세렝게티 초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끝 없는 초원이라는 뜻을 가진 세렝게티는 탄자니아에 속한 드넓은 초원지대인데, 여기서 건기가 되면 풀을 찾아 많은 초식 동물들이 마사이마라로 이동을 한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누 떼로, 그 뒤를 이어 얼룩말이나 영양 그리고 그런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사자와 하이에나, 표범, 치타에 독수리까지 대규모의 무리가 이동을 하기 때문에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쪽은 세렝게티보다 한참 남쪽인데, 여기도 누가 있나?"
의아해하는 은준. 하지만 이것은 워낙에 야생동물의 이동으로 세렝게티가 유명해진 탓에 오해를 한 것으로, '누'가 탄자니아의 세렝게티와 더 북쪽의 케냐의 마사이마라 사이에서 서식하기는 해도, 꼭 그곳에만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분명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누가 살고 있어 은준이 있는 리소테 왕국도 남아공 누의 서식지에서 북동쪽 끝에 걸쳐있었다. 그러니 벤시몽 농장 근처에 누가 나타났더라도 이상할게 없는 사건인 셈이다.
"아하, 그럼 전 주인이 여기서 사냥을 했다고 한 것이 누 같은 것이 있어서 그랬나보구나."
차라리 관광을 왔으면 이곳에 대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은준은 여기에 살면서도 앞으로 벌어 먹고 살 걱정에 당장 밭을 개간하고 하는 일들을 하느라 그가 살고 있는 지역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누는 커녕 야생 동물을 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부분 힘쓰는 사람들이 여기서 일 하는 바람에 사냥하기 어렵나 봅니다. 많이 아쉬워하더군요."
"으음... 하긴, 이곳 사람들도 나름대로 여기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을텐데..."
은준이 무언가 고민을 하는듯 하자 옆에 있던 쉬사네가 제안을 해왔다.
"그러시면 하루정도 시간을 빼보시는건 어떨까요? 보스도 함께 말입니다."
갑작스런 쉬사네의 말에 은준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봐다. 그러자 그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꼭 지금만 사냥이 가능한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많은 무리를 보기는 쉽지 않죠.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냥을 나가면 사냥감도 많이 잡힐겁니다. 혼자 나가는 것보다 위험하지도 않고요. 저희는 겨울을 준비해야하니 지금이 기회이기도 합니다. 만약 보스께서 마을 사람들을 여기에 잡아둔다면 불만이 나오고, 어쩌면 안좋은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루쯤 시간을 빼 보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간다면, 마을 사람들도 보스를 더 좋아할 겁니다."
"하루쯤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사냥이라니, 일반 관광객은 못해볼 경험이 될겁니다."
퉁야도 쉬사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게 둘이 나서니 은준도 회가 동하는걸 느꼈다. 마땅한 오락거리도 없는 이곳에서, 전문가들이 안내하는 사냥 여행이라니 이만한 경험은 한국의 날고 기는 사람들도 못해볼 경험이라 생각했다.
"그럼 한 번 해볼까요?"
은준과 퉁야, 쉬사네 그리고 사냥에 참가할 마을의 전사들은 한번에 트럭에 오른뒤, 먼저 각자 마을에 들러 사냥에 쓸 무기를 챙겼다. 은준도 역시 전 주인이 남긴 사냥용 라이플을 챙겼는데, 이동중에도 혹여 누 무리를 볼 수 있을까 스코프로 사방을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꾼들이 은준과 함께하는 사냥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벤시몽 옥수수 농장에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섞여 있었고, 마을도 각기 떨어진 두 마을에서 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은준은 통역을 위해 쉬사네가 살고 있는 마을의 사냥팀에 참여하기로 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가서 사냥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이니, 같이 사냥을 가도 사냥감을 옮기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각자 마을에서 가까운 곳으로 사냥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 여자들은 그대로 농장에 남아 작업을 하므로 숫자가 반으로 줄었고, 다시 다른 마을 남자들은 그들의 마을에서 나뉘어져 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랬던것이 쉬사네 마을에 도착해 사냥에 참여할 전사들이 합류하고 나니 15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냥꾼 팀이 결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네..."
은준은 쉬사네 마을에서 다시 누 떼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사냥에 참여한 전사들이 손에 들고 있는 총에 가 있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혼잣말을 들었는지 쉬사네가 물었다.
"아아, 솔직히 말해서 사냥을 간다고 할때 나무로 만든 활이나 창을 들고 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전부 총이네요?"
"네, 하하하.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평소 사냥을 다닐땐 보스 말대로 활을 씁니다. 왜냐하면 총알은 비싸기 때문이죠. 총을 쓰는건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일때나 지금 같은 때만입니다."
은준은 쉬사네의 말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존에게 듣기로 AK의 총알이 한 상자에 100달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한 상자라고 해봤자, 사과 상자처럼 큰 상자가 아니라 종이곽으로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상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마구 총을 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총이 편리해도 평소엔 사용을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누 떼를 사냥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총을 써야하죠. 누의 강한 생명력 때문인 것도 있지만, 누 떼의 뒤를 따라다니는 표범 같은 맹수들 때문에 총이 없으면 누를 잡은 뒤에도 사냥감을 뺏길 수 있습니다."
은준은 쉬사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국에서 봤던 자연 다큐를 떠올렸다. 야생에서는 누군가 사냥감을 잡더라도 그것이 항상 온전히 사냥꾼의 몫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사냥꾼, 더 강한 사냥꾼이 나타나면 그것이 자신이 사냥한 고기라 할지라도 내 놓아야만 했다. 그러면 그 고기는 강한 맹수, 덜 강한 맹수, 하이에나, 독수리 순으로 차례로 손을 타 결국엔 하얀 뼈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아, 저쪽에 큰 물 웅덩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에 다들 모여있는 것 같군요."
트럭 뒤에 올라탄 사냥꾼들이 분주히 주변을 살피자 쉬사네가 들은 내용을 은준에게 옮겼다.
"그럼 이제 차에서 내려 걸어 가야나?"
"아뇨. 이대로 차로 가까이 까지 갈겁니다."
"응? 그럼 누 들이 도망가지 않나요?"
은준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 트럭을 타고 지근거리까지 간다는 쉬사네의 말에 되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작은 사냥감이 혼자 있을 때에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 도망치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소리를 죽이고 접근해야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음,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는 곧 도착할 것 같으니 눈으로 보시는게 좋을겁니다."
쉬사네의 말이 끝나고 잠시 트럭은 숲 지대를 지났고, 숲을 벗어나자 곧바로 물가에 몰려 물을 마시고 있는 엄청난 수의 누 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사이 좋은 이웃인냥, 물을 마시는 누 떼 바로 옆에서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며 하품을 하는 사자나, 나무 위에 올라 꼬리를 늘어트린채 누 떼를 주시하고 있는 표범, 또 그 주변을 뱅뱅 맴돌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에, 방금 지나온 숲의 나무 위나 들판에 내려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독수리 떼였다.
게다가 요란하게 엔진음을 내뿜으며 트럭이 나타나도 고개도 들지 않고 물을 마시는 누 떼의 모습에 은준은 탄성을 질렀다.
"어차피 야생은 필요한 만큼만 가져갈 뿐입니다. 누 떼는 여기 모인 맹수들이 전부 배불리 먹더라도 티도 안날 만큼 많고, 누 들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죠."
"몇몇만 희생한다면 나머지 무리는 안전하다..."
은준은 역시나 티비 다큐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른 맹수들은 배를 채운 모양이니,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공격하진 않을것 이지만, 경계를 늦춰선 안됩니다. 또 총 소리에 놀랄 수도 있으니 우리는 이쪽 끝에서 무리 외곽에 있는 녀석들만 잡아 돌아갈겁니다."
쉬사네의 말대로 사냥꾼들은 트럭에서 내려 맹수들이 쉬고 있는 곳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배가 부른 맹수라도 바로 옆에서 총질을 하는 것은 바보도 안할 짓이었다.
은준은 바로 5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자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 차에서 내리기가 무서웠으나, 다른 사람들이 차에서 멀어지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후 사냥꾼들과 무어라 수군거리던 쉬사네가 은준에게 다가와 설명했다.
"총을 쏘고나면 소리 때문에 누 떼가 도망칠테니 서로 같은 목표를 노리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보스도 정하시죠. 꼭 누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모여있는 무리는 누 떼 뿐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풀과 물을 찾아 떠도는 것은 다른 초식 동물들도 마찬가지, 달리는 누 떼와 보폭을 맞출 수 있는 얼룩말이나 영양의 무리도 서로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은준은 자신이 직접 총을 쏴 사냥을 한다는 사실에 흥분해 덩치가 작은 영양보다는 누를 잡기로 했다. 그는 잠시 몇몇을 살펴보다 마침내 목표를 정하고는 천천히 조준했다.
============================ 작품 후기 ============================
아름미르님, 치야님, 백수의시간님, 천마왕님, 중앙시장님, 돈크라이키티님(영어 너무 길어요 ㅜㅜ), Qhthal님, 똘랭님, 에르시리나님, 안녕하세요.
역시 타 사이트 언급하면 패널티가 있군요. ㅎㅎ글을 날려버릴 순 없으니 쉬쉬...!
아, 대항해시대 온라인 세컨에이지 업데이트 하면서 손을 안대게 되네요. 모험해야하는데.. ㅋㅋ 혹시 대항온 하는분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