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은준과 벤시몽 농장은 차호중 의사 선생님과의 통화를 끝으로 며칠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바뀐것이 있다면 작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식 창고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간 은준도 때론 야를 의식하며 한창 끓어오르는 욕구를 다독여야 했는데, 그 이유는 지난 차호중 의사 선생님과의 통화가 그의 생각대로 풀어나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괜히 원주민 이야기까지 꺼냈나? 두세사람만 하면 된다고 했으면 그냥 얼마 주고 빨리 검사를 해버렸을 텐데, 괜히 직원 복지니 뭐니 하다가 원주민들 이야기까지 해버리는 바람에... 여름방학까지 기다리려면 대체 몇 개월을 더 있어야 하는거야? 대학 여름 방학이 몇 월 부터였더라... 8월인가 9월인가? 아니, 그게 끝나는 달이던가? 거 참, 졸업한지 한두해여야 말이지. 벌써 다 까먹었네.'
예전 차호중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그가 이따금 오지 마을을 방문하여 봉사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은준은 검사 비용을 조금 아껴볼 생각으로 그와의 통화에서 그 의료봉사활동을 이용할 생각을 내비쳤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잿밥에 더 관심있는 머릿속 생각과 다르게 전적으로 '보건, 의료 취약 지대인 오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질병 검사' 였다.
그런데 그게 조금 과했던지, 달랑 세 명 때문에 와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벤시몽 농장에 쉰여명의 원주민이 있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자, 차호중 의사 선생님 왈.
"그렇다면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고, 겨울 방학도 다 갔으니 다음 여름 방학때 의대 학생들이 의료 봉사 활동을 나올때 그쪽도 들르는 것으로 하는건 어떨까?"
하시니 은준은 차마 거기에 대고 그때까지 어떻게 참으라는 거냐고 하지 못하고 끝까지 웃는 낯으로, 그렇게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목소리로 그러도록 하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은준은 본의 아니게 야에 대해 신경쓸 시간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창고들이 하나 둘 들어서게되자 원주민들은 퉁야와 쉬사네를 통해 의외의 요구를 전달해왔다. 물론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퉁야나 쉬사네에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지만, 그 둘은 그 요청에 대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벤시몽 농장의 소유주이자 전권을 가진 은준에게 보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스.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이 저 집에서 사는게 어떻겠냐고 하는데요?"
퉁야의 난데 없는 말에 평소처럼 얼굴 도장을 찍으러 나왔던 은준은 띵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지금 짓고 있는 저 창고 말하는 건가요?"
"예. 다른게 아니라 아침 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어차피 있는 집인데 그냥 거기서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을 하고, 밤이 되면 들어가 자고 그러고 싶다고 합니다."
"아니 왜 멀쩡한 집 놔두고 창고에서 자려고 한대요? 그리고 왔다갔다 하는것도 차에 올라타 앉아있으면 데려오고 데려다주는건데 어려우면 퉁야 씨나 쉬사네 씨가 어렵지..."
은준의 말에 쉬사네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고, 은준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십분씩 트럭에 올라 앉아 매일 같이 왕복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일이 띄엄띄엄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계속되고 있는데... 또 그러는편이 보스 입장에서도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기름값도 덜 들어가고, 왔다갔다하는 시간만큼 더 작업 속도도 빨라지겠죠."
'아차! 쉬사네가 그 마을 출신이었지!'
은준은 조금 민망해했다. 당사자 앞에서 침 뱉은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은준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그래도 애초에 집으로 쓰려고 지은 건물도 아니어서 사람이 살기도 불편할 것이고, 아닌게 아니라 맨 땅에서 잘 게 아니라면 가구나 밥도 해먹으려면 필요한게 한두가지가 아닐텐데요? 그건 어떻게 하려고요? 또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고."
"그건 괜찮습니다. 여기서 풀을 베어다 깔고 그 위에서 자면 된답니다. 또 식사야 여기서 마을 사람들끼리 해결하면 됩니다. 또 전부가 여기로 일 하러 온게 아니니 마을은 마을에 남은 어른들이 있으니 괜찮답니다."
정작 은준이 괜찮지 않은데, 마을 사람들은 전부 괜찮다고 하니 은준으로서는 떨떠름할 따름이었다.
'아씨. 설마 밤에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안그래도 여기서 밥 해먹고 뭐 하고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물은 내 집에서 퍼가야 할 텐데, 분명 누구든 들락날락 하게 될거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자기들 집 지어주려고 지은건가? 옥수수 창고로 쓰려고 지은거지. 왜 거기에 들어와 살려고 하는건데?'
효율로 본다면 기름 값 안들고, 왔다갔다 하는 시간도 일을 시킬 수 있으니 작업 속도도 올라가 은준으로서는 이득인 일이었다. 하지만 은준이 어떤 인간인가! 매일 얼굴 마주치며 먹고 자고 하는 퉁야나 야 조차도 자기 집에 들이는데 망설이고, 그나마 들이면서도 남자인 퉁야는 2층은 출입 금지에 야도 어쩔 수 없이 2층 계단 바로 옆 방을 배정해준 인간이었다. 자기애(?)가 투철한건지 아니면 겁이 많은 건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거기에 머리로는 뭐가 이득인진 이해하고 있어 단번에 뚝 잘라 안된다고도 말 못하고 있자 쉬사네는 은근히 은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반면 은준은 그게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혼자 머릿속으로 이 문제에 대해 짱구를 굴렸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일과가 끝날 시간이 되자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은 트럭에 올라타 각자 마을로 되돌아갔고, 집으로 되돌아온 은준이 말 없이 고민에 빠져있자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은준을 부르던 야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안좋으세요."
"응? 아냐, 아무것도. 저녁 먹어야지?"
"아니긴요. 평소 얼굴이 아닌데요. 그러지 말고 제게 털어놔보세요. 제가 이야기를 들어드릴께요. 혹시 알아요? 제가 해결책이 있을지. 제가 이래 봬도 성당에 있을땐 동생들 고민도 들어주고 그랬어요."
은준은 별 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쭉 성당에서 자라온 아이였다. 거기서 보고 배운게 항상 성당을 찾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신부님의 모습이었으니 그녀의 눈빛은 뭔가 기대하는듯 평소보다 반짝거렸다. 은준은 차마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음, 음... 그럼요 다 같이 살면 안되는 걸까요?"
"응?"
은준은 한참 있다가 식사중에 이야기를 꺼낸 야를 보고 순간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다가 식사 전에 하던 이야기의 연장이라는 것을 깨닿고는 포크로 접시에 있는 음식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냥 아예 마을을 근처로 옮기는 거에요. 어차피 그 마을들도 전부 보스 땅이잖아요? 그러니 거기에 마을이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똑같은거죠. 그럴거면 차라리 마을을 전부 이 근처로 옮겨서 다 같이 사는거에요!"
"풉!"
은준은 야의 원대한 포부에 놀라 씹던 음식을 뿜으려다가 간신히 참고는 물잔을 들어 물을 마셔 마저 삼켰다. 하지만 이미 일부는 코로 나올뻔 했는지 콧속이 찡 하고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을을 옮기다니."
"사실 여기는 너무 외져서 사람이 없잖아요. 주말마다 도시에 나가긴 하는데, 요즘은 그래도 쉬사네 씨하고 마을 사람들이 와줘서 시끌벅적하고 좋았거든요. 원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셋 만 있으니..."
야는 말을 흐리며 은준의 눈치를 봤다. 그동안 함께 살며 매일 마주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셋은 제법 많이 친해졌다. 게다가 최근들어선 은준이 야에게 살갑게 구는것 같자 야도 살던 곳에서 떠나 동생과 헤어지면서 움츠러들었던 것이 많이 활발해진 상태였다. 실질적으론 고용인과 피고용인과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그보다 조금은 인간적인 관계로도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야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적 동물? 그거 오랜만에 듣네..."
은준은 야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웃었다. 그도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오래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말이었다. 어쨌든 야는 은준이 주제넘다고 혼내거나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같이 살면 이야기 할 사람도 많고, 서로 돕고 살 수도 있어요. 아! 어차피 소도 그 마을 사람들이 같이 키워주고 있잖아요? 그럼 아예 여기서 젖소도 같이 키우고 하면 고기 같은 것도 신선한걸 얻을 수 있을 거에요. 보스는 고기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마을이 옮겨오면 밭도 생길테고 신선한 채소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나쁜 사람들 아니잖아요. 함께 살면 분명 좋은 일이 많을 거에요. 그리고 마을을 꼭 집 가까이에 둘 필요 없이 지금 창고를 짓고 있는 곳처럼 그정도만 놔두면 괜찮지 않을까요?"
야나 퉁야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은준이 그들을 은연중에 경계한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야도 은준이 마을 사람들을 창고를 짓는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을 경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야는 아예 마을 사람들을 당분간 머무는게 아닌, 아예 마을을 근처로 옮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야의 성격상 평소에 말은 하지 않았어도, 항상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부대끼며 살던 성당에서 나와 외딴 저택에서 사는게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한 상태였다. 그렇게 항상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오가자 대범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야의 돌발발언에 퉁야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속으론 깜짝 놀랐다. 그것이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괜한 입방정 때문에 일자리에서 쫒겨나는 경우를 그간 지나쳐온 농장에서 많이 봐왓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퉁야는 은준의 이어지는 반응에 야가 쫒겨나진 않을 거란걸 알 수 있었다.
"흐음, 마을을 옮긴다?"
그의 반응은 흥미는 아니어도, 적어도 화를 내는 태도는 아니었다. 평소 은준의 성격이라면 별다른 일은 없을 터였다. 또 실제로 은준도 이런 일을 가지고 사람을 쫒아낼 정도로 야박한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특히 '야'에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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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진은 사실 'ㅁ' 으로 시작하는 옆동네 입니다. 한글로 하면 글세상 쯤 될까요? 조아라에서 이 사이트 언급을 해도 되는지 어쩌는지 몰라서 직접적으로 언급은 조금.. ㅎㅎ 그럼 전 이만,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ㅎㅎ